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라 하딩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 여성들의 삶에서 생각하기>

제 5장에서의 주장을 다시 요약하자면, 성별 위계구조화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 지배집단 내 남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거나 별 두드러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가설들과 실천들을 설명이 필요한 낯선 것으로 만드는 과학적 관찰과 직관을 가져옴으로써, 연구결과의 객관성을 증대시킨다. 여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지금까지 친숙했던 것을 낯설게 만드는데, 낯설음은 모든 과학적 탐구의 시작이다. 18)
왜 이 성별의 차이가 과학적 자원이 되는가? 성별의 차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과 사회관계들에 대해 평가 절하되고 방치된 삶들의 관점에서 질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화가 그 문화제도들에 편안함을 느끼고 또한 시민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가진 "원주민들"을 사회화하는 방식에서 배제된, "이방인들의 삶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은 사회체제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하며 또 별 관심이 없는, 체계적으로 억압과 착취와, 지배를 받은 자들의 삶의 관점에서 연구를 시작한다. 그것은 남성들의 삶에 대한 남성들의 해석이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는, 자연과 사회세계에 대한 "승자의 이야기들"과는 다른, 성별간의 전투의 "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관점에서 연구를 시작한다. 그것은 생활세계에서 생각을 시작하는데, 생활세계는 여성들에게 우선적으로 책임이 부여되는 곳이며 지배집단의 활동들의 결과들 - 그 활동 - P228

18) 제 5장과 제 7장에서 강조했듯이, 여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생각을 시작하는 것은 남성들과 여성들 모두 배워야 할 어떤 것이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여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 P228

들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결과들 - 이 드러나는 곳이다. 그것은 문화의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이중성들을 - 특히 자연과 문화 사이의 간극을 - 중간에서 조정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의 삶에서 생각을 시작한다. 그것은 단순히 이방인들이나 외부인들이 아닌,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좀더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내부에 있는 외부인들"의 삶에서 연구를 시작한다. 그것은 타자의 삶의 관점에서 생각을 시작함으로써, 타자로 하여금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은 누구라도 "익명으로" 응시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한 주체를 향해 "뻔뻔하게" 맞응시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모든 지식에의 주장들을 해석하는 데 그 핵심을 부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사람들의 삶에서 생각을 시작한다. 그것은 역사의 현 시점에서 특히 광범위하게 노출된 사회모순들을 보여주는 삶의 관점에서 생각을 시작한다. 그리고 필시 여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과 사회관계들 내부의 규칙성들과 그 밑에 놓여있는 인과적 성향들을 특히 잘 드러내주는 것임을 보여주는, 더 많은 다른 방식들이 있다.
제 3부에서 더 분석하겠지만, 어떤 점에서 이 세상에 "여성들" 자체나 "남성들" 자체는 없으며 - "젠더"란 없다 - 단지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문화, 종교 집단 등이 자원과 권력에 접근하기 위해 서로 투쟁을 벌이는, 그런 구체적인 역사적 투쟁들을 통해 구성된 여성들, 남성들, 젠더가 있을 뿐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입장론적 지식론들 자체가, 그 점을 명료하게 표현했든 안했든, 성별과 계급 위계에만 관심 있는 이론가들이 아니라(계급분석에서 출발한 입장론을 생각해보라), 다른 "타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는 이론가들에 의해 전개됐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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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1-06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 수업 목록에서 본 책이네요. 난티나무님 밑줄로 살짝 맛보기 :)

난티나무 2026-01-06 13:52   좋아요 1 | URL
수업 안 들으면서 책만 모조리 구비한 자 ㅋㅋㅋ 접니다. ㅎㅎㅎ

건수하 2026-01-06 14:33   좋아요 1 | URL
아니 저거 절판책 아닙니까? 👍👍

난티나무 2026-01-06 14:47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제본이에요. 친구 찬스!!!!!!!

