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페어 플레이 프로젝트 -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 때문에 억울하고 화가 나는 전 세계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실제로 바꾼 놀라운 실험
이브 로드스키 지음, 김정희 옮김 / 메이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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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소개글을 보고 보관함에 담아두긴 했으나, 내용에 크게 끌리지는 않았었다. 집안일을 100장의 카드로 정리해 게임을 하듯 그것을 나누라니. 시작부터 못할 것 같아 지레 겁을 먹었거나 아예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거나. 

한동안 나도 내가 하는 집안일을 모조리 종이에 써보자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엇을, 어디까지 적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서 시작도 못했다. 그 대신 반대의 방법을 택해 다른 식구들에게 자기가 알아서 하는 집안일을 적어보라고 했다. 결과는 대실패. 나의 의도는 빗나가버렸다. 내가 수시로 불평하며 이야기를 해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끊임없이 반복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보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려면 자극 요법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테이블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때서야 이 책을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어떤 방법이든, 그것이 집안일의 공정한 분배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어떤 책이라도 읽겠다는 마음이. 그동안 페미니즘 책들을 읽으면서 늘 고팠던 가르침 중 하나가 집안일 분배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기에. 방법에 관한 이런 책도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많이 나와야 하는 책들이 이렇게나 많다. 요즘 자주 하는 말.^^;;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읽어서인지 나쁘지 않아, 해봐야 겠어, 생각했다. 술술 읽히기도 한다. 단순한 일의 분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짚어주어 좋았고. 집안일에 매몰되지 말고 자신을 찾으라는 격려도 좋았다. 이 프로젝트가 남편들에게 어떤 점이 좋은지를 적은 부분은 그대로 보여주어도 효과가 있을 듯 하다. 협상 테이블에 앉힐 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정한 게임을 통해 진정한 삶을 되찾고 관계 변화의 경험을 누리고 싶다면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규칙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두 사람 모두 시간에 가치를 매기는 방식을 새롭게 바꾸고, 각자 집안일에 쓰는 시간을 균형 있고 재조정한다는 목표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파트너에게 시간을 인식하는 틀을 바꾸라고 요구하기 전에 당신 스스로도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봐야 한다. 

남편이 화상 회의를 하는 2시간은 내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2시간보다 더 값진가? 즉, 무대 뒤에서 집안일을 하는 데 드는 시간은 무대 위에서 유급 활동을 하는 데 드는 시간과 같은 가치를 갖는가?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파트너의 대답은 어떤가? 당신과 파트너 모두 서로의 시간을 한정된 자원으로 인식하기 전까지는, 집안일 대부분이 여성에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은 유한한 자원이다. 두 사람의 시간 모두 다이아몬드다. 둘 다 똑같이 하루 24시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당신의 시간이 파트너의 시간과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스스로 확신해야만 육아와 가사 노동 분담이 동등한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아마도 가장 어려운 일은 이것이 아닐까. 내 시간이 파트너의 시간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 더 나아가 확신하는 일. "남편은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해요. 그런 사람한테 집안일을 해 달라고 할 순 없잖아요." 같은 말들을 내뱉지 않기 위하여 내 시간과 노동력이 가치 있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일. 집안일을 나누자고 제안하기 전에 나의 확신을 먼저 세우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파트너가 조목조목 어쩌구저쩌구 그럴싸한 언어로 공격한다면 받아칠 여유 없이 금세 무너져내릴 수도 있다. 지금껏 내가 집안일 분배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일단 엎드려 자세인 것은 이것 때문일 확률이 매우 높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이 남성보다 멀티태스킹에 더 뛰어나다는 가설을 뒷받침해 줄 연구는 없습니다. 사실, 멀티태스킹은 남녀 누구에게나 좋지 않아요. 우리 뇌는 한 번에 하나 이상의 복잡한 일을 처리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여성이 멀티태스킹에 더 강하다는 걸 입증하려고 설계한 연구에서도 그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 짐작에, 여성들이 가정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건 그 일을 더 잘하는 쪽으로 생물학적 변이가 일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문화적인 영향이라고 봅니다. 여성이 그걸 더 잘한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는 거죠." 


실제 생활에서 다른 식구들(모두 남자)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잘 못한다. 그 하지 못하는 일을 나는 한다. 그러니까 이게 내가 그렇게 길들여져서 그런 거란 말이지. 그리고 어쩌면 멀티태스킹을 남자들이 잘 못하는 건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 그러니까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집 안의 누군가가 늘 그런 일들을 하고 있으니까.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 옆지기는 자기 가족의 생일을 정확히 모른다. 어떻게 엄마 아빠 생일도 모르냐고 했더니 늘 (여)동생이나 형수가 챙겨 미리 알려줘서 외울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오마이갓.




"당신은 장보기 카드를 갖고 있다. 당신의 아들은 머스터드 소스를 뿌린 핫도그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런데 냉장고와 식료품 창고에 머스터드 소스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것이 바로 인지(Conceive)다. 이제 당신은 매주 새로 짜는 장 볼 목록에 머스터드 소스를 추가한다. 가게에 언제 갈지 일정을 잡고 파트너와 다른 식구들에게 추가할 게 없는지 확인한다. 이렇게 계획(Plan)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엔 상점에 가서 장을 보고 돌아와 아들이 핫도그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기 전에, 냉장고에 머스터드 소스를 넣는다. 이것이 실행(Execute)이다. 

공정한 게임에서 CPE를 한다는 것은 특정 카드를 가진 사람이 혼자 알아서 - 누가 상기시켜 주거나, 적당히 하거나, 핑계를 대거나, 아니면 완수한 일에 대해 '잘했다'는 칭찬을 바라지 않고 - 인지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 '그건 비현실적이야. 우리 방식도 아니고, 해 본 적도 없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렇지 않다. 나는 다양한 커플들을 대상으로 시범 테스트를 한 결과, CPE를 잘 따른 부부들이 상대방에 대한 원망과 소극적으로 드러내는 적대감을 멈추고 공정하고 능률적으로 집안일을 분담함으로써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걸 수없이 봐 왔다." 


확실히 저자의 카드를 이용한 방법은 말보다 더 나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 같다. 조금씩 집안일을 분배하려고 아이들에게 맡긴 일은 언제나 내가 그것을 '인지'시켜야 겨우 행해진다. 결국 나만 피곤한 건 매한가지인 상태. 

