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우리는 잠자며 잠 깨어 있고, 잠 깨어서 잠자고 있다.

우리 인생을 꿈에 견주어 본 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옳게 본 것이리라. 우리가 꿈을 꿀 때의 심령은 잠이 깨어 있을 때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살며 행동하며 모든 소질들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좀 무르고 흐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차이가 분명히 밤과 환한 대낮 사이 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밤에서 그늘까지의 차이는 있다. 저 편에서는 심령은 잠자고 있다. 이 편에서는 다소간 졸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암흑이다. 킴메리아 인의 암흑이다.

우리는 잠자며 잠 깨어 있고, 잠 깨어서 잠자고 있다. 나는 잠을 자면서 똑똑히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잠이 깨어 있을 때에도 언제나 흐리지 않게 충분히 또렷하게 보이는 적이 없다. 하기는 잠이 깊이 들 때에는 꿈을 잠재우는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잠이 깨어 있음은 결코 깨끗이 꿈을 씻어 흩을 만큼 깨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꿈은 깬 자들의 꿈이며, 꿈보다 더 나쁜 꿈이다.

우리의 이성과 심령은 잠자는 동안에 나오는 공상과 개념을 받아들이며, 심령이 낮의 행동에 대해서 인정하는 바와 같은 권위를 꿈속의 행동에도 주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방식의 꿈꾸는 일이며, 깨어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잠이 아닌가' 하고 의문에 붙이지 않는가?



 * * *

 

언제나 생성될 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

시간에 있어 각 순간은 오직 선행하는 순간, 즉 그 순간의 앞 순간을 없앤 후에만 존재하며, 그 순간 자체도 마찬가지로 곧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그 내용의 연속은 별도로 해도 마치 꿈과 같이 헛된 것이고, 현재는 이 둘 사이에 있는 넓이도 존속성도 없는 경계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충족 이유율의 다른 모든 형태에서도 이와 같은 공허함을 다시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또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원인과 동기에서 생기는 모든 것은 상대적인 현존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이와 같은 성질은 그것과 동일한 형태로만 존재하는 다른 것에 의해, 또 그러한 다른 것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견해의 근본은 옛날부터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견해를 이야기하며 사물의 영원한 유동을 탄식했고, 플라톤은 그 대상을 언제나 생성될 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경시했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것을 존재하고 영속하는 유일한 실체의 단순한 우연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인식된 것을 물자체에 대한 단순한 환상으로 간주했고, 마지막으로 오랜 옛날 인도인의 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마야(베단타 학파의 술어로 환(幻) 또는 화상(化像)의 뜻, 현상 세계는 진제의 입장에서 보면 마야다)'다. 인간의 눈을 덮고 이것을 통해 세계를 보게 하는 거짓된 베일이다. 이 세계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또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꿈과 같은 것으로, 방랑자가 멀리서 보물로 생각하는 모래 위에 반짝이는 햇빛과 같으며, 또 그가 뱀이라고 생각하고 던져 버리는 새끼줄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517쪽)


외부세계의 샐재성에 대한 어리석은 논쟁

직관이 인과성의 인식에 의해 매개된다는 이유 때문에, 객관과 주관 사이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인과 관계는 언제나 직접적인 객관과 간접적인 객관 사이에서, 즉 언제나 객관들 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객관과 주관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는 그릇된 전제에 서기 때문에 외부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어리석은 논쟁이 벌어진다. ······

인과성의 법칙은 직관이나 경험에 선행하며, 따라서 흄이 말한 것처럼 직관이나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객관과 주관은 이미 제1제약으로서 모든 경험에 선행하며, 충족 이유율 일반에 선행한다. 이것은 충족 이유율이 모든 객관의 형식이며 객관의 일반적인 형상에 지나지 않지만, 객관은 반드시 주관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둘 사이의 근거와 귀결과의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충족 이유율에 대한 논문에서 나는 바로 이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는데, 이 논문은 충족 이유율의 내용을 모든 객관의 본질적인 형식으로서, 즉 모든 객관의 일반적인 방식으로서 객관 그 자체로 돌아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객관은 그런 것으로서 주관을 필연적인 상관 개념으로서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주관은 언제나 충족 이유율의 타당한 범위 밖에 있다. 외부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논쟁은 충족 이유율의 타당성을 주관에까지 잘못 적용하여 생긴 것이다. 이러한 오해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논쟁 자체가 결코 해명될 수 없었다.(523쪽)


세계의 경험적 실재성

이들 두 설(실재론적 독단론과 회의론)에 대해서는 우선 객관과 표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 다음 직관적인 객관의 존재는 바로 그 '작용'이라는 것, 즉 이 작용이야말로 사물의 현실성이며,  주관의 표상 밖에서 객관의 현존을 요구하거나 사물의 작용과는 다른 현실적인 사물의 존재를 요구한다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하고 모순된 일이라는 것, 따라서 직관된 객관의 작용 방식을 인식한다면, 그 밖에 인식할 만한 것이 객관에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 객관, 즉 표상인 한 객관 자체는 완전히 규명된 셈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그 한도 내에서는 순전히 인과성으로 나타나는 공간과 시간 속에 직관된 세계는 실재하고 있으며, 완전히 나타나 있는 그대로의 것이며, 오로지 표상으로서 아무런 밑받침 없이 인과성 법칙에 의해 연관성을 가지며 나타난다. 이것이 세계의 경험적 실재성이다.(524쪽)


