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
다시 로크먼 지음, 정지호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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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 이야기를 꺼내며 불공평하다고 하면 으레 나오는 소리가 있다. "나는 돈을 벌잖아." (너는 돈을 안 벌잖아.) "나는 직장에 나가잖아." (너는 집에 있잖아.) "네가 나가서 돈을 벌어온다면 내가 살림을 도맡아 할게." (너는 어차피 지금 나가서 돈 못 벌잖아. 그러니 집에서 살림이나 해.)

이런 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집에서 하는 일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 만약 돈으로 환산이 된다면 얼마만큼일지, 환산금액을 들이민다 해도 식구들이 그걸 얼마나 피부에 와닿게 느낄지도 의문이다. 그보다는 매일 반복되는 머릿속의 기획들을 설명하고(언제까지?) 자잘한 일들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맡겨버리고(그걸 보아낼 자신은 있고?) 일정한 규칙을 정해 지키도록 만들고(어디까지 만들어야 하나?) 가끔은 파업도 선언하고(과연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을까) 그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다 보면 자꾸만 하찮은 일인 것 같은 그것들을 하찮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고,정,관,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나부터 변해야 한다.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말고! 약해지지 말고!


나는 돈 벌잖아, 이런 말은 남편들만 하는 말은 아니다. 여자들 사이에서도 한다. 직장 다니는 여자와 전업주부, 기묘함이 흐른다. 밖에 나가 돈을 버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사회의 모습이다. 오래 전 한국에 다니러 갔을 때 만난 친구가 밥값을 계산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는 돈 벌잖아." 너는 돈을 안 버니 돈을 버는 내가 네 몫까지 살게. 너 돈 없잖아. 식당에서도 까페에서도 나는 계산을 할 수 없었다. 네가 밥을 샀으니 커피는 내가 살게 하면 어김없이 "나는 돈 벌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돈 벌어, 하면 "나는 직장에 다니잖아."가 나왔다. 처음엔 괜찮았으나 들을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지금 생각하니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남편들의 말과 그 친구의 말이 비슷한 것이었네. 돈을 벌지 않는다는 '사실'에다가 너는 돈이 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 너는 당연히 나에게 의존해야 하는 사람, 나는 네게 베푸는 사람, 너는 당연히 나를 존중해야 하는 사람, 돈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 따라서 네가 하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하는 일보다 가치 없는 것,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 너는 그런 사람,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프레임.

그 친구가 악의는 없었다는 걸 잘 안다. 나를 위해주는 것이었다는 것도 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절친도 나를 만나면 절대 내가 밥에 돈을 쓰지 못하게 했다. 절친은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러니 '돈이 없을 나'를 완전 위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친구의 말에 기분 나쁨을 느꼈으며 절친에게도 가끔 약간의 서운함 같은 애매모호한 느낌을 받았다. 


최근 옆지기가 그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일을 하잖아." 내가 집에서 하는 일이 별거 없어 보인대도 엄청나게 수고로운 일이라는 걸 그동안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뜻밖의 말을 듣는다는 생각에 멍, 해졌다. 내가 집에서 하는 이 모든 일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회의에 빠진다. 심지어 옆지기는 프랑스 생활을 시작한 이래 몇 년간은 학생이었다가 최근 몇 년 전까지 프리랜서였다. 아주 가끔의 출장을 제외하면 24시간 동거. 웃음이 나는 걸 어쩌면 좋지. 이것저것 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 옆지기 입장에서는 엄청 기분나쁠 일이겠으나 나는 어이가 없다.

이런 생각의 차이를 어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 지 때로는 갑갑하기도 하다. 나도 또한 고정관념의 틀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하고 말이다. 그래서 살림 분담과 관련된 내용의 책을 읽을 때면 신경을 곤두세운다. 누가 좋은 방법 좀 가르쳐줘요 자세로. 많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동안 읽은 페미니즘&성차별 책들에서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방법이라기보다 방향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찬찬히 생각했다. 내 방향을 찾는 것은 내 몫, 방향을 따라가다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도 내 몫.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은 없다. 내가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나부터, 내가 갖고 있는 죄책감, 내가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좋은 엄마상, 이런 거 다 내다버려야 한다. 잘 안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럴 수밖에, 그렇게 살아왔는데.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반짝 불이 켜지는 것처럼 깨닫게 된 것은 없었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을 만들어나갈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아직 살짝 위축은 된다. 여전히 "나는 일하러 가잖아."에 대응하는 문장을 찾기 어려운 상태에서 내가 얼마나 강한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미셸 오바마도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ㅠㅠ) 

그러나, 그러니 읽자. 계속 읽자. 읽다 보면 방향은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방법도 떠오를 것이다. 그럴 것이다.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책의 표지에 왜 비닐봉지가 있는 것일까. 단순한 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신경과학자인 엘리엇에게 전화해 내가 조사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 당장 생각나는 불가피하거나 선천적인 요소가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만화 주인공처럼 귀에서 연기를 막 뿜어낼 듯이 말했다. "핵심만 얘기할게요. 인간 행동 중에서 타고난 건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행동은 의식적, 무의식적 경험으로 형성되죠. 성별 노동 분담이 ‘선천적‘이라는 주장은 권력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편리한 방편이에요." - P122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일은 인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자의 문제로 인식된다. 2018년 소설가 로런 그로프는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남자 작가가 이 질문을 받을 때까지 정중히 답변을 거절하겠다"고 답했다(네티즌들은 그로브의 거절에 대해 갈채를 쏟아냈다)." 2014년 할리우드의 여성Women in Hollywood 행사 연설에서 배우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제니퍼 가너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일을 하며 아이들을 어떻게 돌보느냐는 질문을 받지만, 공연 사업에 종사하는 당시 남편은 그런 질문을 한 번도 받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 P171