며칠 전 저녁의 일이다. 저녁식사 후 씽크대의 그릇 정리와 뒷마무리를 맡은(내가 맡긴) 큰넘이 세척기에 들어가지 못한 그릇들을 씻고 있었다. 옆지기가 가득 찬 주방 쓰레기통을 비우려 해서 내가 말렸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음식찌꺼기 등이 나오는데 씽크대 정리가 끝나야 쓰레기봉지를 묶을 수 있으니까. 한참 후 (옆지기에 의해) 묶인 쓰레기봉지를 작은넘이 들고 나갔다. 쓰레기와 재활용 용기 등을 현관 밖 쓰레기통에 가져다 넣는 것은 작은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옆지기에게 이 간단하고도 복잡한 일의 비효율성을 지적했다. 주방에서 나온 쓰레기들을 모아 바깥에 내다놓는 일을 세 사람이 했을 뿐 아니라, 앞서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으니 말이다. 이런 식의 집안일들이 생각보다 많다. 내가 식구들에게 바라는 것도 저자의 말처럼 인지, 계획, 실행에 이르는, 알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하는 모습이다. 

나는 카드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협상 테이블에 세 남자가 기꺼이 앉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만들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만들어야 한다,로 문장을 바꾼다.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해라. 단, 신중하게. 




"당신의 삶에 창조적인 공간을 만들려고 할 때, 아니면 그것을 꿈꾸거나 상상하기 시작할 때 그때가 바로 집안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하는, 죄책감과 미안함이라는 강풍에 떠밀려 머릿속을 시커멓게 뒤덮는 온갖 허드렛일의 짙은 먹구름에 가장 취약할 때다. 있는 힘껏 저항하라. 삶의 열정과 목적을 되찾는 것에 대해 나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시간에 대한 잘못된 메시지들은 무시해 버려라. 그런 메시지는 당신이 유니콘 스페이스에서 결실을 얻는 것을 방해하고 결국 그 공간까지 삼켜버릴 테니까 말이다. 당신이 느끼는 두려움 저편에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게 있다. 그것을 절대 잊지 마라." 


죄책감과 미안함. 이걸 떨쳐버리려고 무진장 애쓴다. 미안한 감정이 생기면 내가 왜 미안해야 하지, 생각하면서도 찜찜한 느낌이 남는 건 아직 어쩔 수 없다. '머릿속을 시커멓게 뒤덮는 온갖 허드렛일'도 되도록이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물론 잘 안 된다. 최소한의 일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면서 어떻게 하면 계속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한다. 식구들의 행동을 관찰한다. 앞으로 내가 제안할 생활규칙과 집안일분배의 기준&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이것 역시 쉽지는 않다. 반발도 예상된다. 무너지지 않고 버티기 위해, '두려움 저편에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게 있다'를 잊지 말아야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내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도. 협상 테이블에 네 식구가 둘러앉아 집안일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 날을 되도록 앞당기고 싶다. 




"혹시 아내가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 이 책을 읽는 걸 보고, 당신과 전혀 상관없는 자기 계발서라고 넘겨짚었을 수도 있지만 확실히 하겠다. 나는 두 사람 모두 승자가 될 수 있게 하려고 이 책을 썼다. 사실 둘 다 직접적인 이익을 보지 못하면 이 게임은 실패작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다. 당신이 공정한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면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가정생활에 관해 이야기할 때 당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마침내 당신과 배우자가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게 된다

- 역할과 기대치의 명확한 정의(더 이상 누가 무슨 일을 맡아야 할지 헤매지 않아도 된다)

-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파트너와 함께 집안일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자율성 

- 당신이 할 일에 대한 확실한 소유권

- 파트너/남편/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넘어 개인의 관심사를 쫓고 우정을 나눌 여분의 시간

- 행복한 파트너십 

- 더 만족스럽고 뿌듯한 육아 경험 

- 외가소성 향상과 수명 연장 


이 정도면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 아닌가? 이게 다가 아니다. 공정한 게임에 참여했을 때 잃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지긋지긋한 잔소리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때 느껴지는 나쁜 기분 

- 애써서 한다고 했는데 지적당하고 비판받는 기분 

- 가정생활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일에 관한 입씨름 

- 누가 더 많이 하고, 누가 더 잘했나를 따지는 일상 

- 시간에 쫓기는 기분 

- 배우자가 '이제 난 할 만큼 했어!'라고 선언하는 것에 대한 걱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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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6-30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멀티 못해요. 😭 남자가 더 멀티 못한다는 식으로 퉁쳐주는 거 ㅋㅋㅋ 싫으네요 진짜 ㅋㅋㅋ 그리구 이 글에서 느껴지는 지난한 난티님의 노동력(사랑없이는 맘먹어지지않는..)!!! 제가 다 속상하네요.. 인류 역사와의 투쟁 승리하시길! 지더라도 잘지는 싸움 하시길!! 전 사보타주도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ㅋㅋ

난티나무 2021-06-30 15:23   좋아요 1 | URL
사실 여자들이 멀티태스킹을 잘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라 익숙해져서 잘 한다고 착각하고 사는 거겠죠. 한번에 하나만 할 수 있는 게 맞는 거 같아요. 과학적으로도 그렇다고 하고요.
인류 역사와의 투쟁! 우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요즘 저의 모습을 보면 사보타주 은근히 하고 있는 거 같으네요. (단어 뜻 정확히 떠오르지 않아 찾아보고 왔어요.ㅠㅠ) 계획적이지는 않았으나 부분적으로 하고 있... 아하하... 좀더 적극성이 필요하겠어요. 아자!

공쟝쟝 2021-06-30 15:37   좋아요 1 | URL
최대한 웅장하게 싸움과 실천에 의미 부여하기 ㅋㅋㅋ 근데 사실이 그래요 ㅋㅋ 그쵸? ㅋㅋ 가부장제 흥!
 
