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챕터 [나이 듦에 관한 이중 잣대] (1972년)


영화 <서브스턴스>가 머리를 스친다. 

항상 문제는 주로 여성들만 깨닫는다는 것이지. 


아령 들러 간다. 여자는 근육이지. 



(전자책이라 페이지 표시가 종이책과 다를 수 있음.)





노년은 아무리 의연하게 견딘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역경이다. 아무리 용기 있게 항해를 계속하겠다고 고집해도 노년은 조난 사고와 같다. 그러나 노년의 이 객관적이고 성스러운 고통은 나이 듦이 주는 주관적이고 계속적인 고통과는 종류가 다르다. 노년은 남성과 여성 모두가 비슷하게 겪는 진짜 시련이다. 반면 나이 듦은 주로 상상 속의 시련(정신적 병폐이자 사회 병리)이며, 본질적 특성상 남성보다 여성이 피해를 훨씬 많이 본다. 나이 듦(실제로 늙기 이전에 찾아오는 모든 것)을 그렇게 불쾌하게, 심지어 수치스러워하며 경험하는 건 특히 여성이다. - P16

사람들은 상업화된 행복과 개인적 안녕의 이미지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진짜 기쁨을 주는지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게 놔둔다. - P17

완경기(수명이 늘어나면서 갈수록 늦게 찾아오고 있다)에 겪는 혹독한 상실감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 노화로 인한 우울감이다. 이 우울감은 여성의 삶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에서 비롯된 게 아닐 수 있다. 이 우울감은 여성의 상상력이 자꾸 ‘억제되는‘ 상태이며, 이 상태를 명하는 것은 바로 사회다. 즉, 이 우울감은 사회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자유롭게 상상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 P25

일반적인 몸의 개발은 여성의 과제가 아니다. 여성은 몸이 단단하고 굵고 뚱뚱해지지 않게 관리한다. 즉 몸을 보존한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정치적으로 더 보수적인 것도 여성이 자기 몸과 매우 보수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38

여성에게 가장 가혹한 태도 중 하나는 나이 드는 여성의 육체에 본능적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우리 문화 깊숙이 자리 잡은 여성을 향한 근본적 두려움, 암여우와 여장부, 요부, 마녀 같은 신화 속 인물로 드러나는 여성 악마론을 보여준다. 수 세기 동안 지속되며 서구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학살 중 하나의 원인이 된 마녀 공포증은 이러한 공포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시사한다. 노인 여성에게 느끼는 역겨움은 우리 문화에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미적∙성적 감정 중 하나다. 여성도 남성만큼이나 이런 역겨움을 느낀다. (억압자는 대체로 피억압자 ‘고유의‘ 미적 기준을 부정한다. 피억압자는 결국 자신이 추하다고 믿는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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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9-10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자는 근육이죠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복근을 위해 아령을 ㅋㅋㅋㅋㅋㅋㅋㅋ 들고 싶지만 현실은 2달째 헬스장 자체 파업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 너무 예뻐요. 손택은 진짜 사진만 봐도 힐링이 됩니다!!

난티나무 2025-09-10 15:14   좋아요 1 | URL
자체 파업 저도 오래 됐는데 ㅋㅋ 책 읽다 보니 심술이 나서 굳이 아령을 찾아 들어야 겠다 싶었어요. 무거운 거는 옆에 없어서 달랑 가벼운 거 하나 들고 시늉만 했습니다.ㅋㅋㅋ 복근 그게 머야요…@@ 제 배는 몇 달 전부터 부풀어올라 들어갈 생각 없어 보여요… 😞 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 손택이 째려보는 건가…ㅎㅎㅎ 반려지방이 생겼다네 유후! 😅
 

오늘 밑줄

이런 상황은 우리의 노력으로 ‘교정할 수 없다. 이런 취약성의 근원은 ‘나‘의 형성에 앞서 있기 때문에 그 근원을 발견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의존해 벌거숭이 상태로 놓이게 되는 이런 존재의 조건은 그에 대해 똑 부러지게 논쟁을 벌일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세계, 의존적인 세계에 접어들었고, 어느 정도는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자율성의 관점을 가져와 이런 상황에 대해 반박하려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위험하지는 않아도 바보스러울 것이다. 물론 몇몇 사람에게는 이런 원초적 장면primary scene이 유아기 삶을 후원하고 성장시키는 특별하고 사랑스럽고 수용적이며 따뜻한 관계 조직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유 - P44