도이치는 연구 대상자 중 여성이 주양육자 역할을 맡는 불평등한 가족을 추려내고 이들 부부의 남편을 세 부류의 보조 양육자, 즉 도우미형, 나누미형, 태만형으로 나누었다. (중략) 전부 불평등한 가정을 연구하면서 도이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은 여자의 일정이 남자보다 자유롭다고 가정한다. 항상 엄마의 시간을 뺏는 게 더 수월하다. 엄마는 침해당하는 사람이다." - P185

사회과학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아빠들의 육아 참여율이 느리게 변화하는 현상을 두고 평등을 이룬 결과로 오인해서는 안 되며, 그보다는 "대체로 성공적인 남자의 저항"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 꼬집는다. 변화가 왜 그렇게 느린지 묻지 말고, 대신 왜 남자가 저항하는지 물어라. "한마디로 그렇게 해야 남자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콜트레인은 이렇게 썼다. 그 저항은 "남성적 이상을 뒷받침하는 성별 영역 분리를 강화하고, 여자보다 남자에게 특권을 주는 성 질서를 영속화한다." 파기되어가는 계약을 유지하려는 특권 계층의 철야 농성이고, 오늘날 벌어지는 비도덕적이고 냉혹한 일이다. 결혼 생활에서 이 저항이 성공하려면 남자들도 여자들의 노동을 할 능력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거부하면서 이를 철석같이 지켜나가야 한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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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29 23: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급노동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를 돌보는 것을 아내의 의무라 하고 가정은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 지불방식이 존재하질 않으니까요. 뉴스에서 주부의 노동에 대해 월급여로 어느정도인지 계산해 준적이 있는데 마침 제 짝꿍과 같이 봤더랬죠. 그 계산대로 해보니 당시 결혼기간으로 측정해 1억이 넘었어요ㅋㅋㅋㅋ거기서 일단 논리가 형성됐고 <보이지않는 여자들>에서 읽은 사례들 중 일부를 한번씩 입력시키고 다른 여성학책들의 적당한 포인트로 주입... 저도 공부가되고 짝꿍도 놀라면서 이것저것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남자는 가장일꺼란 전제하에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게되고 여성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덜받게되고요.
‘주부는 집에서 논다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전제인데(가사도우미 부름 얼만지 한번 알아보라고 해보세요ㅋ) 여성들도 그리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이래저래 자꾸 읽고 짝꿍 비롯 주변인들에게 제대로 된 인식을 끈기있게 퍼트리는것이 제 사명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힘들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반복에 장사 없더라구요. 세상은 못바꿔도 가까운 사람들 몇 명에겐 영향을 미칠 수 있잖아요.
난티나무님 파이팅~^^♡

난티나무 2021-05-29 23:40   좋아요 4 | URL
미미님~^^ 저도 일단은 그것이 목표예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 미치기! 같은 집에 사는 남자들은 확 변했으면 좋겠고요.ㅠㅠ 그런데 갈 길이 멉니다. 그래도 포기는 못 해요. 그러면 이제 제가 너무 힘들어요.ㅎㅎㅎ
미미님처럼 계속 반복! 주입! 퐈이팅!!! 페미니즘 책을 같이 읽는 부부가 되었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이기도 해요.ㅋ
댓글 감사합니다~~~~~^*^

희선 2021-05-30 0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집안이 엉망이 되고 먹을 것도 없을 텐데, 집안 일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겠습니다 예전보다 바뀌었다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듯하네요 집안 일을 자기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하면 많은 돈을 받을 텐데, 그런 걸 생각해야 하는데... 바깥에서 일하는 걸 더 대단하게 여기는군요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해도 조금이라도 말해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런 거 힘들 것 같지만...


희선

난티나무 2021-05-30 18:38   좋아요 2 | URL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저도 평생을 그런 줄 알고 살았으니까요. 알 수 없는 불만만 가득한 채로, 왜 그런지는 모른 채로. 여자인 저도 그런데 남자인 옆지기는 오죽할까요. 한번도 해보지 않았고 생각조차 할 필요 없었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생각해야 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누구라도 어려울 거예요. 그걸 아니까 늘 고민합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가끔 싸우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계속 싸우게 될 것 같습니다.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레이스 2021-05-30 0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동을 바라보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버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난티나무 2021-05-30 18:38   좋아요 1 | URL
옳습니다~!!!!!!!!!!!!

공쟝쟝 2021-05-31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가장 어려울 옆지기와의 어려운 조율 ㅠㅠ 진짜 많이 바뀌어야할텐데요.. ㅠㅠ 난티님 밥 잘 챙겨드시구 더 읽으세요! 분명히 어느지점에서 난티님만의 방법을 찾으실 거예요! 응원합니다!!

난티나무 2021-06-01 04:51   좋아요 1 | URL
매일 얼굴 보는 사람이 제일 어렵네요. 매일 봐서 어려운가 봐요. 하긴 가끔 만나는 부모나 동생도 만나고 좀 지나면 어려워지더라고요? 예전엔 몰랐는데 이젠 말 안 통하는 지점이 엄청 늘어남... 아 웃프다.ㅠㅠ
공쟝쟝님의 응원에 힘입어 밥도 열심히 잘 먹고 걷기도 좀 늘리고 으쌰으쌰 계속 더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