[eBook] 젠더 모자이크 - 뇌는 남녀로 나눌 수 없다
다프나 조엘.루바 비칸스키 지음, 김혜림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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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이 오면 하라고 해야 겠다, 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몇 달 전에는 화장실 변기 물이 계속 쿠앙콸 하고 새서, (쫄쫄 새는 정도가 아닌 심하게 새는 수준) 급히 뒤쪽 물탱크 뚜껑을 열려고 시도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뚜껑을 못 열고 옆지기 오면 해결하라고 해야지 해버렸다. 지금껏 단 한번도 그 뚜껑을 내가 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설상가상, 물흐름을 끊는 밸브조차 오래 쓰지 않아 뻑뻑해져서 돌아가지 않았다. 물탱크 뚜껑을 여는 법은 무척 쉬웠고 아마도 몇 분 정도 끙끙거렸다면 나도 쉽사리 열 수 있었을 것이다. 늘 옆지기가 해왔으니까, 무언가를 고치는 건 옆지기의 몫이니까, 라고 생각해왔다. 거기에 더해, 어떤 일이 됐든 간에 뭐라도 하나 더 그가 했으면 하는 불만에서 나온 욕구의 결과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후자가 더 큰 요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불만에 차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가 좀 겸허해져야 하는 일 아닐까 싶었다. 옆지기가 살림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나는 옆지기가 처리하는 일들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별 생각이 없었다. 물론 큰 차이는 있다. 옆지기는 살림을 거의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그가 하는 또는 해야 하는 일들의 일정을 줄줄이 머릿속에 꿰고 있기는 하다는 사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내(여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편견, 그(남자)가 해야 할 일이라는 편견, 플러스 내가 아니라도 할 사람 있다는 방관, 또 플러스 귀찮음까지, 지금껏 내가 행했을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작은 사건이었다. 이 책의 첫부분을 보았을 때 바로 그 기억이 떠올랐다. 


"남성과 여성은 성에 따른 차이가 없다고 항상 믿어왔고, 내 생활도 그 믿음을 따르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 순간 나는 기계와 관련된 위급 상황을 '남자'가 해결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1장)




성별 차이를 과학적 연구 결과로 밀어붙이는 주장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유리한 쪽으로 말만 바꾸는 기회주의자들 같다. 과학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현실이 경악스럽다. 하긴, 지금 이 세상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몰리에르Molière는 1672년에 희극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Les femmes savantes>에서 이 두려움을 풍자했다. 여기서 남편은 집안일을 소홀히 하는 아내와 다른 과학도 여성들에 대해 불만을 쏟아낸다. "그들은 글을 쓰고 작가가 되고 싶어 해. 아무리 심오한 과학도 문제없다고 하지. 달의 운동, 북극성, 금성, 토성, 화성... 그리고 나한테 줄 식사는 챙기지 않는다니까." (2장)


아니, 잠깐만. 원서 제목이 Les femmes savantes 이다. 영문판 제목은 The learned women 이다. 그런데 한글판 제목은 왜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인 것인가? 여성 학자들, 아는 여자들, 배운 여자들, 이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이 되었네. 여성, 여자는 남성, 남자라는 반댓말이 존재하는데 여인의 반댓말인 남인은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해변의 여인~ 이라고는 하지만 해변의 남인~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말이다, 식사를 챙기는 사람은 꼭 여성이어야 한다고, 엄마나 할머니여야 한다고, 이제 그만 말하자. 옛날옛적 고리적 때부터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면 이제는 그러지 말자, 좀. 




"인간의 두뇌는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단지 여자에게 흔하거나 남자에게 흔한 특징들이 모인 고유한 모자이크일 뿐이다. 그리고 이 모자이크는 만화경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색 조각의 형태처럼 일생을 통해 변화한다." (7장)


넘쳐나는 편견과 고정관념들은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를 젠더에 가둔다. 그렇게 자란 내가 불쌍하고 역시 그렇게 자란 나의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편견은 깨어질 가능성이 있다. 다 커버린 아이들의 생각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의 형태가 아닌 투쟁의 형태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오랫동안 여성은 기초연구 전체에서뿐만 아니라 임상 실험에서 배제되었다. 

동물 연구에서 암컷의 배제는 부분적으로 암컷의 호르몬 주기가 결과를 헷갈리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그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수컷의 호르몬 수준도, 다른 다양한 생리학적·행동적 수치와 마찬가지로, 암컷만큼 변동이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특정 성별의 동물을 사용하는 관행이 수립되고 나니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신경과학을 비롯하여 수컷 실험실 동물을 오랫동안 사용했던 과학자들은 암컷을 포함시키면 결과가 바뀌지 않을지 두려워했다. 그 결과로, 연구 분야에 원래 있던 성 편향이 몇십 년간 지속되었다." (12장) 


이 내용은 다른 책에서도 읽었다. 과학에서의 젠더 공백. 그 결과 약물과 병원 처치의 피해를 더 많이 보는 여성들. 3년 동안 식구들 모두 똑같은 독감 백신을 맞고 나만 겨울 내내 시름시름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나. 4살 터울의 10대 아이들과 많이 큰 체구의 옆지기와 왜소한 내가 모두 같은 양의 백신을 맞는 것에 대해 한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성인 기준으로 복용하는 약의 양도 마찬가지. 이런 것들이 바로 잡히는 날이 언제쯤 올까? 




"물론 이분법적인 구분이 더 심각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전통 사회에서 여성은 부동산을 소유하거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수 없고, 은행 계좌를 개설하거나 운전을 하지 못하며, 남성 가족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집을 나오지 못한다. 이떤 사회에서는 그 규제가 살인에까지 이른다. 여성이 가족에게 불명예를 가져왔다고 판단되면 남성 가족원이 그녀를 죽일 수도 있다. 서구 사회에서도 '#미투' 운동에서 목격된 바와 같이 여성은 너무나 자주 성적 희롱과 폭력의 희생양이 된다. 

남성도 마찬가지로 젠더 이분법 때문에 강요되는 큰 위험에 마주친다. 여자아이나 여성에게 미치는 이분법의 영향은 쉽게 인식되지만, 남자아이나 남성은 그들이 젠더 시스템에서 지베 집단이 된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상처를 받을 수 있다. " (16장) 


'여성이 남성에게 불명예를 가져왔다고 판단되면 남성 가족원이 그녀를 죽일 수도 있다.' 기원전 2천여년 전부터 만들어진 이런 악습이 아직도 현대사회에서 반복된다. 거다 러너의 책 <가부장제의 창조>에 이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만일 그녀가 정숙하지 않았으며, (집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는 경향이 있고, 집을 황폐하게 하고 남편을 얕잡아보았다면, 그 여성은 물에 던져질 것이다. (함무라비법 CH§143) 

강간이 도시 내에서 범해졌건, 트인 벌판에서 일어났건, (공공의) 거리에서 밤에 일어났건, 혹은 도시의 축제에서 일어났건, 처녀의 아버지는 처녀를 범한 남자의 부인을 취해서 그녀를 불명예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부인을 남편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자기가 취할 것이다. 아버지는 능욕당한 딸을 그녀를 능욕한 남자에게 배우자로 줄 것이다. (MAL§55) " 


