최초의 로마인의 인생 역정을 다룬 로마 건국 신화

 

 

(밑줄긋기)


 

가장 탁월한 인물들에 대하여

누구든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보라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탁월한 인물 셋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호메로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바로가 그만큼 박식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고, 예술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그에게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이 판단은 그들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 둔다. 한편밖에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단지 내가 아는 한도로 시신(詩神)들까지도 이 로마 시인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단에서도 베르길리우스가 그 재질을 주로 호메로스에게서 배워 온 것이었으며, 이 시인이 그의 안내자이며 스승이었고, 《일리아드》의 단 한 줄이 저 위대하고 거룩한 《아에네이스》에 본체와 재료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고찰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는 여기에 이 인물을 감탄스럽고 거의 인간 조건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을 섞어서 생각한다.

사실 나는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 왔다. 앞을 보지 못하며 궁핍한 몸으로 학문이 아직 규칙과 확실한 관찰로 사물들을 기록해 놓기도 전에, 그는 이런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세우고 전쟁을 지휘하고, 어느 학파에 속하건 종교나 철학에 관한 것을 쓰고, 기술을 다루는 일에 간섭하는 자들을 누구나 다 그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지극히 완벽한 스승과 같이 보며, 그의 작품을 모든 종류의 능력을 기르는 기초 터전 같이 이용했다.

그는 무엇이 명예롭고 수치스러우며
유용하고 그렇지 않은가를
크리시포스와 크란토르보다도 더 능란하게
더 완전하게 말한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다른 자가 말하는 것처럼-

마치 무궁무진한 샘처럼
피에리아(詩神들의 고향)의 물에
시인들은 입술을 축이러 온다.                                                                                    (오비디우스)

또 다른 자는 말하기를-                            

헬리콘(보이오티아 접경의 산, 중턱에 시신(詩神)들의 제전이 있었다) 시신들의 길동무들을 더하라.
그 가운데 단 한 사람 호메로스만이
별무리의 높이에 오른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또 하나는 말하기를-

그의 풍부한 원천에서 후세의 시인들은 그들 시가에 물을 길었고
단 한 사람의 재보로 부유해져서
감히 수많은 작은 하류로
물을 끌어대는 큰 강이다.                                                                                           (마닐리우스)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것을 생산해 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출생할 때에 대개 불완전하며 성장하면서 불어 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자기 앞에 아무도 모방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뒤에 그를 모방할 자가 없었다고 말한 이 아름다운 증언에 따라, 우리는 그를 시인들 중에서 처음이며 마지막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생기와 행동을 가진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유일한 실질적인 언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전리품 가운데에 호화롭게 장식된 한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호메로스를 넣어 두는 데에 사용하라고 명령하며, 이 시인은 자기 군사 업무에 가장 훌륭하고 충실한 고문이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아낙산드리다스의 아들 클레오메네스는, 호메로스는 군사 훈련에 대단히 훌륭한 스승이기 때문에 라케데모니아 인들의 시인이라고 말하였다.

플루타르크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 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크세노파네스가 어느 날 시라쿠사의 폭군 히에론에게 자기는 하인 둘을 먹여 살릴 거리도 갖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자, 그가 대답했다. "뭐? 그대보다 훨씬 더 가난하던 호메로스는 아무리 죽을 지경이언정 만 명 이상의 학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파나이티오스가 플라톤을 철학자들의 호메로스라고 말했을 때에, 이 말에 무슨 부족한 것이 있었던가?

그뿐더러 어떤 영광을 그의 영광에 비겨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이름과 작품보다 더 사람들의 입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트로이의 헬레나와 그녀로 인한 전쟁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고 인정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네 아이들은 3천 년이 넘는 옛날에 그가 꾸며 댄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다.

누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를 모르는가? 어느 사사의 가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꾸민 이야기 속에 자기들의 근원을 찾고 있다. 마호메드라는 이름을 두 번째 가진 터키 황제가 교황 피우스 2세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우리는 트로이 사람들에게서 나왔고, 나도 그들과 같이 그리스 인들에 대해서 헥토르의 피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데 관심을 가졌는데, 어째서 이탈리아 인들이 내게 대항해서 단결하는지 나는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국왕들과 국가들과 황제들이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그 속에 자기의 역할을 연기해 오고, 이 큰 우주 전체가 그것의 무대로 쓰이는 한 고상한 연극이 아닌가?(825∼828쪽)



 

 * * *

 

 

호메로스의 두 걸작 서사시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흔히 최초의 문학으로 간주된다. 이 두 작품은 모든 유럽 문학의 '근원이자 원천'이며, 새로운 사상의 대로로 향하는 '대문'이다. 합쳐서 2만 8천 행에 이르는 두 서사시는 그 전과 후의 수백 년 기간을 통틀어 '이 놀라운 업적에 필적할 만한 작품은 전혀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호메로스의 재능은 그리스에서 아주 초기부터 인정을 받았다. 아테네인들은 마치 오늘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가 성서를 대하듯이, 무슬림이 코란을 대하듯이 그의 작품을 대했다.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재판에서 『일리아스』의 구절을 인용했다.(190∼191쪽)

그리스에서 호메로스의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를 갖춘 것은 대략 기원전 300년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스라엘에서 히브리 성서(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약성서)는 기원전 200년경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230쪽)


 


 * * *


 

19세기 초 대학 교육 관련 여러 자료를 분석하면서 레빈은 1929년 하버드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제임스 프리먼 클라크라는 사람이 이런 불평을 하는 대목을 제시했다. "우리가 공부에 흥미를 느끼도록 애쓰는 교수는 없었다. 『일리아드』가 무슨 늪지대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 발이 푹푹 빠지면서 호메로스를 그저 읽어내는 게 과제였다. ······ 이 불후의 서사시가 담고 있는 영광과 찬란함과 부드러움과 매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다. 6음부 운율의 리듬에 대해서도 아무 설명이 없었다."(1110쪽)

