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Philos Feminism 4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임옥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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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된 경험이라는 정치적으로 폭발적인 영역을 매개로, 페미니스트들은 연결을 시도하고 운동에 가담한다. 복합성, 이질성,
특수한 입장성, 권력으로 충전된 차이들은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경험은 기호학이며 의미의 체현이다[드로레티스(de Lauretis), 1984]. 페미니스트들이 반드시 표명해야 하는 차이의 정치학은 경험의 정치학에 근거해야 하는데, 이런 경험의 정치학은 자기 자신의 끝없는 차이에 대해 심리학적이고 자유주의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특수성, 이질성, 연결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집단적인 것이다. 차이는 정치적이다. 말하자면 차이는 권력, 설명가능성, 희망에 관한 정치다. 경험은 차이와 마찬가지로, 모순적이고 필연적인 연결에 관한 것이다. - P198

여성학은 타자의 경험(결코 순수한 적이 없는)을 전유하는 것과 지역/지구적 역사에서 사실상 차이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실낱같은 친화성, 실낱같은 연대의 섬세한 구성 사이에 그어진 가느다란 선을 따라 협상해야 한다. 페미니즘 담론과 반식민주의 담론은 연결과 친화성을 구축하려는 바로 그 미묘하고 섬세한 노력에 집중한다. 그런 노력은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타인의 경험을 완결된 서사를 위한 자원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라 ‘우리‘는 빈번히 실패한다. 우리는 친화성의 구축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대신 대립관계의 구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그런 완결된 서사를 위해서 - P204

자기 자신과 타인을 자원으로 재생산하는 페미니스트, 반인종차별주의자, 반식민주의 담론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글쓰기는 정체성 대신에 친화성을 구축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리라는 희망으로도 가득 차 있다. - P205

에메체타에 대한 오구예미, 크리스천, 그리고 나의 독법은 전부 출판된 픽션에 근거한 것이다. 이 모든 독법은 예민하게 특수하고, 막강하게 집단적인 여성해방담론을 언명하려는 당대 투쟁의 일부다. 포함과 배제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혹은 국적과 같이 고정된 범주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픽션 읽기라고 일컬어지는 고도로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된 포함과 배제, 동일시와 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읽기 자체 속에서 생산된다. 모든 읽기는 잘못된 읽기이자, 다시 읽기이며, 편파적인 읽기이자 강제적 읽기이며 상상된 텍스트의 읽기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원래부터 궁극적으로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세계가 원래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는 이미 언제나 서로 경합하는 실천과 희망으로 뒤엉켜 있다. 여성 의식을 표시한 당대의 지도 위에서 대단히 특수하고 순수하지 못한 지역적/지구적, 개인 - P214

적/정치적인 우리의 위치에서 비롯된, 이들 각각의 읽기야말로교육적 실천이다. 그런 실천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여성 경험‘이라는 막강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권력으로 충전된 차이, 특수성, 친화성이라는 호명을 통해 작동한다. 만회 불가능한 하나라는 환상의 상실은 차이 속에 자리한다. - P225

루빈은 ‘여성의 길들이기‘를 검토했는데, 인간 문화 제도 속에서 남성에 의해 통제되는 친족의 교환 체계를 통해 인간 여자(female)는 여성의 사회적 생산을 위한 원자재가 된 점을 발견했다. 루빈은 섹스/젠더 체계를 생물학적 섹슈얼리티를 인간 행위의 산물로 변형시키는 사회관계 체계라고 정의했다. 그 결과 역사적으로 특수한 성적인 욕구가 충족되었다. 그런 다음 루빈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 변경할 수 있는 인간 행위의 산물로서 섹스/젠더 - P248

체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요구했다. 루빈은 성별 노동 분업과 욕망(특히 오이디푸스적으로 형성된)의 심리적 구축을, 정작 여성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권리를 남성에게 부여함으로써 인간존재를 만들어 내는 생산 체계의 토대라고 보았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상대의 일을 수행할 수 없는 곳에서 물질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남성이 여성을 교환하는 섹스/젠더 체계 속에서 욕망의 심층구조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성애는 의무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의무적 이성애는 여성 억압에 핵심적이다.