당시의 법문이다. 말도 안 돼, 그런 법이 어딨어, 라고 반응하겠지만 위의 인용구에도 나오듯이 현대에도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는가. 한 남자가 선배와 싸우다 '화'가 나서 선배의 여자친구를 찾아가 강간하고 죽인 사건이 얼마 전 한국에서도 일어났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단성 교육single-sex education에 대해서도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학생 혹은 남학생만으로 구성된 집단을 가르치는 단성 교육은 종종 종교와 전통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전 세계에서 시행되어왔다. 그러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여학생과 남학생의 두뇌는 다르므로 교육도 달라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단성 교육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단성 교육의 일부 지지자들은 진심 어린 우려를 나타내는데, 예를 들면 혼성 교육을 하는 교실을 소란스러운 남학생 몇몇이 장악하여 여학생들의 능력 개발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배적인 집단이 교실을 장악하면, 놀림이나 폭력의 표적이 되지 않고 마음대로 자신을 표현하기 힘든 것은 여학생이나 남학생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교실을 압도하는 이 남학생들도 자신들의 집단이 요구하는 행동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스스로 매여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소수의 남학생이 '장악'하지 않는 관용적인 환경을 만드는 것이 남학생 없는 여학생의 '안전지대'를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해결책이다." (19장) 


교육 제도가 뿌리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거기에 더해 젠더 인지와 감수성은 반드시 유아 때부터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더 많은 교육인들이 필요하다. 어떻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고 교육인을 길러내야 한다. 정책이 필요한 지점이다. 젠더 교육을 위해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지점이다. 도통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 자료나 통계 자료 같은 것들은 신빙성 있는 정확한 숫자로 많이 제공되면 될수록 좋다. 그 주장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러나 숫자와 통계에 약한(그렇게 키워진 ㅠㅠ) 나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실험 결과와 통계 자료들에 조금은 질렸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 읽고 바로 글을 쓰지 못했고 생각이 정리되지도 않았다. 작가의 글 쓰는 방식 때문인지 번역 문체 때문인지 단순하게 내 집중력이 떨어져서인지(전자책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친 듯) 알 수는 없다. 밑줄 그은 부분들을 중심으로 책 전체를 다시 훑어보았다. 처음의 느낌은 어디 가지 않았다. 시간차가 적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자나 남자나 다를 건 없다고, 지금까지의 과학이 100%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은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런 책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기를 바란다. 너무 많이 쏟아져서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이 쏟아져 나오는가 궁금증을 못 이겨 책을 집어드는 사람들이 더욱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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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6-25 0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읽고 있어요 ^^ 천천히 읽고 있는 와중에 흥미로운 논문을 읽었는데요, covid-19 바이러스감염에 여자가 남자보다 생물학적으로 강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더라고요. gender-specific behavior (예를 들어,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병원을 늦게 찾아서 병의 severity가 더심해질 가능성)을 감안하더라고, 생물학적 구조자체가 여자들이 면역체계에 강하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생물학적 부분을 잘 이해를 못해서 그쪽 연구하는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실제로 많은 연구들에 의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생물학적으로 월등이 뛰어난 점이 많다고 밝혀졌데요. (이 내용를 포함한 논문 좀 찾아봐야할 것 같아요..)

포인트는 누가 월등하냐, 열등하냐보다는, 생물학적 차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인것 같더라고요. 차이를 사회적으로는 차별로 귀결되는 반면에, 난티나무님이 언급하셨듯이 임상시험에서는 차이를 배제시키고 차이를 묵살하는 셈이겠죠. 변화가 일어나고 있긴 한것 같아요. 요즘은 쥐실험하는 연구에서는 반드시 여자 쥐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규정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다 남자쥐만 가지고 실험했다는 말인데...ㅠㅠ

더 많은 근거도 필요하지만,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고 그리고 지속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티나무 2021-06-25 14:37   좋아요 1 | URL
오오 그렇군요!! 여자가 생물학적으로 더 낫다니 이런 내용의 책도 얼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을 가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겠지만 정말 몸은 신비로운 거 같아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게 얼마나 더 많을까요? @@
마지막 문장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그리고 책 다 읽으시면 엄청 멋진 리뷰 쓰실 것 같은 예감이….^^

난티나무 2021-06-25 14:48   좋아요 1 | URL
댓글 계속 반복해서 읽었어요. 여러 가지 면에서 제게 위로?가 된달까, 이걸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 아아 뭐라 똑 부러지게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급 시무룩해졌어요. 😞

han22598 2021-06-29 12:23   좋아요 1 | URL
우리는 일단 더 많은 위로를 받아야만합니다. 더욱 치열하게 파헤쳐보고,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 제가..이런걸 제일 못하지만, 그래도 위로라는 전리품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에..일단 시도는 해보고싶어집니다. ㅎ

수이 2021-06-26 17: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위에 한님 말씀 듣고 보니 아니 내가 생물학적으로 더 낫다니...... 이런 자부심이 드는 건 어찌할 수가 없네요. 더 많은 근거와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고 지속되어야 한다는 한님 말씀도 좋고_ 한편 숫자와 통계에 약해서 주식의 ㅈ도 모르는 저 역시 우리는 결국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요. 논조에 딱 맞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ㅎㅎㅎ 난티나무 언니 마지막 문장도 좋아요. 더 많은 이들이 더 많이 더 넓게 읽는 것도 좋고_ 미친듯이 쏟아져나오고 연구되고 읽히고 그러면 좋겠어요.

난티나무 2021-06-26 19:08   좋아요 1 | URL
저도 비슷한 고민 합니다. 특히 돈,과 관련된....^^;;;;;
왜 우리는 숫자와 통계에 약할까요? 알면서 또 묻는다...ㅎㅎㅎㅎㅎ
진짜 막 미친 듯이 쏟아져나오면 좋겠다는.

공쟝쟝 2021-06-27 01:25   좋아요 1 | URL
안약해요 젠더화된 사회가 그렇게 만든거지. 뇌단련ㅅㅣ키십시다 ㅋㅋㅋ 뇌는 변하니까요.

난티나무 2021-06-27 01:49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안 약하다!!!

공쟝쟝 2021-06-27 01:52   좋아요 1 | URL
약하진 않지만 관심이 없을 순 있으니 ㅋㅋㅋㅋㅋ 원하면 관심 가져보시는 걸루 ㅋㅋㅋㅋ 안약해 ㅋㅋㅋ 그냥 안쓴 것일 뿐이야 ㅋㅋ

han22598 2021-06-29 12:28   좋아요 2 | URL
약하지 않은 훈련이 부족해서 약했졌다면 이제부터 채워넣으면 되는데, 사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함으로도 이미 충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머 그까이 숫자 통계 별거 아니니껭 ㅋㅋㅋㅋ 난티나무님, 비타님,공쟝쟝님이 보유하신 필력!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힘!!!!!!