기나 폭력 혹은 기아의 장면이다. 이들은 무의미, 야만성, 부양 불능에 양도된 신체다. 하지만 이 장면의 가치가 어떠하든, 유아가 필연적 의존성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고 이 필연적 의존성을 우리는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몸은 여전히 어디론가 양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의 억압을 이해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바로 이런 근원적 취약성primary vulnerability의 상황, 우리가 타인과의 접촉에 양도되는 상황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타인도 없고 우리 삶을 지원해줄 그 무엇도 없다고 해도, 아니 그런 것들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억압에 대항하려면 각각의 삶이 차별적인 지원을 받고 유지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인간의 신체적 취약성이 전 세계로 분포되는 방식이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삶은 엄청난 보호를 받을 것이고, 그 삶의 고결성에 대한 주장을 저버리는 것만으로 전쟁이라는 무력을 작동시킬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삶은 정신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그런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슬퍼할 만‘하다는 자격조차 갖지 못할 것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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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나는 욕망과 사랑을 별개의 글 두 편에서 다룬다. 표면적으로 그것들을 분리하는 것이 말이 되긴 하지만, 그 분리는 교수법적인 것일 뿐, 사랑과 욕망을 잘 분리할 수는 없다. 욕망은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그 대상의 구체성과 대상에 투사된 욕구와 약속 사이의 간극으로 생성되는 뜬구름 같은 가능성에 대한 기술記述이다. 이 간극은 더 복잡한 문제들을 낳는다. 욕망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으로서 우리를 찾아오지만, 우리가 자신의 정동과 조우하도록 유도해 마치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는 우리가 선택한 대상들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착 가치를 투사해 우리 세계를 떠받치는 대상으로 변환한 사물이나 장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대상들에서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고, 그렇기에 신기루이며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닻이다. 욕망의 대상을 향해 우리가 말을 거는 스타일이 바로 우리가 자아와 다시 조우하게 되는 드라마에 형태를 부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랑은 욕망을 상호 교환하는 포옹의 꿈이다. 즉, 사랑은 [자아를] 고립시키기보다는 확장된 자아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사랑의 규범적 양태는 ‘둘은 곧 하나’라는 커플 형태의 친밀함이다(부모와 자식 또한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이상화되지만, 그 사랑의 지속에 상호성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것은 커플의 성취를 언제나 무색하게 한다). 커플 관계의 이상화된 이미지 안에서 욕망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또 욕망이 지속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이 이미지에도 명암은 있다. 사랑의 관계가 사실인지 아니면 실은 다른 무엇인지, 지나가는 변덕인지 아니면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 (스스로에게 혹은 다른 이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인지, 과연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은 감정에 대한 지식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질문이지만, 또한 어떻게 규범이 특정한 환상들을 이용해 삶에 대한 애착을 생산해 내는지에 대한 정치적 질문이기도 하다. 사랑의 표현들이 그토록 관습적이고, 결혼, 가족 등의 제도, 재산 관계, 상투 어구와 플롯에 그토록 매여 있다는 건 사랑과 관련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주체성에 관한 질문이면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101~102)


3장 [욕망] 로런 벌렌트, 윤조원 옮김. 

첫 페이지부터 빠져버림. 그나저나 <잔인한 낙관>은 왤케 어려웠는지?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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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겨우) 떠듬떠듬 읽다(잡생각이 많아서) 오랜만에 밑줄이라도 남겨보자 하고 들왔더니 이미지를 올린 글에는 밑줄을 남길 수가 없단다. (그렇다, 북플이다.) 흥.

이미지를 지우고 밑줄 올리기. 한 쪽만 올리기. 1장 읽으면서 아 이 책은 뭐라도 써야 하는 책이다 했으나. 3장 읽고 있고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은 지나가 버렸고. 돌아와라.

일에 몸을 갈아넣으면서 책과 글과 먼 거리 유지 중인 난티나무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생존 신고 같으다. ㅋㅋ 🤣

그러므로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민족성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과정이다. 민족성이 구성하는 집단체와 ‘그 이익‘은 일반적으로 사회 속에 존재하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 집단체의 위치를 설정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민족적 정치‘에 관여하는 이들이 이 집단체 내부에 있는 타자들과 갖는 관계들의 결과이기도 하다. 특정 민족적 정치 구성의 중심에는 젠더, 계급 및 그 외의 차이들이 있고, 동일한 집단체의 상이한 민족 기획들이 헤게모니를 차지하려고 맹렬히 경쟁과 투쟁에 참여한다. 이들 기획 가운데 몇몇은 예를 들면, 영국 ‘흑인‘ 공동체의 경계들에 대한 논쟁의 경우에서와 같이 (Brah, 1992; Modood, 1998; 1994)집단체의 실제 경계의 구성에 여러모로 관여한다. 민족성은 억압받는 소수집단 특유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헤게모니 민족성 성취의 척도 가운데 사회문화적 구성물들에 대한 ‘자연화‘ naturalize‘의 성공 정도가 포함된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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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6-25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에 몸을 갈아넣으면서 엄청 바쁘게 살고 계시는군요, 난티나무님!
생존신고라도 좋으니 자주 좀 오시어요~~ 풍광 사진도 팍팍 뿌려주시구요^^