성적인 소유 체계가 여성 위에 군림하는 남성의 압도적 권리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재조직된다면(만약 여성의 교환이 없다면), 그래서 젠더가 없어진다면, 오이디푸스 드라마는 모두 유물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페미니즘은 친족체계의 혁명을 요구해야 한다. (루빈, 1975)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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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국에 가기만 하면 꼭 몸이 아픈데 그때도 그랬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고 콕 집어 말할 수도 없이 무기력증이나 어쩌면 우울증일 수도 있을 무심함이 찾아왔다. 쉽게 피곤하고 때로 머리도 지끈거렸다. 힘이 빠질 대로 빠져서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렵다고 느꼈던 듯하다. 급격한 체력 고갈로 한의원에 내 발로 찾아가 비싼 돈을 주고 한약을 지어 먹었다. (의사는 맥만 한번 짚어보고는 기운을 돋우는 약을 처방했다. 아픈 등의 부위에 정확하게 침을 놓았으니 어쩌면 그가 명의일지도 모르겠다고 나중에 생각하기는 했다.)


 나는 왜 시름시름 아팠던 걸까?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프랑스로 돌아와서야 의심 가는 일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한국에 도착한 날 공항버스를 코앞에서 놓치고 공항철도를 탔는데 어느 지점에 이르면서부터 열차 안에 가스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마스크를 쓴 얼굴의 코를 목도리로 틀어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잠시 냄새가 난다며 웅성거리다가 그마저도 조용해졌다. 견디지 못한 몇 명이 정차한 역에서 내리기도 했다. 내리면, 가스 냄새가 나지 않을까? 무거운 짐가방이 두 개나 있는 나는 내릴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렇게 한참을 가스 냄새를 맡아야 했다.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 가운데서 조금도 옆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에어컨 바람(환풍기 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면서 말이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지금은 정확한 지명도 가스의 종류도 잊었지만 그 지역을 지날 때 가스가 유출되곤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혹시, 12시간여 비행기에 몸을 실은 탓은? 


 나는 힘이 없고 쓰러질 것만 같은데 병원에 가도 원인을 찾지 못할 때, 아무도 미세먼지 때문에 아픈 거라고 말하지 않을 때, 창을 열었는데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역한 냄새가 날 때, 냄새도 없고 색도 없고 소리도 없는 무언가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을 때, 의심할 수 있는 모든 상상 가능한 것과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을 의심할 때.


 가끔 내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게 신기하다.


 오늘 물건을 하나 샀다. 여러모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모니터 선반이다. 포장을 끌러 이리저리 만지다가 한편에 두었다. 방금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는 자주 하지만 어느새 나는 저기 놓인 모니터 선반을 쳐다본다. 크게 숨을 들이쉰 이 방의 공기에는 저 새 물건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얼마나 섞여 있을까? 아까 방문을 열었을 때 코를 스치던 이상한 냄새, 낯선 그 냄새, 새로운 냄새. 아. 벌떡 일어나 물건을 치운다. 내린 덧문을 다시 올리고 창을 연다.(바깥공기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난방하느라 장작 때는 냄새가 쏟아져들어온다. 잠시 어느 쪽이 덜 유해한가 고민이 된다.) 방은 환기했지만 나는 냄새(알 수 없는 물질들)와 공존한다. 이미 한 몸이다. 이런 식이면 알 수 없게 아픈 일이 잦을 만하다. 비슷하게 떠오르는 일화들이 무수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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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논란이 되는 성과 젠더 격차들은 별도로 하고, 일상적인 사회경제적·지리적 환경정의 지도들 안에서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3장에서 논의한 것처럼 독성물질 폐기장, 공장, 그리고 다른 오염원들은 매우 자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또는 다른 유색인종의 거주지 가까이에 자리 잡는다는 점에서 미국에서 독성물질 노출은 인종과 아주 직접적으로 연관되고, 다음으로 계급과 연관된다. 화학물질 손상chemical injury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듯 수많은 사람들이 유독한 작업장에서 질병을 얻는데, 공장노동자와 농업노동자처럼 화학물질들과 아주 가까이에서 일하는 이들은 가장 심각한 위험에 직면한다. 이는 결국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이 계급 이슈라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리고 의사, 특히 마취과 의사와 같은 전문직들 또한 화학물질복합과민증에 대한 더욱 심각한 위험에 처한다. 피터 밴 윅이 울리히벡을 인용하며 설명하듯, "생태 위협은 종종 그리고 대부분 기존의 계급과 사유재산, 부의 분배와 같은 분들에 들어맞지 않는 사회적 지도를 제작한다. 따라서 위협은 이미 만들어진 사회적 분할들을 절단한다. 위험에 처한 이들은 새롭게 친밀감을 형성하고, 새로운 운동 단체를 만든다".  " (286)