난티나무 2021-06-29 21:51   좋아요 1 | URL
han22598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함‘ 이 말 너무 좋으네요.^^
 
[eBook]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 꿈이 너무 많은, 꿈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21
마르탱 파주 지음, 배형은 옮김 / 내인생의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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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번역서 제목이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이다. 원제목은 "Plus tard je serai moi : 나중에 나는 내가 될 거야"다. 나는 내가 된다. 얼마나 좋은 표현인가.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라니, 정말 구리다. 고민하는 주인공 아이(중학생)의 모습을 제목 문장 하나로 깔아뭉갠다. 철저한 어른의 시각. 이렇게밖에 안 됩니까? 


다음은 책소개의 줄거리이다. 

"셀레나는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도, 진로를 선택하고 싶지도 않은, 아니 진로를 선택할 수도 없는 평범한 10대다. 그저 친구 베란과 나누는 수다가 행복하고, 입맛을 돋우는 로크포르 치즈가 좋고 온종일 시험으로 자신을 지치게 만드는 교육부를 욕하고 겨우 한 곡 쳐낼 수 있는 자신의 기타 실력에 만족하는 그런 소녀 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부모님의 한 마디는 셀레나의 인생을 꼬아 놓기 시작한다. “네가 예술가가 되면 좋겠구나.” 미처 이루지 못한 자신들의 꿈을 딸에게 투사하기 시작한 부모님은 점점 극단적인 방법으로 셀레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한겨울의 집은 난방이 꺼지고, 용돈도 끊기고, 먹을 거라곤 감자 몇 톨이 전부인 삶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예술가는 원래 힘겹게 살아야 된다나 뭐라나. 이런 광기 어린 부모님은 어느새 스스로를 망치면서까지 셀레나를 자극하고, 셀레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하는데…." 

셀레나 부모가 사용하는 방법들은 극단적이기는 하다. 그리고 돈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그들이 조금은 부러웠다.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설고 어렵고 두려운 건 부모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그걸 잘 못해 늘 휘청거리고 휘둘리는 게 나다. 어리버리하다 정신을 차리니 벌써 아이들은 이만큼 커버렸고. 그렇지만 인생에 대한 고민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 아니던가. 나이와 상관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그러니 계속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할 것. 식상한 말과 눈빛을 던지지 말 것. 하찮고 보잘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이의 의지를 꺾지 말 것. 하. 이렇게 적으며 마음을 다잡지만 컴퓨터 게임에 매진하는 아이들의 등짝은 얼마나 스매싱하기 적당해 보이는지. 


Martin Page의 글은, 읽은 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얼마 안 되는 걸로 약간의 선입견을 만들어본다면, 여지가 많은 글? 뭔가... 엄청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다 쏟아낼 수가 없어서 자제하고 자제하다 그만 모자란 느낌? 아니면, 좀더 팍팍 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웅크린 느낌? 동화도 쓰고 소설도 쓰고 에세이도 쓰는 작가, 달랑 동화 하나 소설 하나 읽은 게 다지만^^;; 나는 그냥 당신의 에세이를 읽겠습니다. 사서 읽다 만 책이 보이네요. <Les annimaux ne sont pas comestibles : 왜 고기를 안 먹기로 한 거야?> 


열린 결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그렇다. 셀레나의 부모는 그냥 그런 모양새를 유지하면서 극단의 조치에 대한 설명도 없고 이후의 설명도 없다. 셀레나 캐릭터에 비중을 실었기 때문이겠지만 아쉽다. 조금 더 이야기를 진전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식의 결말을 이끌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친구 베란과 교장선생님, 그 특별한 캐릭터도 더 잘 살려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내가 될 거라는 그 멋진 말은 왜 이야기 속에는 없나? 희뿌옇고 아무것도 선명하지 않은 중학생의 생각, 무엇이 (꼭)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 그건 잘 알겠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나 하는 고민은 중학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하는, 해야 하는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꼭 장래 희망이 있어야 하나? 되고 싶은 게 있어야 하나? 이런 질문을 작가는 던지고 싶었던 거겠지. 어쩌면 일반적이지 않고 자유로운 부모의 모습 속에서도 어른이, 사회가, 강요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정말이지 나는, 꼭 내가 되고 싶다. 절실하게 내가 되고 싶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온전히 네가 되라고, 너는 너만 될 수 있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었다면, 지금쯤 나는 내가 될 수 있었을까.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는 대신 너는 네가 되어라, 해야 겠다. 내가 듣지 못한 말, 이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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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6-11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 너무 귀여워요! 이런 결론을 얻으셨음 별5개 아닌가요?ㅋㅋㅋ저 찜~♡

난티나무 2021-06-12 16:56   좋아요 1 | URL
음 책은 별 셋, 셋인 책을 읽고 별 다섯인 생각을 했으니 나는 별 다섯! ㅋㅋㅋㅋㅋㅋ
간만에 잘난 척 해봅니다. 크크크.
첨에 네 개는 주려고 했는데 말이죠, 글 쓰면서 생각하니 읽을 때보다 별로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를 깎았죠.ㅎㅎㅎ
사지 말고 빌려 읽으소서~^^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이연 지음 / 미술문화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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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생각한다. 나는 그림을 정말 좋아했을까. 내가 정말 좋아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좋아하는 것을 찾지도 못하고 그만 이 나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둥둥. 


중고등학교 시절에 어렴풋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단 한번 고등학교 어느 날 점심시간 연습장과 연필을 들고 나가 휴게매점 등나무를 그린 적이 있다. 단 한번.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을 시선을 무척이나 의식했고 그 이후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가난했고 집도 가난했다. 그림은 돈이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시작도 안 하고 지레 포기했다. 미술을 하면 아마 엄청 잘했을 텐데,라고만 말해왔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그림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열망이었을까. 