문화 전쟁에 대해 가장 독특한 반응을 보인 책은 데이비드 덴비David Denby(1943∼ )의 걸작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Great Books』이다. 《뉴욕》매거진 영화평론가이자 《뉴요커》객원편집위원인 덴비는 1961년에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해 교양과목 두 강좌를 들었는데 제목은 '문학 인문학'과 '현대문명'이었다. 1991년 가을 덴비는 컬럼비아대로 돌아가서 똑같은 강의를 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강의는 얼마나 변했으며, 지금은 어떤 식으로 가르치는지, 1990년대 학번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은 또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를 알아보고픈 호기심에서였다. 그가 영화평론가로 활동한 것은 1969년부터였다. 물론 여전히 평론 일을 좋아하지만 '스펙터클의 사회'에 이골이 나기도 한 터였다. 변화무쌍하고 간접적인 미디어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미디어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정보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것이 되었다. 일단 그럴 듯한 것 같다가도 바로 흩어져버린다. ······ 누구의 정보도 확고하지 않다. 미국인들이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데 원인이 있다. 남들처럼 나도 지쳤지만 그래도 뭔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미디어 속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의 틀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재미는 넘치지만 뭔가 몹시 불만스러운 상태 말이다. "덴비는 우리를 자신이 좋아하는 위대한 책들(호메로스, 플라톤, 베르길리우스, 성서, 단테, 루소, 셰익스피어, 데이비드 흄, 존 스튜어트 밀, 조셉 콘래드, 드 보부아르, 버지니아 울프) 곁으로 데려가면서 관심 없는 작가들(갈릴레오, 괴테, 다윈, 프로이트, 아렌트, 하버마스)은 무시한다. 그의 저서는 위대한 책들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유명하다. 고전을 영화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하고, 아들 맥스가 오래된 목소리의 가치를 모른 채 겉만 번지르르하고 알맹이는 없는 미디어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그는 소수민족 출신 학생들이 왕왕 필독서 목록이 '백인 유럽인' 일색으로 짜인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당혹감과 서글픔 같은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그의 논지는 이런 것이다. 백인 학생이든 흑인 학생이든 라틴계든 아시아계든 '독서 습관이 제대로 붙은 상태로 대학에 들어온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과거와 명목상의 연계 이상의 것을 가진 학생은 거의 없다. '백인 학생 대다수가, 흑인이나 황인종보다 우수하다고 하는 서구의 지적 전통에 대해 알지 못한다.' 호메로스, 단테, 보카치오, 루소, 마르크스의 세계는 이제 아주 낯설고 지금 우리와는 다르다 등등. 이어 덴비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위대한 책 강좌를 많은 학생들은 대단히 불편하게 생각한다. 요즘 분위기에 맞지 않고, 수강생의 게으름이 들통 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동적인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사실상 학부 커리큘럼에서 가장 급진적인 강좌다." 덴비는 학생 때 읽었고, 책을 쓰면서 다시 공부한 '위대한 책들'이 사람마다 다른, 독특한 해석이 가능하며, 문화적 우파가 원하는 식의 해석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학생들은 '고전이 우리가 사랑을 할 때, 고통을 받을 때, 그리고 지식을 추구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단계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은 서구의 정전은 서구의 정전을 공격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도] 전통적인 '백인' 문화를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런다고 손해 볼 일은 없다."

덴비가 보기에 진짜 위협은 미디어다.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영상과 음향의 홍수에 그저 맥을 놓고 있다. 그런 속에서는 현재를 제외한 모든 순간은 이상하고 핏기 없고 죽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현대 세계는 뭐가 잘못 돼도 단단히 잘못 됐다고 그는 말한다. 1961년 대학에 들어갔을 때 팝의 열정은 뭔가 해방적인 분위기를 주었고, 답답한 교실에 신선한 공기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화는 시들해졌고, 팝은 순응과 안락감을 대표하는 분야가 되고 말았다. 전통적인 고급문화가 그 낮섦과 난해함 때문에 오히려 학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충격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다. ······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다."(1122∼1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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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편린들
몽테뉴에 대한 추억......


(밑줄긋기)













우리가 갖는 쾌락이나 재물들은 고통과 불편이 얼마간 섞여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쾌락의 샘 복판에 쓴 것이 솟아나와
꽃처럼 피어나는 연인들을 괴롭힌다.                                                                                   (루크레티우스)

우리의 탐락은 극도에 도달하면 어느 점에서 신음과 오열의 풍이 있다. 이 탐락이 고민 속에 사라진다고 말하지 못할 일인가? 진실로 우리가 그 모습을 절정 상태에 꾸며 볼 때에, 우리는 그것을 오뇌·유연·허약·실신·병태 등 병적이며 고통스런 소질의 접두사로 매흙질한다. 그들이 혈연성과 동질성으로 되었다는 두드러진 증거이다.

심각한 기쁨은 쾌활성보다 더 엄격함을 지닌다. 극도로 충만한 만족감에는 유쾌미보다도 한층 안정감이 있다. "절제 없는 행복감은 그 자체를 파괴한다." 안일은 우리들을 찢어발긴다.