어느 누군가가 가스 스토브나 소파, 샤워 커튼 같은 겉으로 보기에 무해하고 실용적인 물건들에 취약하거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자신의 주거 공간을 다시 만드는 과정은 인간 몸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상식적인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든다. 갑자기 이 사물들은 더 이상 화학적으로 불활성적인 물질이 아니라 특정 증상들을 유발시키면서 몸과 상호작용한다. 예를 들면 플라스틱판으로 만들어진 가구는 꾸준히 기침, 천식, 발작, 피부 발진, 피로,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 그리고 암을 유발할 수 있는 포름알데히드를 방출(또는 가스 배출)할 것이다. (이는 맨해튼을 집어삼킨 소파처럼 우호적인 어떤 무엇이 살인마로 돌변하는 B급 공포영화를 떠오르게 하기에, 아마도 망상paranoid 또는 코미디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신체의 경계선들을 째는 것 — 외과수술, 주사제 투입, 이식수술, 그리고 여타 과정들—이 표준적인 의료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근대 의학 모델은 인간 몸을 환경과 서로 이웃한다거나 또는 카펫과 소파처럼 겉보기엔 불활성적인 물건들에 취약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환경질병을 가진 이들은 자기 몸이 물질세계와 인접해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따라서 어떤 것도 ‘외부적‘이라거나 변함없이 ‘외부에’ 머문다고 확신할 수 없다. 

......

이와 반대로 『영양과 환경 의학 연구에 출판된 46쪽 분량의 보고서는 생체이물 화학물질에 사람들이 노출되는 것을 줄이기 위한 (영국) 정부 권고안 목록으로 끝맺는다. 이 보고서는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는다. 대신 "개인은 최근에 화학물질 노출을 피하는 선택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을 줄이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사회적으로 고립된다"고 지적한다. 이 보고서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정치적/물질적 세계라는 그물망에 걸린 투과 가능한 존재들이다. 유사하게, 재니스 스트럽 위텐버그의 도발적인 제목을 단 『반역하는 몸 : 환경질병 또는 만성피로증후군으로부터 당신의 생명을 구하라』는 "당신이 세계를 당신의 몸속으로 옮겨올 때, 환경질병과 만성피로증후군은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보여 주는 상징들이다"라고 주장한다. (환경질병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몸속으로 옮겨 오는 것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이 '상징들'은 아마도 좀 더 정확하게 물질적 환유라는 용어로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환들을 횡단-신체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적 행동주의와 개인적인 치유가 공생하는 자습서를 촉진시킨다. 스트럽 위텐버그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치유하고 배우며 녹색소비자운동에 참여하는 '행동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환경 친화적인 정치인들에게 투표하고, 의회에 편지를 쓰는 등의 '행동주의'를 수행하라고 조언한다. " (290~292)