결혼을 하고 프랑스에 와서 첫아이를 낳고, 그림을 배웠다. 9개월동안 그렸지만 처음 배우는 그림을, 꼬물대는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뭘 얼마나 했겠나. 그럼에도 옆지기와 함께 미술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겁이 없었네. (지금 하라면 안 할 것 같다.) 사는 도시와 옆도시의 두 학교에서 면접을 보고 실기시험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그림은 말로 하는 거구나. 선을 하나 대충 그어놓았어도 그걸 말로 잘 표현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선을 그은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었다. 어학 1년 왕초보 실력으로는 당연히 잘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림이 절실하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학교를 가든 안 가든 계속 그리고 있었겠지. 15분여 주어진 포트폴리오 설명 시간에 면접관 앞에서 긴장한 나는 떠듬떠듬 짧은 설명을 단 5분만에 끝내버렸고 면접관들은 언어가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겁 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에는 이렇게 그려라 저렇게 그려라가 없다. 이러면 안 돼 저러면 안 돼도 없다. 앞부분을 읽으면서 이건 일종의 자기계발서와 같구나 생각했다. 그림 대신 인생을 넣어도 말이 되고 글을 넣어도 말이 되고 다른 무엇을 넣어도 말이 되었다. 작가도 같은 말을 한다. 다 비슷한 거구나. 자기계발서라 하면 일단 식상한 말들과 뻔한 안내와 같은 말 반복, 보나마나한 방법들 일색인 책이 많아서 시간이 아깝다 여길 때가 있다. 이 책에는 그런 말들이 적다. 물론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한 문장들은 아니다. 확실히 그건 아닌데, 동어반복도 많고 정말 쉽고 술술 읽히는 문장들인데, 그런데 책장을 넘기기가 아깝다. 아까워서 덮어놓고 아까워서 일부러 안 읽고, 작고 얇은 책을 아껴 읽었다. 이거 뭐 다 뻔한 소리 아니야,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될 지 모르겠다. 아니 내가 생각하는 만큼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본 만큼, 겪은 만큼, 생각한 만큼, 책 속의 글자들은 내게 다가온다. 그림 뿐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그 무엇이라도, 해야 겠다는 뽐뿌가 이는 책. 사실 앞부분 읽을 때 스케치북과 연필을 집어들고 싶은 욕망을 느꼈는데 몇 장 더 읽는 사이 그만 사그라들었다. 내 욕망의 크기는 딱 그만큼. 어쩌면 나의 욕망들도 폭발하기 전에 알아서 스르르 사그러들도록 사회화된 게 아닐까 무척 의심스러워지는 지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귀찮음이 모든 욕망을 이겨버리는 성격이던지.) 왜? 나는 미치도록 좋아하는 게 없을까? 이것도 조금 좋고 저것도 조금 좋고 그것도 조금 좋아서 조금씩 잘 하지만 뛰어나게 잘 하는 건 없을까? 해보고 싶은 게 없을까? 나는 왜 이럴까?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하지 않을까? 왜 계속 하지 않을까? 미리 포기하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틀릴까 봐 내뱉지 못한다. 당연히 내뱉지 않기 때문에 실력 또한 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분, 창피를 너무 기피하기만 하면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략) 난 당신이 겪은 창피는... 글쎄, 아직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잘할 만큼 연습하지도, 충분히 창피하지도 않았다. 창피가 반복되면 의외로 무뎌진다. 그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야 많이 했다고 할 수 있고, 그만큼 해야 그다음이 있다. 그림을 제외하고도 모든 분야에서의 성장이 전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만이 성숙해질 수 있다." (p.35) 


엄마, 말을 해야 늘지, 프랑스말로 하자. 작은넘이 나에게 한번씩 하는 말이다. 으 프랑스어 너무 어려워, 공부해야 하는데, 내가 이런 잡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한다. 뼈때리게 맞는 말인데 뼈를 맞는 느낌이 들어도 안 한다. 그게 문제다. 항상 느꼈다. 어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도 좋은 머리도 아닌, 용기라고. 부끄러움을 디딜 수 있는 용기. 뼈아픈 말을 이연 작가도 하네. 



"다만 여러분, 어떤 분야든 진지하게 시작한다면 전과 같지 않은 마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를테면 좋은 그림을 보고 순수하게 좋아할 수 없게 된다. 샘이 나고, 내 그림이 부끄러워지고, 막막해지는 기분마저 들어 마음이 복잡하다. 나는 좋아하는 작가가 있냐는 질문에 몇 년째 대답을 못 하고 있다. 한 사람으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편히 좋아하기 어렵다는 것이 더 크다. 이것은 열등감의 여러 증상 중 하나다." (p.51)


아아 그러면 나는 열등감 덩어리인가 보다.ㅠㅠ 



"그럼 무엇을 관찰해야 할까? 

당신이 가장 관심 있는 대상을 관찰하길 바란다. 그래야 흥미 있게 지속할 수 있다. 관찰도 결국 훈련이고 습관이기 때문에 반복해야 잘할 수 있다. 

(중략) 

결국 스스로를 아는 일은 인간을 아는 일에 가깝다. 타인의 마음이 궁금하다면 우선 자신을 먼저 살필 것을 권하고 싶다." (p.83) 


잘 하고 싶은 일, 바로 나를 아는 일. 어려워서 자꾸 헤매게 되는 일. 



"개성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충분히 각자의 개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당신이 평범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자기 자신에게 씌우지 않기를 바란다. 평범한 사람은 없다. 조금만 꼼꼼히 살펴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다. 그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치부하지 말고 가까이 들여다보자. 그러면 그 안에 각자의 색이 있다. 어떤 색들이 있을까?" (p. 139) 


평범,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편협하게 써왔나 돌아보게 되는 지점. 그 평범의 기준은 무엇이었나. ㅠㅠ 



"그렇다면 의심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뉴스, 정치, 교육, 사회 문제? 아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런 것들은 이제 막 사유를 시작한 개인에게는 먼 일이다. 우선 자기 자신부터 의심해 봐야 한다. 나조차도 내가 모르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지고, 다른 현상에서도 이면을 볼 수 있게 된다. 방법은 간단하다. 이면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당신을 알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은 평생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타인을 전부 헤아릴 수 없다. 잠시만요, 지속적인 사고가 결국에 대상을 정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음... 쉽게 이야기를 하자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하는 일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해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대상을 이해하려고 애쓰게 된다." (p.170~171) 


잠시만요.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맞죠? 철학책 아니죠? 책의 거의 대부분이 이렇다. 그러니 그림 그리는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수도. 그러나 나는 좋았다, 무척. 그렇군요. 그래서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알지만 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또 뼈때리네요. 