그리스의 한 시구 첫머리가 바로 그런 뜻으로 말하고 있다. "신들은 우리에게 주는 모든 일들을 판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어떠한 좋은 일도 순수하고 완벽하게 주지 않으며, 그것을 우리는 대가를 치르고 산다는 말이다. 노고와 쾌락은 기본 성질상 대단히 다르지만, 그렇지만 무엇인지 모르는 자연스런 결합으로 서로 협력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신이 고통과 쾌락을 뭉쳐서 뒤섞어 놓으려고 했다가 그것을 잘 해낼 수 없자, 이들을 꼬랑지끼리 붙들어매어 놓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하였다.

······

대자연은 우리에게 이런 혼돈을 드러내 보인다. 화가들은 울 때에 사용하는 얼굴 움직임과 주름살이 웃을 때에도 역시 쓰인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 표현이 완수되기 전에 화가가 그려가는 모습을 살펴보라. 어느 쪽으로 그려 가는 것인지 의심이 생긴다. 그리고 웃음의 절정에는 울음이 섞인다.

"보상 없는 불행은 없다."(세네카) 인간이 소원대로의 편익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상상해 보면(신체의 모든 부분이 늘 생식 행동(生殖行動)의 쾌감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의 것과 같은 쾌감으로 잡혀 있을 경우를 들어 보면), 나는 그가 쾌감의 무게 밑에 쓰러져서, 그렇게도 순수하고 견실하고 보편적인 탐락을 전혀 견디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경지에 있으면 그는 마치 발을 단단히 디딜 수 없어 빠져 들어갈까 두려워하는 것같이 조급해져서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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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8-07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잠깐 쉬는 사이 오렌님께서 알라딘 시작하셨나봐요.
불행에도 보상이 있다는 말, 맞는 말 같습니다.^^*
자주 뵈올게요.

oren 2013-08-07 10:07   좋아요 0 | URL
팜므님 반갑습니다.
알라딘을 시작했다기 보다는 그저 책 속 글귀를 조금 끄적거리고 있는 중이지요.
무더운 여름철에 바다로 계곡으로 나다니면서도 그 속으로 '풍덩' 뛰어들지는 못하고,
발만 슬쩍 담그듯이 말입니다. ㅎㅎ

야클 2013-08-0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렌님 ^^

오렌님 서재 잠깐 구경했는데 참 대단하시네요. 읽으신 책들의 수준이나 독서량, 독서욕 모두.
님 페이퍼에 자극받아 저도 '몽테뉴수상록' 주문했답니다.
'웃음의 절정에는 울음이 섞인다'.... 이것도 수상록에 나오는 글인가 보죠?
덕분에 좋은 책 읽게될 것 같은 예감에 벌써부터 설레네요. 감사합니다. ^^

oren 2013-08-07 23:30   좋아요 0 | URL
야클님 반갑습니다.

변변치 못한 제 서재를 둘러봐 주셔서 고맙구요. 변변치 못한 서재에 대해 너무 과한 말씀을 남기셔서 어리둥절한데, '몽테뉴 수상록'을 주분하셨다니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딱 30년 전인 1983년에 군대 있을 때 매우 감명깊게 읽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더욱 새로운 생각들과 감동이 솟는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30년 전에 읽었던 책은 까마득히 오래 전에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그때 끄적거려둔 '독서 노트'가 있어서 그때 기록해둔 '인상깊은 구절들'을 또다시 마주치는 기쁨도 여간 크지가 않습니다. 이번에 새로 읽게 된 책은 1,330쪽 분량인데, 지금까지 800쪽 정도 읽으면서 버릇처럼 '노트에 옮겨 적은 구절들'이 벌써 60페이지가 넘는답니다. ㅎㅎ

아무튼 야클님께서도 '몽테뉴 수상록' 꼭 재미있게 읽으시길 발께요~

oren 2013-08-07 23:41   좋아요 0 | URL
(30년 전에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기록해둔 '독서 노트' 내용을 타이핑해 둔 게 있는데,
다소 두서없고 잡다하긴 하지만 이참에 여기에 덧붙여도 될까요?)

* * *

몽테뉴 수상록

슬픔에 관하여

가벼운 심려는 요설이고 큰 심려는 망연자실케 한다. (세네카)

진실한 목표가 없는 심령이 그릇된 목표에 정열을 쏱는 모습

우리는 우리들의 혼란한 정신에 대해서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도 족하지 않다.

운수로 되었건 꾀로 되었건 승리는 언제나 칭찬 받는다. (아리오스토)

8. 懶怠에 관하여

한가함은 항상 정신을 산란케 한다. (루카누스)

사방에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있지 않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심령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정신에게는 어떤 문제에 전념하도록 제어하고 강제하는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이런 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흐리멍덩히 헤매게 된다. 그래서 이런 동요속에서 정신은 헛된 잡상이건 몽상이건 내놓지 않는 것이 없다.

- 몽테뉴, 『수상록』 中에서


9. 거짓말장이들에 관하여

주둥이에 이런 못된 버릇이 생기는 것을 놓아두면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참으로 놀라울만큼 어려운 일이다.

모든 사상은 생명을 걸어가며 품어보기에 족할 만큼 강하다.

20. 철학함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23. 습관에 관하여

습관은 모든 사물들의 최강의 상전이다. (플리니우스)

25. 현학에 관하여

마음이 들어있지 않은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스노바우스)

교육은 우리들을 타락시키지 않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교육은 우리들을 더 낫게 변질시켜 주어야 한다.

감히 현명하여라.
시작하여라.
잘 살아 볼 시간을 천연시키는 일은
강을 건너려고 물이 다 흘러가 버리기를 기다리는
촌사람 격이니라.
그동안 강물은 흐르며 영원히 흘러갈 것이다. (호라티우스)

철학

가장 젊은 자도 철학을 피하지 말 것이며
가장 늙은이도 거기 물리지 말지어다. (_____)




28. 友情에 관하여

우정은 전반적이고 보편적이며 그러면서도 절제있고 고른 열이며 거기 거칠고 찌르는 것이란 없이 아주 보드랍고 매끈한 심정이다.