하이드 2026-01-06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시작했는데, 첫페이지부터 ‘입장론‘이 뭔데? 띠용 되어서 입장론부터 대충 훑고 읽고 있습니다. ㅎㅎ

난티나무 2026-01-06 14:54   좋아요 1 | URL
저는 대충 맥락적 읽기 중 ㅋㅋㅋ 처음부터 읽어야 하는데 서문 후 일단 6장 먼저 보고 있어요. 제본이라 책 아래로 엄청나게 종이 자잘부스러기들이 쏟아지고 있어요 ㅎ 하이드님 책 부럽
 

텍스트에서 자신의 한계와 이론적 결함에 대해 정직한 것이 그런 결함들에 대한 세간의 비평을 선제적으로 방어하는 것일까? 동시대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의 맥락에서, 이런 종류의 자기를 낮추는 정직은 수사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효과적이거나 전복적일까? 아니면 그것은 여성에 대한 상투적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것일까?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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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챕터 [나이 듦에 관한 이중 잣대] (1972년)


영화 <서브스턴스>가 머리를 스친다. 

항상 문제는 주로 여성들만 깨닫는다는 것이지. 


아령 들러 간다. 여자는 근육이지. 



(전자책이라 페이지 표시가 종이책과 다를 수 있음.)





노년은 아무리 의연하게 견딘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역경이다. 아무리 용기 있게 항해를 계속하겠다고 고집해도 노년은 조난 사고와 같다. 그러나 노년의 이 객관적이고 성스러운 고통은 나이 듦이 주는 주관적이고 계속적인 고통과는 종류가 다르다. 노년은 남성과 여성 모두가 비슷하게 겪는 진짜 시련이다. 반면 나이 듦은 주로 상상 속의 시련(정신적 병폐이자 사회 병리)이며, 본질적 특성상 남성보다 여성이 피해를 훨씬 많이 본다. 나이 듦(실제로 늙기 이전에 찾아오는 모든 것)을 그렇게 불쾌하게, 심지어 수치스러워하며 경험하는 건 특히 여성이다. - P16

사람들은 상업화된 행복과 개인적 안녕의 이미지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진짜 기쁨을 주는지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게 놔둔다. - P17

완경기(수명이 늘어나면서 갈수록 늦게 찾아오고 있다)에 겪는 혹독한 상실감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 노화로 인한 우울감이다. 이 우울감은 여성의 삶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에서 비롯된 게 아닐 수 있다. 이 우울감은 여성의 상상력이 자꾸 ‘억제되는‘ 상태이며, 이 상태를 명하는 것은 바로 사회다. 즉, 이 우울감은 사회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자유롭게 상상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 P25

일반적인 몸의 개발은 여성의 과제가 아니다. 여성은 몸이 단단하고 굵고 뚱뚱해지지 않게 관리한다. 즉 몸을 보존한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정치적으로 더 보수적인 것도 여성이 자기 몸과 매우 보수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38

여성에게 가장 가혹한 태도 중 하나는 나이 드는 여성의 육체에 본능적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우리 문화 깊숙이 자리 잡은 여성을 향한 근본적 두려움, 암여우와 여장부, 요부, 마녀 같은 신화 속 인물로 드러나는 여성 악마론을 보여준다. 수 세기 동안 지속되며 서구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학살 중 하나의 원인이 된 마녀 공포증은 이러한 공포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시사한다. 노인 여성에게 느끼는 역겨움은 우리 문화에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미적∙성적 감정 중 하나다. 여성도 남성만큼이나 이런 역겨움을 느낀다. (억압자는 대체로 피억압자 ‘고유의‘ 미적 기준을 부정한다. 피억압자는 결국 자신이 추하다고 믿는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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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9-10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자는 근육이죠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복근을 위해 아령을 ㅋㅋㅋㅋㅋㅋㅋㅋ 들고 싶지만 현실은 2달째 헬스장 자체 파업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 너무 예뻐요. 손택은 진짜 사진만 봐도 힐링이 됩니다!!