비뚤어진 정신을 소유한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세계의 실재성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궤변으로 비뚤어진 정신을 소유한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언제나 충족 이유율을 부당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생긴다. 충족 이유율은 어떻나 종류건 모든 표상을 서로 결합시켜 주지만, 결코 표상을 주관과 결합시키거나 주관도 객관도 아닌 객관의 근거에 불과한 것과 결합시키는 일은 없다. 여러 객관만이 근거가 될 수 있고, 그것은 반드시 또 다른 객관에서 유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관도 객관도 아닌 객관의 근거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개념이다.(525쪽)


직관적 세계


직관적 세계는 거기에 있는 한, 고찰자의 마음에 아무런 망설임이나 의혹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세계에는 오류도 없고 진리도 없다. 오류나 진리는 추상이나 반성의 영역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세계는 감각과 오성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법칙에 따라 인과의 고리에 매여 전개되는 직관적 표상으로 소박한 진리성을 갖고 나타난다.(526쪽)



실생활과 꿈과의 친근성

흔히 있는 일이지만, 꿈이 현재와의 인과 관계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해도 알아낼 수 없는 경우, 어떤 사건이 꿈이었는지 혹은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하는 것은 영원히 구별되지 않은 채 놓아둘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 있어서 실생활과 꿈과의 친근성이 실제로 우리에게 대단히 실감나게 다가온다. 게다가 이 친근성은 예로부터 많은 위대한 사람들에게 인정되었고 또 언급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떳떳하게 보증할 수 있는 것이다. 《베다》나 《푸라나》는 마야의 직물이라 불리는 현실계에 대한 모든 인식을 꿈과 유사한 것 이상으로는 인식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온다. 플라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평범한 사람은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철학자는 깨어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 마지막으로 칼데론은 이와 같은 견해에 완전히 매혹되어 형이상학적인 희곡 《인생은 꿈》에서 이것을 표현해 보려 했다.

이상과 같이 여러 시인들의 구절을 인용해 보았지만, 이번에는 내 생각을 비유로 나타내 보려 한다. 실생활과 꿈은 같은 책의 페이지와도 같은 것이다. 연관성이 있는 생활을 현실 생활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때그때의 독서시간(낮)이 끝나고 휴식시간이 되어, 이번에는 가벼운 기분으로 페이지를 뒤지면서 두서도 연관도 없이 여기저기를 펼쳐 보는 일이 있다. 이미 읽은 페이지도 있고 아직 읽지 않은 페이지도 있는데, 어쨌든 같은 책의 페이지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띄엄띄엄 읽은 페이지는 물론 일관된 통독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일관된 독서라 해도, 여기저기 띄엄띄엄 읽는 것과 같이 즉석에서 시작되어 끝나는 것이며, 따라서 전체를 하나의 큰 페이지로 볼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 보면, 여기저기를 띄엄띄엄 읽는 것도 통독에 비해 그렇게 뒤떨어지는 것만도 아니다.(527쪽)


눈으로서 존재할 뿐

인식이 자유롭게 되면 우리는 마치 잠과 꿈에 의해 현실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 버리고 우리는 이미 개체가 아니며, 개체는 잊혀지고, 오직 순수한 인식 주관일 뿐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세계에서 눈으로서 존재할 뿐인데, 이것은 인식의 힘을 갖고 있는 모든 생물에 작용하고 있지만, 오직 인간에게는 의지의 역할을 완전히 탈피할 수 있고, 그 때문에 개별성의 차별이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보는 눈이 강대한 왕의 눈이든 불쌍한 거지의 눈이든 별로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행복도 고뇌도 모두 이러한 한계를 넘은 경지에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723쪽)



그러므로 우리는 돌연 진지하게 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을 밖에서 보면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의미하며, 또 안에서의 느낌도 얼마나 답답하고 무의식적인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의 생활은 무기력한 동경과 고뇌이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사상을 가지고 인생의 사계를 돌아다니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꿈을 꾸듯 허우적거리며 간다. 그들은 태엽에 감겨서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움직이는 시계와도 같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이 새로 감기고, 이때까지 무수히 되풀이하여 연주된 오르골의 곡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하여 한 악절마다 한 박자마다 보잘것없는 변주를 붙여서 연주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 모든 인간의 얼굴이나 생애도 무한한 자연의 영혼이 살려고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의지의 짧은 꿈에 지나지 않고, 이 영혼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그의 무한한 지면에서 재미로 그려 보는 잠시 동안의 형상이다. 그것은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실로 보잘것없는 일순간에만 존재가 허용되고, 다음 형상에게 장소를 양보하기 위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인생의 중요한 측면이 있는 것이지만, 이들 잠시 동안의 형상이나 이 재미없는 착상들은 모두 생에 대한 의지 전체에 의해, 그 격렬함 속에서 많고 깊은 고통, 또 마지막에는 오랫동안 무서워하고 끝으로 나타나는 괴로운 죽음으로 속죄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체를 보면 우리는 돌연 진지하게 되는 것이다.(8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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