- 몽테뉴, 『수상록』 中에서




자만심과 호기심은 우리의 영혼의 두 가지 큰 재앙이다. 후자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간섭하게 하고, 전자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도 미해결, 미결정인 상태로 두지 못하게 한다.

-『수상록』, 제27장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中에서

39. 고독에 관하여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줄 아는 일이다.
사물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자기를 사물에 종속시키지 말기를 (호라티우스)

각자는 자기 길을 택할 줄 알아야 한다. (프로페르티우스)

42. 우리들 사이에 있는 불평등에 관하여

목마를 틈이 없는 자는 물 마시는 쾌감도 알지 못할 것이다.

43. 사치단속법에 관하여

6. 실천에 관하여.

실제 있는 것보다 못하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지 겸손은 아니다.

10. 서적에 관하여

자기 무식을 인정하는 일은 판단력을 가졌다는 가장 아름답고도 확실한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전속력으로 나아가야 할 내 말의 목표이다. (프로페르티우스)

그들에게는 의지할 본체가 있어야 한다.
그들이 이렇게 여러 재료를 한 편에 실어 놓은 것은 자기 고유의 묘미를 가지고 작품을 지탱해 나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의 구상만으로는 우리들의 흥미를 끌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야기나마 재미나게 하려고 한다.

그의 말하는 방식이 완벽하게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료에는 관심이 끌리지 않는다.

<아에네이스> <광분하는 롤랑>

전자는 높고도 확고한 비상으로 날개를 활짝 펴서 날며
늘 자기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후자는 이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앉듯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뛰어 돌아다니며 자기 날개에 자신이 없어서 짧은 거리밖에는 날지 못하고 숨과 힘이 지탱못할까봐 밭이랑마다 내려서 쉰다.


책마다 끝에 읽기를 마친 날자를 기록하고
적으나마 그것을 읽으며 그 작가에 관해서 내가 품어본 일반적 관념과 그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거기서 대강 끌어낸 판단을 적어 넣어두는 습관을 지녔다.

12. 레이몽 스봉의 변호

Que sais je? 끄 세 쥬? 나는 무엇을 아는가?

극미한 성공에 용기를 얻을 때에 인간 심성의 오만이 저지를 일은 놀랄 정도다.(플리니우스)

세상이 우리를 위해서 있다.
창조주나 피조물들이 모두 우리를 위해 있다.
이것이 우주 만상이 향해가는 종결점이며 목적지이다.

민중은 해방되기 위해서만 진리를 찾으니
기만당하는 것은 그들에게 유리하다고 믿을 만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원칙을 부인하는 자들과는 토론해 볼 필요가 없다. (플루토)

이 모든 견해들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인가는 어느 신이나 정해 줄 일이다. (키케로)

영혼의 본질은 심오하다.
어째서 그들은 무한수의 그리이스 문자를 마당에 뿌려 놓다가 <일리아드>의 원본을 만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런 것은 어디서 본뜬 것이 아니고 내게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옛사람들의 어느 심정과 연락이 닿고 있음을 나는 안다.

여색의 탐락은 본성이 요구하면 혈통과 문벌과 지위는 고려할 것이 못되며 다만 우아미와 연령과 미모를 고려할 일이라고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키케로)

동일한 사물이 백이나 천 가지로 우리 좋을 대로의 모습과 고찰을 받는 것이다.



야클 2013-08-08 11:07   좋아요 0 | URL
와~~ 군대에 계실때 '몽테뉴 수상록'같은 묵직한(?) 책을 읽으셨다니 놀랍습니다. ^^

예전 페이퍼에 오렌님 서재 사진도 있네요. 깔끔하고 양서들로만 구비된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구석에서 모처럼 추억의 책도 발견했습니다. 바로 Horngren의 원가회계요.
최근 서점에서 보니까 14판이 나와있던데, 아마 오렌님 책장에 있는 원가회계는 5~6판 정도는 될 듯 하네요.
학교 다닐때 선택과목 교재였기 때문에 기억이 납니다. 저 다닐 때는 연두색이 아니라 파란색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좋은 책이었던 생각이 납니다. 상대 다니면서 제일 재밌게 공부한 책이 아닌가 할 정도로.

오늘 무척 무덥다고 하네요. 더위에 지치시지 말고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 ^^

oren 2013-08-08 12:13   좋아요 0 | URL
군대 있을 때가 책을 읽기에는 참 좋았어요.
근무시간(?) 외에는 따로 할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ㅎㅎ

그리고, 야클님께서도 Horngren의 책으로 원가회계를 공부하셨다니 깜놀입니다.
저는 군복무를 마치고 3학년에 복학했던 1986년에 저 책을 사서 공부했는데 몇 판인지는 모르겠네요.

어제 오후에는 '입추'에 맞춰 가까운 '송추'로 운동을 나갔다가 정말로 더워 죽는 줄 알았답니다.
당분간은 계속 더울 듯한데 늦여름을 조금 더 즐길 생각도 좀 해봐야 겠어요. ㅎㅎ
 

(밑줄긋기)













내가 이 책으로 일반 사람들과 가질 수 있는 교제는 기껏해야 그들의 인쇄 기계를 빌린다는 일뿐이다. 그것이 더 신속하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 책의 낱장은 아마도 장터에서 버터 한 귀퉁이가 녹아 떨어지지 않게 막아줄 것이다.