보자르 시험을 보았던 그 해 이후로 제대로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제대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좋아하지 않는다고 계속 착각하는 중인지도. 하지만 인생은 예측 불가능이라 했다. 혹시 아는가. 80이 되어서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50에 접어들며 읽었던 이연의 책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이 많은 도움과 위안이 되었다고, 아마도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면서?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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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6-09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 그리는 법이라기보다 자신을 들여다보기 같기도 하네요 자신도 다 알기 어렵고 남은 더 알기 어렵겠지요 하고 싶은 게 많고 그런 거 하는 사람 조금 부럽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게 없어요 귀찮아서 하기 싫기도 하고... 그나마 책 읽고 쓰기는 귀찮게 여기지 않고 합니다 이것도 무척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힘들어도 하는 걸 보면 싫어하지 않는다는 거겠지요

그림도 입으로 그린다니...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잘 설명하는 사람 있을지, 아주 없지는 않겠습니다 글도 말 잘 하는 사람이 잘 쓴다고도 하죠 바로는 아니더라도 난티나무 님도 그림 그릴지도 모르죠 어렸을 때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신 듯합니다 이것저것 조금만 좋아해도 괜찮아요


희선

난티나무 2021-06-09 05:21   좋아요 1 | URL
네,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사는 법? 이라고 할까요. 겁내지 않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법? 그러나 결국 어떻게 사느냐, 어떤 시각을 갖고 사느냐의 문제에 귀착하는 것 같아요.
저도 괜찮다고 생각은 합니다.ㅎㅎㅎ 꼭 뭔가 미친 듯이 좋아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돌아보니 그렇더라고요. 뭔가 열정이 빠진 듯한... 그런 느낌이요.^^;;; 이것저것 좋아하는 게 많으니 다 조금씩 하면서 살면 되겠죠?ㅎㅎ

han22598 2021-07-02 0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좋아합니다! 이연이라는 작가 유투브도 찾아서 들어봤는데, 말도 참 조곤조곤 잘하더라고요. 단단한 마음을 가진 명랑한 사람 느낌이 있더라고요. 사람의 느낌과 글이 매우 닮아 있어서...참 좋았어요 ^^

난티나무 2021-07-02 21:09   좋아요 0 | URL
유튜브도 봐야 하나요.ㅎㅎㅎ 닮아있다니 조금 궁금해지기도 해요.^^

초딩 2021-07-0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나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난티나무 2021-07-08 05:31   좋아요 0 | URL
어이쿠 감사합니다~^^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
다시 로크먼 지음, 정지호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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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 이야기를 꺼내며 불공평하다고 하면 으레 나오는 소리가 있다. "나는 돈을 벌잖아." (너는 돈을 안 벌잖아.) "나는 직장에 나가잖아." (너는 집에 있잖아.) "네가 나가서 돈을 벌어온다면 내가 살림을 도맡아 할게." (너는 어차피 지금 나가서 돈 못 벌잖아. 그러니 집에서 살림이나 해.)

이런 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집에서 하는 일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 만약 돈으로 환산이 된다면 얼마만큼일지, 환산금액을 들이민다 해도 식구들이 그걸 얼마나 피부에 와닿게 느낄지도 의문이다. 그보다는 매일 반복되는 머릿속의 기획들을 설명하고(언제까지?) 자잘한 일들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맡겨버리고(그걸 보아낼 자신은 있고?) 일정한 규칙을 정해 지키도록 만들고(어디까지 만들어야 하나?) 가끔은 파업도 선언하고(과연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을까) 그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다 보면 자꾸만 하찮은 일인 것 같은 그것들을 하찮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고,정,관,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나부터 변해야 한다.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말고! 약해지지 말고!


나는 돈 벌잖아, 이런 말은 남편들만 하는 말은 아니다. 여자들 사이에서도 한다. 직장 다니는 여자와 전업주부, 기묘함이 흐른다. 밖에 나가 돈을 버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사회의 모습이다. 오래 전 한국에 다니러 갔을 때 만난 친구가 밥값을 계산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는 돈 벌잖아." 너는 돈을 안 버니 돈을 버는 내가 네 몫까지 살게. 너 돈 없잖아. 식당에서도 까페에서도 나는 계산을 할 수 없었다. 네가 밥을 샀으니 커피는 내가 살게 하면 어김없이 "나는 돈 벌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돈 벌어, 하면 "나는 직장에 다니잖아."가 나왔다. 처음엔 괜찮았으나 들을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지금 생각하니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남편들의 말과 그 친구의 말이 비슷한 것이었네. 돈을 벌지 않는다는 '사실'에다가 너는 돈이 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 너는 당연히 나에게 의존해야 하는 사람, 나는 네게 베푸는 사람, 너는 당연히 나를 존중해야 하는 사람, 돈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 따라서 네가 하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하는 일보다 가치 없는 것,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 너는 그런 사람,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프레임.

그 친구가 악의는 없었다는 걸 잘 안다. 나를 위해주는 것이었다는 것도 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절친도 나를 만나면 절대 내가 밥에 돈을 쓰지 못하게 했다. 절친은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러니 '돈이 없을 나'를 완전 위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친구의 말에 기분 나쁨을 느꼈으며 절친에게도 가끔 약간의 서운함 같은 애매모호한 느낌을 받았다. 


최근 옆지기가 그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일을 하잖아." 내가 집에서 하는 일이 별거 없어 보인대도 엄청나게 수고로운 일이라는 걸 그동안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뜻밖의 말을 듣는다는 생각에 멍, 해졌다. 내가 집에서 하는 이 모든 일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회의에 빠진다. 심지어 옆지기는 프랑스 생활을 시작한 이래 몇 년간은 학생이었다가 최근 몇 년 전까지 프리랜서였다. 아주 가끔의 출장을 제외하면 24시간 동거. 웃음이 나는 걸 어쩌면 좋지. 이것저것 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 옆지기 입장에서는 엄청 기분나쁠 일이겠으나 나는 어이가 없다.

이런 생각의 차이를 어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 지 때로는 갑갑하기도 하다. 나도 또한 고정관념의 틀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하고 말이다. 그래서 살림 분담과 관련된 내용의 책을 읽을 때면 신경을 곤두세운다. 누가 좋은 방법 좀 가르쳐줘요 자세로. 많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동안 읽은 페미니즘&성차별 책들에서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방법이라기보다 방향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찬찬히 생각했다. 내 방향을 찾는 것은 내 몫, 방향을 따라가다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도 내 몫.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은 없다. 내가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나부터, 내가 갖고 있는 죄책감, 내가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좋은 엄마상, 이런 거 다 내다버려야 한다. 잘 안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럴 수밖에, 그렇게 살아왔는데.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반짝 불이 켜지는 것처럼 깨닫게 된 것은 없었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을 만들어나갈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아직 살짝 위축은 된다. 여전히 "나는 일하러 가잖아."에 대응하는 문장을 찾기 어려운 상태에서 내가 얼마나 강한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미셸 오바마도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ㅠㅠ) 