난티나무 2024-06-26 14:14   좋아요 2 | URL
아아 느무 피곤합니다. ㅋㅋㅋ
책을 안 읽으니 서재에도..@@ 출퇴근길에만 사진 찍는 일상 ㅎㅎㅎㅎ 출근하고 있어요. 🤣

달자 2024-06-25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쁘지만 자주 와서 일상이나 읽는 책 몇 구절이라도 공유해 주셔요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4-06-26 14:17   좋아요 3 | URL
달자님!!!! 👋 넵 출퇴근길 도로 사진이라도 ㅋㅋㅋ 노력하겠습니다! 빠리 덥죠? 더위 조심하세요~~~
 

6장 도입부

사랑을 다루지 않은 급진적 페미니즘에 관한 책은 정치적으로 실패작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출산보다도 훨씬 더 여성 억압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놀라운 사실을 함축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사랑을 없애기를 원하는 것인가?
사랑에 대한 어떤 위협에도 느끼게 되는 공포는 사랑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한 좋은 실마리가 된다. 사랑이 여성 또는 성심리에 관한 어떤 분석에서도 중심적이라는 또 다른 징후는 그것이문화 자체에서 누락되어 있고 ‘사생활‘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이다.(침실에서의 논리에 관해 들어본 사람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소설, 심지어 형이상학에까지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사랑은 묘사되어 있거나 더 낫게 재창조되어 있기는 하지만, 분석되어 있지는 않다. 사랑은 충분히 경험되어 왔고 그 경험이 전달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이해된 적은 없다.
분석의 부재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즉, 여성과 사랑은 기본토대이기 때문에 그들을 검토한다는 것은 문화의 구조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된다.*(본문 강조)
‘남성들이 걸작품들을 창조하는 동안 여성들은 무엇을 하고있었는가?‘라는 지겨운 질문은, 여성은 문화에서 금지당했고 어머니의 역할에서 착취당했고, 또는 역으로, 여성은 자녀들을 창 - P183

조했기 때문에 작품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는 명백한 대답 이상의 가치가 있다.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심층적인 방식으로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여성이 그들의 에너지를 남성에게 쏟기 때문에 남성은 생각하고, 글을 쓰고, 창조한다. 즉, 여성은 사랑에 몰두하기 때문에 문화를 창조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은 사랑을 위해 살고 남성은 일을 위해 산다는 것은 판에 박힌 말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이분법의 근거를 개인의 정신에서 찾으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첫번째 사랑의 대상인어머니에 의해서 성적으로 거부된 남아는 그의 ‘리비도 libido‘-성적 (삶의) 에너지의 보고寶庫를 더 일반화된 형태의 사랑을 얻으려는 바람에서 장기간의 계획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사랑에 대한 욕구need for love를 인정에 대한 욕구need for recognition 로바꾼다. 여성에게는 이러한 과정이 그만큼 많이 발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여성은 직접적인 따뜻함과 승인approval을 끊임없이 찾는다.
‘모든 남자의 배후에는 여자가 있다‘ 그리고 ‘여자는 왕좌 배후의 권력이다‘라는 진부한 말에는 진실성도 많이 있다. (남성)문화는 여성의 사랑 위에 그리고 그것의 대가로 세워졌다. 여성들은 그러한 남성의 걸작품들의 내용을 제공했다. 수천 년 동안 그들은 그 일을 해왔지만 그 수혜가 남성에게 돌아가고 남성들의 업적이 되어버리는 일방적인 감정적 관계에서 고통을 받아왔다. 그래서 만일 여성이 남성 경제의 주변부에 의지해 사는 기생적인 계급이라면, 그 반대 역시 진실이다. *(남성) 문화는 호혜성reciprocity 없이 여성의 감정적 힘을 먹고 자라는 기생적인 것이다.* (본문 강조)
더욱이 우리는 이 문화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한 전체의 - P184

절반만 제시하는 편협한 것임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문화의 구조 자체가 모든 점에서 남성 사회의 이익 안에서, 남성 사회의 이익을 위해, 남성 사회의 이익에 의해 운영될 뿐만 아니라, 성적 양극성 sexual polarity 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전체의 절반인 남성이 문화의 모든 것이라고 불리지만, 남성은 여성의 ‘감정적‘ 절반이 있음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은밀하게 그것으로 산다. 그들 안에 있는 여성을 거부하는 싸움의 결과로서(우리가 설명해온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그들은 사랑을 문화적 문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랑이 ‘여행과 모험‘의 커다란 남성 세계에서 사내다움을 증명하려 작정하고 덤비는 모든 남성의 약점이듯이, 사랑은 (남성)문화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여성은 남성이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이 필요를 부정하는지 언제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여성이 보편적으로 남성에게 느끼는 특이한 경멸("남자들은 완전 멍청해")을 설명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성은 그들의 남성이 외부세계에서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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