다랑어나 올리브를 마음껏 싸는 포장지가 되어 주자.                                                        (마르티알리스)

그리고 나는 자주 고등어에게 편하게 들어 있을 옷을 제공하련다.                                      (카툴루스)

내 글을 읽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내가 그 많은 한가한 시간을 그렇게도 유용하고 즐거운 사색으로 보낸 것이 시간의 낭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

내가 그렇게도 끊임없이, 그렇게까지 호기심을 가지고 나 자신을 보고해 온 것은 단지 시간 낭비뿐이었을까? 오로지 공상으로, 그리고 말로만 몇 시간 동안 자기를 더듬어 보는 자들은, 그것으로 자기 연구와 자기 작품, 그리고 자기 직업을 삼으며 성심껏 전력을 다해서 꾸준히 기록해 가는 일에 전념하는 자만큼 본심으로 자기를 살피지도 자기 속에 침투하지도 못한다.

가장 감미로운 쾌락은 그것이 내부적으로 소화되면 그 흔적을 남기기를 피하고,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남의 눈에 띄는 것을 꺼린다.

얼마나 여러 번 이 일이 내게서 울적한 상념을 흩어지게 해 줬는가! 모든 부질없는 상념들은 울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외따로 반성하는 소질을 풍부하게 선사하였고,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사회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그 최대 부분은 우리 자신에게 신세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스스로 반성해 보도록 자주 권고한다. 내 공상에도 어떤 질서와 계획을 세워서 몽상해 가도록 정리하여 그것이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면, 이 공상에 떠오르는 하고많은 자디잔 생각들에 형체를 주어서 기록해 두는 수밖에 없다. 나는 몽상들을 기록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 몽상들을 주의해서 듣는다. 내가 얼마나 여러 번 어떤 행동에 관해서 예법과 이성이 드러내 놓고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데 마음속에 화가 북받쳤는가, 그것을 대중에게 알려 주려는 의도도 없지 않아서 여기에 털어놓는다. 그리고 참으로---

저 잡놈의 눈깔 위에 탁!
배때기에 탁! 등때기에 탁!                                                                                              (마로)

이 시의 채찍은 몸뚱이에 때릴 때보다 종잇장 위에 매질할 때에 자국이 더 잘 박힌다. 뭐? 내가 다른 책들에서 무엇이건 도둑질해 작품을 장식하거나, 보강할 수 있을까 하고 엿보아 온 것에, 좀더 책들의 말에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면 어떠냐고? 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 공부한 것이 아니고,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얼마쯤 공부하였다. 적어도 이때는 이 작가, 저때는 저 작가의 머리나 다리를 스쳐 보고 꼬집어 보는 것이 공부라면 말이다. 결코 내 사상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벌써 오래 전에 형태가 잡힌 사상들을 보충하고 거들어 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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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8-0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 생각하고 넓게 바라보면
살아가는 길이 어떤가 하고
찬찬히 깨달아요.

책도 그저 책일 뿐이고,
책 하나 이루려고 나아가는 길에서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길을 연다고 느껴요.

oren 2013-08-07 10:1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결국 책을 통해 삶을 조금 더 배우고, 또 책이 조금 더 삶 속에 자주 끼어들 때,
삶을 조금이라도 더 깊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밑줄긋기)
 

 

우리는 잠자며 잠 깨어 있고, 잠 깨어서 잠자고 있다.

우리 인생을 꿈에 견주어 본 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옳게 본 것이리라. 우리가 꿈을 꿀 때의 심령은 잠이 깨어 있을 때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살며 행동하며 모든 소질들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좀 무르고 흐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차이가 분명히 밤과 환한 대낮 사이 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밤에서 그늘까지의 차이는 있다. 저 편에서는 심령은 잠자고 있다. 이 편에서는 다소간 졸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암흑이다. 킴메리아 인의 암흑이다.

우리는 잠자며 잠 깨어 있고, 잠 깨어서 잠자고 있다. 나는 잠을 자면서 똑똑히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잠이 깨어 있을 때에도 언제나 흐리지 않게 충분히 또렷하게 보이는 적이 없다. 하기는 잠이 깊이 들 때에는 꿈을 잠재우는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잠이 깨어 있음은 결코 깨끗이 꿈을 씻어 흩을 만큼 깨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꿈은 깬 자들의 꿈이며, 꿈보다 더 나쁜 꿈이다.

우리의 이성과 심령은 잠자는 동안에 나오는 공상과 개념을 받아들이며, 심령이 낮의 행동에 대해서 인정하는 바와 같은 권위를 꿈속의 행동에도 주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방식의 꿈꾸는 일이며, 깨어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잠이 아닌가' 하고 의문에 붙이지 않는가?



 * * *

 

언제나 생성될 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

시간에 있어 각 순간은 오직 선행하는 순간, 즉 그 순간의 앞 순간을 없앤 후에만 존재하며, 그 순간 자체도 마찬가지로 곧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그 내용의 연속은 별도로 해도 마치 꿈과 같이 헛된 것이고, 현재는 이 둘 사이에 있는 넓이도 존속성도 없는 경계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충족 이유율의 다른 모든 형태에서도 이와 같은 공허함을 다시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또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원인과 동기에서 생기는 모든 것은 상대적인 현존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이와 같은 성질은 그것과 동일한 형태로만 존재하는 다른 것에 의해, 또 그러한 다른 것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견해의 근본은 옛날부터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견해를 이야기하며 사물의 영원한 유동을 탄식했고, 플라톤은 그 대상을 언제나 생성될 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경시했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것을 존재하고 영속하는 유일한 실체의 단순한 우연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인식된 것을 물자체에 대한 단순한 환상으로 간주했고, 마지막으로 오랜 옛날 인도인의 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마야(베단타 학파의 술어로 환(幻) 또는 화상(化像)의 뜻, 현상 세계는 진제의 입장에서 보면 마야다)'다. 인간의 눈을 덮고 이것을 통해 세계를 보게 하는 거짓된 베일이다. 이 세계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또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꿈과 같은 것으로, 방랑자가 멀리서 보물로 생각하는 모래 위에 반짝이는 햇빛과 같으며, 또 그가 뱀이라고 생각하고 던져 버리는 새끼줄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517쪽)