" 화학물질에 예민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단순히 ‘불평하는‘ 여성들이거나 또는 여성들로 인식되는 한, 생물학적 효과와 심리적 효과 모두를 지닌 물질적 질병으로서 화학물질복합과민증에 대한 다소 거만한 무시는 여성혐오의 색조를 띤다. 이 경우 사회구성주의 또는 심리학 모델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의 생물학을 무시하는 것은 진보적이지 않다. 엘리자베스 윌슨을 따라서 어떻게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설명방식과 심층적이고 행복하게 공조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는 것이 좀 더 이치에 맞다. "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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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마룻바닥의 틈들을 쳐다보면서, 그 안의 꺼낼 수 없는 먼지들을 쳐다보면서. 내 몸에서 떨어지는 온갖 부스러기들이 저 마룻바닥 틈에도 쌓여가겠지.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먹고살겠지. 침대에 떨어진 각질들도 나와 공생하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겠지. 피부에도 어딘가에는 벌레들이 살고 있겠지.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고 집어삼키는 벌레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자는 사이에도 그렇다고. 벌레들은 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머리카락이 되고, 내 몸은 벌레들이 먹고. 며칠 동안 방바닥에 펼친 채 방치한 요가 매트 위에서 연보라색 바탕에 점점이 흩어진 불규칙한 흰 거스러미들을 보았다. 약간 거무스름한 것도, 연한 갈색을 띠는 것도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흰색이 많았다. 전부 내 몸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대부분이 그러할 텐데 매트 위에서 고작 기지개 펴는 정도의 동작 한두 개를 하루에 한두 번 할 뿐인 나로서는 놀랄 만한 양이었다. (물론 매일 청소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음. 게다가 옷도 입고 있었는데. 아, 옷 때문에 더 많이 피부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겠?)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대표주자가 머리카락이다. 잘 썩지도 않는 머리카락들, 태우면 고약한 냄새가 나는 머리카락들. 머리카락을 말리고 난 욕실 바닥을 청소기로 좀 밀라 했더니 아이가 나에게 탈모냐고 농을 건넬 정도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들. 하루 동안 세상에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모두 모으면 얼마나 될까? 하루 동안 세상의 인간이 깎은 손발톱들은 얼마나 될까? 하루 동안 세상의 인간이 눈 오줌은? 똥은? 흘린 눈물은? 우리의 분비물들은 어째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걸까? 내 발밑, 그리고 네 발아래, 드러나지 않지만 거대하게 존재하는 그곳의 분비물들, 변화하면서 흘러가면서 고여 있는. 오늘 아침 ‘장대’하게 싸지른 한때 내 몸이었던 그것(?)들은 지금쯤 어디에 이르렀을까? 축산업이 탄소 배출 원인으로 지목될 때 우리는 인간의 탄소 배출을 생각하지 않는다. 소와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소는 바다에 핵 오염수를 방류하지 않는다. 플라스틱을 만들고 버리지도 않는다. 나도 오염수를 방류하거나 플라스틱을 만들지는 않지만, 않지만... 모르긴 몰라도 소보다 내가 배출하는(나로 인한) 탄소의 양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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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으로부터 결코 단절될 수 없는 신체성에 거주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해 과학소설로 도약할 필요는 없다. 보니 스페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기체는 환경들 또는 다른 유기체들로부터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경들과 연루되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둘러싸이고, 상호작용 속에 기입된다(그러한 의미에서 환경과 인접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화기 통로와 호흡기 통로, 피부 모공, 또는 원형질 망 조직을 통해서든, 또는 수많은 유형의 세포들의 세포질을 통해서든 내부에서부터 환경과 인접한다. 인간 몸은 수많은 유기체들의 집합체이고, 대장의 대장균, 피부에 있는 미생물과 같은 유기체들 중 대부분은 건강한 생활을 위해 필수적이다. [......] 자아 등등에 대한 매우 다른 심리학은 우리의 내부와 외부 접촉면들을 통해,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내뿜는 어떤 무엇(우리의 날숨, 몸 머리 복사작용, 쓰레기, 기타 등등)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향해 열려 있고 환경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378~379p)