그러나, 그러니 읽자. 계속 읽자. 읽다 보면 방향은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방법도 떠오를 것이다. 그럴 것이다.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책의 표지에 왜 비닐봉지가 있는 것일까. 단순한 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신경과학자인 엘리엇에게 전화해 내가 조사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 당장 생각나는 불가피하거나 선천적인 요소가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만화 주인공처럼 귀에서 연기를 막 뿜어낼 듯이 말했다. "핵심만 얘기할게요. 인간 행동 중에서 타고난 건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행동은 의식적, 무의식적 경험으로 형성되죠. 성별 노동 분담이 ‘선천적‘이라는 주장은 권력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편리한 방편이에요." - P122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일은 인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자의 문제로 인식된다. 2018년 소설가 로런 그로프는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남자 작가가 이 질문을 받을 때까지 정중히 답변을 거절하겠다"고 답했다(네티즌들은 그로브의 거절에 대해 갈채를 쏟아냈다)." 2014년 할리우드의 여성Women in Hollywood 행사 연설에서 배우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제니퍼 가너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일을 하며 아이들을 어떻게 돌보느냐는 질문을 받지만, 공연 사업에 종사하는 당시 남편은 그런 질문을 한 번도 받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 P171

도이치는 연구 대상자 중 여성이 주양육자 역할을 맡는 불평등한 가족을 추려내고 이들 부부의 남편을 세 부류의 보조 양육자, 즉 도우미형, 나누미형, 태만형으로 나누었다. (중략) 전부 불평등한 가정을 연구하면서 도이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은 여자의 일정이 남자보다 자유롭다고 가정한다. 항상 엄마의 시간을 뺏는 게 더 수월하다. 엄마는 침해당하는 사람이다." - P185

사회과학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아빠들의 육아 참여율이 느리게 변화하는 현상을 두고 평등을 이룬 결과로 오인해서는 안 되며, 그보다는 "대체로 성공적인 남자의 저항"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 꼬집는다. 변화가 왜 그렇게 느린지 묻지 말고, 대신 왜 남자가 저항하는지 물어라. "한마디로 그렇게 해야 남자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콜트레인은 이렇게 썼다. 그 저항은 "남성적 이상을 뒷받침하는 성별 영역 분리를 강화하고, 여자보다 남자에게 특권을 주는 성 질서를 영속화한다." 파기되어가는 계약을 유지하려는 특권 계층의 철야 농성이고, 오늘날 벌어지는 비도덕적이고 냉혹한 일이다. 결혼 생활에서 이 저항이 성공하려면 남자들도 여자들의 노동을 할 능력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거부하면서 이를 철석같이 지켜나가야 한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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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5-29 23: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급노동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를 돌보는 것을 아내의 의무라 하고 가정은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 지불방식이 존재하질 않으니까요. 뉴스에서 주부의 노동에 대해 월급여로 어느정도인지 계산해 준적이 있는데 마침 제 짝꿍과 같이 봤더랬죠. 그 계산대로 해보니 당시 결혼기간으로 측정해 1억이 넘었어요ㅋㅋㅋㅋ거기서 일단 논리가 형성됐고 <보이지않는 여자들>에서 읽은 사례들 중 일부를 한번씩 입력시키고 다른 여성학책들의 적당한 포인트로 주입... 저도 공부가되고 짝꿍도 놀라면서 이것저것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남자는 가장일꺼란 전제하에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게되고 여성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덜받게되고요.
‘주부는 집에서 논다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전제인데(가사도우미 부름 얼만지 한번 알아보라고 해보세요ㅋ) 여성들도 그리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이래저래 자꾸 읽고 짝꿍 비롯 주변인들에게 제대로 된 인식을 끈기있게 퍼트리는것이 제 사명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힘들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반복에 장사 없더라구요. 세상은 못바꿔도 가까운 사람들 몇 명에겐 영향을 미칠 수 있잖아요.
난티나무님 파이팅~^^♡

난티나무 2021-05-29 23:40   좋아요 4 | URL
미미님~^^ 저도 일단은 그것이 목표예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 미치기! 같은 집에 사는 남자들은 확 변했으면 좋겠고요.ㅠㅠ 그런데 갈 길이 멉니다. 그래도 포기는 못 해요. 그러면 이제 제가 너무 힘들어요.ㅎㅎㅎ
미미님처럼 계속 반복! 주입! 퐈이팅!!! 페미니즘 책을 같이 읽는 부부가 되었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이기도 해요.ㅋ
댓글 감사합니다~~~~~^*^

희선 2021-05-30 0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집안이 엉망이 되고 먹을 것도 없을 텐데, 집안 일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겠습니다 예전보다 바뀌었다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듯하네요 집안 일을 자기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하면 많은 돈을 받을 텐데, 그런 걸 생각해야 하는데... 바깥에서 일하는 걸 더 대단하게 여기는군요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해도 조금이라도 말해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런 거 힘들 것 같지만...


희선

난티나무 2021-05-30 18:38   좋아요 2 | URL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저도 평생을 그런 줄 알고 살았으니까요. 알 수 없는 불만만 가득한 채로, 왜 그런지는 모른 채로. 여자인 저도 그런데 남자인 옆지기는 오죽할까요. 한번도 해보지 않았고 생각조차 할 필요 없었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생각해야 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누구라도 어려울 거예요. 그걸 아니까 늘 고민합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가끔 싸우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계속 싸우게 될 것 같습니다.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레이스 2021-05-30 0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동을 바라보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버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난티나무 2021-05-30 18:38   좋아요 1 | URL
옳습니다~!!!!!!!!!!!!

공쟝쟝 2021-05-31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가장 어려울 옆지기와의 어려운 조율 ㅠㅠ 진짜 많이 바뀌어야할텐데요.. ㅠㅠ 난티님 밥 잘 챙겨드시구 더 읽으세요! 분명히 어느지점에서 난티님만의 방법을 찾으실 거예요! 응원합니다!!

난티나무 2021-06-01 04:51   좋아요 1 | URL
매일 얼굴 보는 사람이 제일 어렵네요. 매일 봐서 어려운가 봐요. 하긴 가끔 만나는 부모나 동생도 만나고 좀 지나면 어려워지더라고요? 예전엔 몰랐는데 이젠 말 안 통하는 지점이 엄청 늘어남... 아 웃프다.ㅠㅠ
공쟝쟝님의 응원에 힘입어 밥도 열심히 잘 먹고 걷기도 좀 늘리고 으쌰으쌰 계속 더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