외부세계의 샐재성에 대한 어리석은 논쟁

직관이 인과성의 인식에 의해 매개된다는 이유 때문에, 객관과 주관 사이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인과 관계는 언제나 직접적인 객관과 간접적인 객관 사이에서, 즉 언제나 객관들 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객관과 주관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는 그릇된 전제에 서기 때문에 외부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어리석은 논쟁이 벌어진다. ······

인과성의 법칙은 직관이나 경험에 선행하며, 따라서 흄이 말한 것처럼 직관이나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객관과 주관은 이미 제1제약으로서 모든 경험에 선행하며, 충족 이유율 일반에 선행한다. 이것은 충족 이유율이 모든 객관의 형식이며 객관의 일반적인 형상에 지나지 않지만, 객관은 반드시 주관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둘 사이의 근거와 귀결과의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충족 이유율에 대한 논문에서 나는 바로 이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는데, 이 논문은 충족 이유율의 내용을 모든 객관의 본질적인 형식으로서, 즉 모든 객관의 일반적인 방식으로서 객관 그 자체로 돌아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객관은 그런 것으로서 주관을 필연적인 상관 개념으로서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주관은 언제나 충족 이유율의 타당한 범위 밖에 있다. 외부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논쟁은 충족 이유율의 타당성을 주관에까지 잘못 적용하여 생긴 것이다. 이러한 오해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논쟁 자체가 결코 해명될 수 없었다.(523쪽)


세계의 경험적 실재성

이들 두 설(실재론적 독단론과 회의론)에 대해서는 우선 객관과 표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 다음 직관적인 객관의 존재는 바로 그 '작용'이라는 것, 즉 이 작용이야말로 사물의 현실성이며,  주관의 표상 밖에서 객관의 현존을 요구하거나 사물의 작용과는 다른 현실적인 사물의 존재를 요구한다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하고 모순된 일이라는 것, 따라서 직관된 객관의 작용 방식을 인식한다면, 그 밖에 인식할 만한 것이 객관에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 객관, 즉 표상인 한 객관 자체는 완전히 규명된 셈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그 한도 내에서는 순전히 인과성으로 나타나는 공간과 시간 속에 직관된 세계는 실재하고 있으며, 완전히 나타나 있는 그대로의 것이며, 오로지 표상으로서 아무런 밑받침 없이 인과성 법칙에 의해 연관성을 가지며 나타난다. 이것이 세계의 경험적 실재성이다.(524쪽)


비뚤어진 정신을 소유한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세계의 실재성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궤변으로 비뚤어진 정신을 소유한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언제나 충족 이유율을 부당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생긴다. 충족 이유율은 어떻나 종류건 모든 표상을 서로 결합시켜 주지만, 결코 표상을 주관과 결합시키거나 주관도 객관도 아닌 객관의 근거에 불과한 것과 결합시키는 일은 없다. 여러 객관만이 근거가 될 수 있고, 그것은 반드시 또 다른 객관에서 유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관도 객관도 아닌 객관의 근거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개념이다.(525쪽)


직관적 세계


직관적 세계는 거기에 있는 한, 고찰자의 마음에 아무런 망설임이나 의혹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세계에는 오류도 없고 진리도 없다. 오류나 진리는 추상이나 반성의 영역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세계는 감각과 오성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법칙에 따라 인과의 고리에 매여 전개되는 직관적 표상으로 소박한 진리성을 갖고 나타난다.(526쪽)



실생활과 꿈과의 친근성

흔히 있는 일이지만, 꿈이 현재와의 인과 관계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해도 알아낼 수 없는 경우, 어떤 사건이 꿈이었는지 혹은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하는 것은 영원히 구별되지 않은 채 놓아둘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 있어서 실생활과 꿈과의 친근성이 실제로 우리에게 대단히 실감나게 다가온다. 게다가 이 친근성은 예로부터 많은 위대한 사람들에게 인정되었고 또 언급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떳떳하게 보증할 수 있는 것이다. 《베다》나 《푸라나》는 마야의 직물이라 불리는 현실계에 대한 모든 인식을 꿈과 유사한 것 이상으로는 인식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온다. 플라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평범한 사람은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철학자는 깨어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 마지막으로 칼데론은 이와 같은 견해에 완전히 매혹되어 형이상학적인 희곡 《인생은 꿈》에서 이것을 표현해 보려 했다.