"... 배러드는 포스트휴먼 윤리의 일부로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다. 내부도,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내부로부터 시작하는 내부-작용하기 그리고 세계의 생성 속에서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내부-작용하기만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 (3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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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며칠 전에 다시 펼친 <페미니즘의 도전>인데 어떻게 머리말들에 밑줄이 없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일부러 밑줄을 긋지 않았다. 아마 그때만 해도 책에 밑줄 긋는 게 익숙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읽을 때 밑줄 없이 깨끗한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는 머리말을 안 읽었었나? 1부부터는 밑줄도 있고 새로 붙인 스티커도 있으니 그랬을 확률이 높다. 1부를 다 읽었지만, 이웃 친구 천재님이 올리신 글을 보고 필받아서 나도 꼭꼭 씹어 읽어야지! 다짐하며 맨 첫 페이지부터 다시. 늘 그렇지만 정희진 선생님의 글은 문장 하나를 그냥 넘어가기 힘들 정도로 맞는 말, 뼈 때리는 말 대잔치다. 밑줄 긋고 천천히, 밑줄 긋고 생각, 밑줄 긋고... 가슴 아프고.



⎾ 나 역시 능력, 건강, 성실성, 관계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는 느낌이 한이 없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감정적 고문은 겸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지친 채찍질이다. 당연히 행복감, 만족감, 감사하는 마음을 잃기 쉽다. 여성들은 '피로 사회'뿐 아니라 '피로 가정', '피로 자아', '피로 무의식', '피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여성의 피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열악한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사회에 고마운 마음을 지니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돌파하는 데 여성주의 인식만큼이나 감사하는 마음이 도움이 된다. 내 처지가 어떻든 간에, '지금, 여기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양보의 결과다. 그것이 세상의 원리다. 그래도 나를 조금은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방해는 안 하는 사람들에게, 단 한 사람일지(라)도 나를 격려하는 사람에게, 그래도 변화한 '성 평등'의 현실 앞에, 이 체제에서도 세상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아가는 수많은 성실한 사람들에게, 육체적·심리적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지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감사는 단지 예절이나 긍정적 태도,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비판 의식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감사, 겸손한 마음에서 출발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 ⏌


(18~19, 개정증보판 머리말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얼마 전에 작은넘이 무슨 얘기 끝에 물었었다. 엄마는 언제 행복해? 행복했던 적이 언제야? 내가 언제 행복했던가 하는 생각보다 <행복의 약속>이 먼저 떠올랐다. 글 쓰면서 반성한다. 그때 내 대답은 '행복? 그런 건 없어.'... (또 반성한다. 어제도 이런 식으로 대답한 것 같다. 나는 바보다. 이건 자기 비하가 아니다. 가끔 나는 그렇다. 어쩌면 자주 그럴지도 모른다. 설령 그 순간 내가 한 생각이 옳다고 해도, 앞뒤 다 잘라먹고 단정적으로 대답하는 습관, 내가 옳으니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고집, 그러기 위해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자세. 현명하지 못해...) 뱉어놓고 너무 했다 싶어서, 행복이 뭔데? 뭐라고 생각해? 역질문을 했다.실제로 '행복'이라는 단어와는 안 친하다. 와 나 정말 지금 행복해, 하는 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행복이 별 건 아니잖아, 그냥 그때 기분이 좋고 즐거우면 행복한 거지. 작은넘은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고, 엄마도 있었을 거 아니냐고. 그래, 있었지. 있고말고.

 '자신에 대한 감정적 고문'. 이 구절을 읽는데, 분명 처음에도 읽었을 텐데, 두세 번째인 지금에서야 아프다. 내가 힘들었던 건 대부분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자신에 대한 감정적 고문.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이것 때문일 수 있겠구나. 감사하는 마음은 또 어떻고. '피로 사회, 피로 가정, 피로 자아, 피로 무의식, 피로 관계'... 이 중 내가 가장 잘(?) 하는 건 '피로 무의식' 상태에 머무르는 일 같다. 거기에서 모든 다른 피로가 만들어진다. 잠을 자면서도 피로한 상태. 항상 머릿속 한켠에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처럼 쌓아두고 틈날 때마다 꺼내 보는 걱정들.