난티나무 2025-09-10 15:14   좋아요 1 | URL
자체 파업 저도 오래 됐는데 ㅋㅋ 책 읽다 보니 심술이 나서 굳이 아령을 찾아 들어야 겠다 싶었어요. 무거운 거는 옆에 없어서 달랑 가벼운 거 하나 들고 시늉만 했습니다.ㅋㅋㅋ 복근 그게 머야요…@@ 제 배는 몇 달 전부터 부풀어올라 들어갈 생각 없어 보여요… 😞 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 손택이 째려보는 건가…ㅎㅎㅎ 반려지방이 생겼다네 유후! 😅
 

오늘 밑줄

이런 상황은 우리의 노력으로 ‘교정할 수 없다. 이런 취약성의 근원은 ‘나‘의 형성에 앞서 있기 때문에 그 근원을 발견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의존해 벌거숭이 상태로 놓이게 되는 이런 존재의 조건은 그에 대해 똑 부러지게 논쟁을 벌일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세계, 의존적인 세계에 접어들었고, 어느 정도는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자율성의 관점을 가져와 이런 상황에 대해 반박하려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위험하지는 않아도 바보스러울 것이다. 물론 몇몇 사람에게는 이런 원초적 장면primary scene이 유아기 삶을 후원하고 성장시키는 특별하고 사랑스럽고 수용적이며 따뜻한 관계 조직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유 - P44

기나 폭력 혹은 기아의 장면이다. 이들은 무의미, 야만성, 부양 불능에 양도된 신체다. 하지만 이 장면의 가치가 어떠하든, 유아가 필연적 의존성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고 이 필연적 의존성을 우리는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몸은 여전히 어디론가 양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의 억압을 이해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바로 이런 근원적 취약성primary vulnerability의 상황, 우리가 타인과의 접촉에 양도되는 상황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타인도 없고 우리 삶을 지원해줄 그 무엇도 없다고 해도, 아니 그런 것들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억압에 대항하려면 각각의 삶이 차별적인 지원을 받고 유지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인간의 신체적 취약성이 전 세계로 분포되는 방식이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삶은 엄청난 보호를 받을 것이고, 그 삶의 고결성에 대한 주장을 저버리는 것만으로 전쟁이라는 무력을 작동시킬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삶은 정신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그런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슬퍼할 만‘하다는 자격조차 갖지 못할 것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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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나는 욕망과 사랑을 별개의 글 두 편에서 다룬다. 표면적으로 그것들을 분리하는 것이 말이 되긴 하지만, 그 분리는 교수법적인 것일 뿐, 사랑과 욕망을 잘 분리할 수는 없다. 욕망은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그 대상의 구체성과 대상에 투사된 욕구와 약속 사이의 간극으로 생성되는 뜬구름 같은 가능성에 대한 기술記述이다. 이 간극은 더 복잡한 문제들을 낳는다. 욕망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으로서 우리를 찾아오지만, 우리가 자신의 정동과 조우하도록 유도해 마치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는 우리가 선택한 대상들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착 가치를 투사해 우리 세계를 떠받치는 대상으로 변환한 사물이나 장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대상들에서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고, 그렇기에 신기루이며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닻이다. 욕망의 대상을 향해 우리가 말을 거는 스타일이 바로 우리가 자아와 다시 조우하게 되는 드라마에 형태를 부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랑은 욕망을 상호 교환하는 포옹의 꿈이다. 즉, 사랑은 [자아를] 고립시키기보다는 확장된 자아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사랑의 규범적 양태는 ‘둘은 곧 하나’라는 커플 형태의 친밀함이다(부모와 자식 또한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이상화되지만, 그 사랑의 지속에 상호성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것은 커플의 성취를 언제나 무색하게 한다). 커플 관계의 이상화된 이미지 안에서 욕망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또 욕망이 지속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이 이미지에도 명암은 있다. 사랑의 관계가 사실인지 아니면 실은 다른 무엇인지, 지나가는 변덕인지 아니면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 (스스로에게 혹은 다른 이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인지, 과연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은 감정에 대한 지식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질문이지만, 또한 어떻게 규범이 특정한 환상들을 이용해 삶에 대한 애착을 생산해 내는지에 대한 정치적 질문이기도 하다. 사랑의 표현들이 그토록 관습적이고, 결혼, 가족 등의 제도, 재산 관계, 상투 어구와 플롯에 그토록 매여 있다는 건 사랑과 관련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주체성에 관한 질문이면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101~102)


3장 [욕망] 로런 벌렌트, 윤조원 옮김. 

첫 페이지부터 빠져버림. 그나저나 <잔인한 낙관>은 왤케 어려웠는지?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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