이상과 같이 여러 시인들의 구절을 인용해 보았지만, 이번에는 내 생각을 비유로 나타내 보려 한다. 실생활과 꿈은 같은 책의 페이지와도 같은 것이다. 연관성이 있는 생활을 현실 생활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때그때의 독서시간(낮)이 끝나고 휴식시간이 되어, 이번에는 가벼운 기분으로 페이지를 뒤지면서 두서도 연관도 없이 여기저기를 펼쳐 보는 일이 있다. 이미 읽은 페이지도 있고 아직 읽지 않은 페이지도 있는데, 어쨌든 같은 책의 페이지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띄엄띄엄 읽은 페이지는 물론 일관된 통독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일관된 독서라 해도, 여기저기 띄엄띄엄 읽는 것과 같이 즉석에서 시작되어 끝나는 것이며, 따라서 전체를 하나의 큰 페이지로 볼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 보면, 여기저기를 띄엄띄엄 읽는 것도 통독에 비해 그렇게 뒤떨어지는 것만도 아니다.(527쪽)


눈으로서 존재할 뿐

인식이 자유롭게 되면 우리는 마치 잠과 꿈에 의해 현실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 버리고 우리는 이미 개체가 아니며, 개체는 잊혀지고, 오직 순수한 인식 주관일 뿐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세계에서 눈으로서 존재할 뿐인데, 이것은 인식의 힘을 갖고 있는 모든 생물에 작용하고 있지만, 오직 인간에게는 의지의 역할을 완전히 탈피할 수 있고, 그 때문에 개별성의 차별이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보는 눈이 강대한 왕의 눈이든 불쌍한 거지의 눈이든 별로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행복도 고뇌도 모두 이러한 한계를 넘은 경지에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723쪽)



그러므로 우리는 돌연 진지하게 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을 밖에서 보면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의미하며, 또 안에서의 느낌도 얼마나 답답하고 무의식적인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의 생활은 무기력한 동경과 고뇌이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사상을 가지고 인생의 사계를 돌아다니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꿈을 꾸듯 허우적거리며 간다. 그들은 태엽에 감겨서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움직이는 시계와도 같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이 새로 감기고, 이때까지 무수히 되풀이하여 연주된 오르골의 곡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하여 한 악절마다 한 박자마다 보잘것없는 변주를 붙여서 연주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 모든 인간의 얼굴이나 생애도 무한한 자연의 영혼이 살려고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의지의 짧은 꿈에 지나지 않고, 이 영혼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그의 무한한 지면에서 재미로 그려 보는 잠시 동안의 형상이다. 그것은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실로 보잘것없는 일순간에만 존재가 허용되고, 다음 형상에게 장소를 양보하기 위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인생의 중요한 측면이 있는 것이지만, 이들 잠시 동안의 형상이나 이 재미없는 착상들은 모두 생에 대한 의지 전체에 의해, 그 격렬함 속에서 많고 깊은 고통, 또 마지막에는 오랫동안 무서워하고 끝으로 나타나는 괴로운 죽음으로 속죄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체를 보면 우리는 돌연 진지하게 되는 것이다.(8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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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철학자들 중의 가장 현명한 학파(피론 학파)는 말한다. 나는 방금 옛 사람(세네카)이 인생을 경멸하며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한 사물을 잃어버렸다는 비통과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은 똑같다"(세네카)고 한 이 묘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 말은 그것을 잃을 근심이 있으면 생을 즐긴다는 것이 진실한 재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이 찬 기운이 있을 때에 더 잘 일어나듯, 우리의 의지는 반대에 부딪칠 때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낀다.

당연한 일로, 안일에서 오는 포만보다 더 우리 취미에 역하는 것은 없고, 희귀하고 얻기 어려운 일보다 더 우리 취미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 "모든 사물에서 쾌락은 그것을 놓쳐 버릴 위험 때문에 더 증대한다."(세네카)

갈라여, 싫다고 해라.
쾌락에 고통이 없으면 사람은 포만을 느낀다.                                           (마르티알리스)

리쿠르고스는, 사랑을 생기있게 보존하려고 라케데모니아의 부부들이 숨어서밖에 자지 못하게 하였고, 부부가 함께 자다가 들키면 다른 사람들과 자는 것만큼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날 날짜 정하기의 어려움, 들킬 위험, 다음 날의 수치,

남모를 나의 생각, 나의 침묵
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호라티우스)

이것이 소스에 쏘는 맛을 준다. 사랑이라는 수작의 얌전하고도 부끄러움 많은 방식에서 얼마나 얄궂게 음탕한 장난이 나오는 것인가! 탐락은 고통으로 자극받기를 원한다. 탐락은 찌르르 쑤시는 때에 더 달콤하다. 창녀 플로라는 폼페이우스와 동침할 때는 반드시 그에게 자신이 물어뜯은 자국을 남겨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욕의 대상을 강력히 포옹하여 신체에 고통을 주며,
이빨은 흔히 입술에 자국을 남긴다.
그 대상이 무엇이건 이 대상 자체를 상해하려는
비밀스런 행동에서 사나움의 싹이 솟아난다.                                           (루크레티우스)

모든 일은 이렇게 돌아간다. 고통이 사물들에게 가치를 준다.

저 위대한 카토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아내가 자기 것인 동안은 싫어하더니,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다음에는 그 여자를 욕심내었다.

나는 내 종마장에서 늙은 말 한 필을 쫓아냈다. 이놈은 암컷 냄새만으로는 붙여 볼 도리가 없었다. 제 암컷들과는 일이 쉬우니까 바로 물려 버렸다. 그러나 다른 집 암컷들은 어느 것이 목장 부근을 지나기만 해도 귀찮게 이힝힝거리며 흥분하는 꼴이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우리에게 무엇을 금지하는 것은 그것을 욕심 내게 하는 일이다.

그대가 애인을 감시하지 않으면
그녀는 머지않아 내 관심을 잃으리라.                                                   (오비디우스)

그것을 우리에게 완전히 맡겨 둔다는 것은 경멸을 일으키게 하는 일이다. 결핍과 풍부는 똑같이 폐단이 되고 만다.