 고맙다, 감사하다, 미안하다, 잘 했다, 훌륭하다, 멋지다, 최고다... 입 밖으로 잘 꺼내지 못하는 말들이다. 남에게는 곧잘 하는 이런 말들을 식구들에게는 거의 하지 못한다. 이건 뭐 나만 그런 건 아닌 듯? 다른 식구들도 그런 듯? (변명.)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색한 사람들. 그리고 내게도 하지 못하는 말들. 세상에서 가장 나에게 인색한 사람은 바로 나다. 선생님, 미워요. 흑흑. (갑자기?) '미안하다, 사랑한다...' 가 떠올라서 썼다가 내가 정말 하기 어려워하는 말이 바로 '사랑한다'라는 것도 떠올라버렸다. ㅜㅜ

 이러느라 엊그제 읽기 시작한 머리말을(머리말도 여러 개야) 아직도 읽고 있다고 한다.














(분홍책인데 상품 보기에 분홍은 전자책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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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11-16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홍책 책 개정한 게 파란색/빨간색 책이에요. 그건 아직 전자책이 안 나왔나 봅니다 ^^

난티나무 2023-11-16 17:29   좋아요 1 | URL
네 개정판이 있어서 구판 종이책이 상품에 없나 봐요. 종이책 넣고 싶따!!! 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3-11-16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빨간색 표지로 가지고 있어요.
왠지 분홍이 더 끌리네요.
천재님 표지 색깔별로 읽었단 페이퍼(맞죠?) 읽고 잠깐 충격 먹고 심호흡 했던 시간이 떠오르네요.
빨간 표지 한 권이라도 올 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하지 않나? 그런 반성을 여기서 또 하고 가네요.
암튼 난티 님 파이팅!!^^

난티나무 2023-11-16 17:31   좋아요 1 | URL
전 빨강이 끌립니다. ㅋㅋㅋ 같은 책 또 사는 일이 나중에 일어날까요? ㅎㅎㅎㅎ
천재님 페이퍼 저는 충격은 아니지만 부러웠습니다… @@
책나무님도 어여 읽으세요~~~~^^
 
















 번역에 대해 잘 모른다. 어렵다는 건 안다. 다른 언어를 한글로 옮길 때 원문의 뉘앙스를 그대로 살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번역의 과정이 있어서 세계의 책들을 접할 수 있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사상 입문>을 읽었다. 초보자를 상정한 입문서이기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슬슬 읽기 나쁘지 않았다. 맨 뒤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 꽤 길길래 그것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옮긴이의 말' 때문에 이 책이 싫어졌다. '월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책의 내용이 공감&비판할만하다면 비평을 쓰면 되고 궁금한 것이 생겼으면 저자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그게 왜 빠졌을까(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에 대해 번역자가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 부분은 왜 빠졌는지 궁금했다, 정도면 되지 않나? 저자가 이러저러한 철학자를 빠뜨렸으니 내가 설명하겠다, 이런저런 책을 보아라, 저자의 이 주장은 수정했으면 좋겠다, 더 알고 싶으면 내 블로그를 참고하시라? 이렇게 쓴 '옮긴이의 말'은 처음 읽었다. 저자는 '생초보' 입문자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가려고 애를 썼는데(그 방식이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옮긴이는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대신 설명하느라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출판사&편집자는 이 '옮긴이의 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하다. 지바 마사야는 한글판 책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알까?

어쩌면 내가 좁은 시각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옮긴이의 말'은 어떠해야 하는가? 에 고정 관념이 있을 수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앞으로 이 사람이 번역한 책은 좀 거르고 싶은 삐딱한 마음이... 책 잘 읽고 삐딱하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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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1-14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가지고 있고 읽기 전이지만, 옮긴이의 말 너무 싫은데요? 간혹 옮긴이들이 말씀하신대로 지나치게 책에 개입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책도 그런가보네요 ㅠㅠ

난티나무 2023-11-14 17:29   좋아요 0 | URL
음 읽기 전이신데 제가 ㅋㅋㅋ 안좋은 인상을 팍팍! 다락방님의 독후 평을 기대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