그대는 남은 재산에 골치를 앓고
나는 가난으로 골을 싸맨다.                                                                 (테렌티우스)

욕심과 향락은 똑같은 고통 위에 사람을 둔다. 애인이 냉혹하게 굴면 괴롭다. 그러나 힘 안 들이고 쉽게 넘어오는 것도 실은 거북하다. 불만과 분노는 자기가 욕심내는 사물을 높이 평가하는 데서 나오는 만큼, 그것이 연정을 자극해서 열이 오르게 하며, 그 반대로 포만은 염증을 일으킨다. 이것은 무디고 둔하며, 지치고 잠든 열정이다.

여자가 애인을 오래 지배하려면
그를 경멸할 일이다!                                                                           (오비디우스)

업신여기거나 모욕하라, 애인들이여,
어제 거역하던 자가 오늘은 항복하리라.                                               (프로페르티우스)

포파에아가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꾀를 쓴 것은 애인들에게 더 비싸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자는 각기 내보이고 싶고, 남자는 각기 보고 싶어하는데, 왜 이 미인들은 발꿈치 뒤까지 가리는 것인가? 우리의 욕망과 그녀들의 욕망이 주로 거기 있는데, 어째서 여자들은 그 부분들을 겹겹이 가리고 있는 것인가? 우리네 여자들이 그 옆구리를 무장하는 저 성과 요새는 우리의 욕심을 도발하며, 우리를 물리침으로써 더 끌어 보려는 것밖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녀는 수양버들 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앞서 쳐다보아 주기를 바랐다.                                             (베르길리우스)

때로 그녀는 내 정열에 대해 옷으로 장벽을 쌓았다.                              (프로페르티우스)

처녀들의 부끄러움 타는 기술은 어디에 필요한가? 시치미를 떼고 냉정한 체하는 맵시, 엄격한 용모, 그리고 가르치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수작, 그것이 모두 우리 욕심대로 이런 장애를 극복하고 책망하고 유린하고 싶은 생각을 더 나게 하는 것밖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상냥한 애교와 어린애다운 정숙함을 미쳐서 놀아나게 하며, 이 존대하고 거만한 엄숙함을 우리 정열에 굴복시키는 일은 쾌락일 뿐만 아니라 허영심을 만족시킨다. "엄격함과 겸손과 정숙함과 절조를 정복함은 영광이 된다. 그리고 부인들에게 이런 수작을 쓰지 말라고 권하는 자는 여자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속이는 자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녀들의 마음은 공포로 떨리고, 우리의 말소리만 들어도 깨끗한 귀를 더럽혀 그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는데, 다만 힘에 못 이겨서 우리가 귀찮게 구는 수작에 넘어간다고 믿어야 한다.

미모는 아무리 그 힘이 크다 해도 이런 방법의 중개가 없이는 맛들일 거리가 안 된다. 이탈리아에 가 보라. 거기에는 돈에 팔린 미인, 더욱이 매우 날씬한 미녀가 많은데, 그녀들이 자기를 예쁘게 보이려고 얼마나 색다른 방법과 기술들을 찾고 있는가를 보라. 그러나 사실 무슨 짓을 해도 공중 앞에 팔려 내놓은 몸이니, 그녀들은 언제나 약하고 기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여성이 지닌 두 가지 같은 효과 중에, 우리는 적어도 더 많은 장애와 모험이 있는 편을 더 훌륭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식이다.

우리는 한번 결혼하면 그것을 풀어 볼 모든 방법을 없애고 있으니, 그 결속을 확고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구속이 단단한 만큼, 의지와 애정의 결속은 더 풀어지고 느즈러져 있다. 반대로 로마에서 결혼이 그렇게 오랫동안 명예롭고 안정되게 한 것은, 아무 때건 원하면 서로 헤어질 수 있는 자유에 있었다. 그들은 아내를 빼앗길지도 모르니, 그만큼 더 아내를 사랑하였다. 그리고 아무 때나 이혼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그들은 사백 년 이상 아무도 그것을 쓰지 않고 보냈다.

허용된 일은 매력이 없다.
금지된 일은 욕심을 도발한다.                                                               (오비디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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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땡스투는 살아 있다?
    from Value Investing 2014-11-25 01:49 
    허용된 일은 매력이 없다.금지된 일은 욕심을 도발한다. - 오비디우스 * * *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는 우리말 속담이 있다. 11월 21일이 지나도 이상하게 자꾸만 쌓이는 땡스투 적립금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속담이다. 더 흔하게 쓰는 말로 '쌀 떨어지니 입맛 돈다'는 격이다. 이번에 '도서정가제'가 개정 시행되면서 '구매자'가 받는 땡스투 적립금이 어쩔 수 없이 '지급할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는 재방송하면 입만 아프다. 그런데 어느
  2. <18주년, 당신의 기록>을 보며 떠올린 ‘묘한‘ 욕망
    from Value Investing 2017-07-06 19:43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 몽테뉴 * * * '미처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분을 소포클레스만큼 재치있게 말한 사람도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포악한 주인'은 물론 '여자와 동침하고 싶은 욕망'을 의인화한 표현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얼마나 그 욕망에 시달렸으면 그런 말을 다 했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는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그 주
 
 
페크pek0501 2013-08-04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끝의 글... 허용된 일은 매력이 없어서 금지된 일에 마음을 붙잡히는 일이 일어나는군요.
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부모가 반대를 하는 경우 같이) 목을 매고 말이죠.
금서는 더 읽고 싶고요.^^
인간의 마음이 이상하죠?

oren 2013-08-05 11:53   좋아요 0 | URL
해안으로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라 해도 마침내 우뚝 솟은 바위와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이내 저절로 해안가 모래 위에서 스르르 잦아지고 말듯, 인간의 마음도 자연을 닮은 데가 참 많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