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광기
필리스 체슬러 지음, 임옥희 옮김 / 위고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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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모든 것이 '성적 기준'에 의해 재단되는 세상,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는 그러한 기준이 여성의 정신질환과 의료기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낱낱이 까발린다. 모든 것이 '성적 기준'에 의해 재단된다는 말은, 여성인 당신이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또는 하지 않든, '그것은 당신이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항상 꼬리표처럼 붙어다닌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기처럼 사회에 퍼져있는 편견에 따라 조금이라도 그 '여성적인 잣대'에서 벗어나면 마땅히! 비난이 따라온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가, 정신질환이 없다 하더라도 이런 꼬리표 지나치게 친근하지 않은가. 목소리를 높이면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듣는 일, 말해 뭐하나. 

(사족 : 네이버에서 '미치다'를 검색하면 사전의 예문이 다음과 같다. "그녀는 전쟁 통에 어린 자식을 잃고는 끝내 미치고 말았다." 미치는 사람이 여성이다. 미치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다. 더하여 모성을 극대화했다. '그는 전쟁 통에 어린 자식을 잃고 끝내 미치고 말았다.'는 문장은 예로 들 만큼 흔하지 않고 예문보다 확실히 '덜 일반적'이다. 남편들은 속을 알 수 없는 묵묵함을 지키며 그저 옆에 있거나 혹은 아예 없다. 이런 예문도 어머니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모성 신화에 이바지하고 있지 않나? 우리가 '미친년'이라는 단어에 곧장 '귀 옆에 꽃을 꽂은 젊은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낱말 풀이를 볼 때마다 찜찜하다. 언어는 무서운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정신질환'이라는 것에 대해(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다시 생각했다. 옛날에도 존재했던 증상들을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면서 규정짓고 틀을 만들어 집어넣게 된 것, 거의 모든 의/과학 연구가 그렇듯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실험이나 조사/연구는 없다시피 했으며 늘 기본값은 남성이었다는 것. 거기에 더해 병원에서의 심리치료 역시 가부장적 존재인 남성의사/치료사에 의해 여성환자들을 성적 대상화한다는 사실에 대해. 나랑 성관계 하면 니 증상이 낫는다? 이런 개소리를(개야 미안) 늘어놓는 자들이 의사라고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어릴 적 살던 도시의 한 병원을 떠올린다. 병원 앞에 가본 적 없고 정확히 주소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거기 어디쯤, 도시의 상징물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정신병원'. 실체 없이 느끼던 두려움. 흐릿한 기억에 엄마가 거기 다녀왔다는 말을 스쳐들었던 것 같다. 가야 겠다고 한 건지 다녀왔다고 한 건지 알 수는 없다. 연기 자욱한 기억 속에서 엄마와 '정신병원'은 그렇게 가늘고 희미하지만 긴 끈으로 이어져있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엄마가 병원에 갔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았다. 그러고도 남을 상황 속에서 그래도 '정신병원'은 무서웠다. '미친 사람들'이 가는 곳이고 '위험한' 곳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미쳤을까. 나도 미쳤을까.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치지' 않았고, 살아남았다. 우리는 정말, '미치지' 않은 걸까? 


억울한 여자들, 감옥과도 같은 곳에 갇혀서 연명하다가 죽은 여자들, 난도질당하고 짓밟힌 여자들, 집에서, 거리에서, 병원에서, 알 수 없는 곳에서, 넘어지고 다치고 죽는 여자들. 심각한 사태를 정확히 보자. 정확히 보게 만들자. 치우치고 숨겨지고 뻔뻔한 모든 기준들을 다시 보게 만들자. 한 명이 말하고 백 명이 말하고 천 명이 말하고 천만 명이 말한다면, 그렇다면 더디더라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ㅠㅠ


밑줄을 많이 그었는데 이 많은 밑줄들을 어떻게 다 옮길 것인가 생각하다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한 문장 한 문장 다 읽는 수밖에 없다. 그냥 읽으세요. 


+ 지금 나의 여기에서 방향을 잡을 몇 문장들 : "여성의 신체에 대한 가부장제의 혐오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관계'를 유지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528) "여성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여성들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연민을 느껴야 한다. 여성은 세계를 '구하기'에 앞서, 남편과 아들을 '구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과 딸을 '구하기'에 나서야 한다."(528) 


옳다. 관계를 유지하려는 집착을 버릴 것. 그리고 나는 우선 내 자신부터 구한다. 남편과 아들들은 저희가 알아서 구해지든 말든 할 것이다. 나는 나를 먼저 구하고,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내 딸이나 다름없을 조카들과 주변의 여자아이들을 구하기에 나선다. 그것을 목표로 한다. 



(* 또 사족 : 이번 달 시작도 가장 먼저, 완독도 가장 먼저, 거기에 <미괴오똑>까지 더해 읽었음에도 그럴 듯한(?) 리뷰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순간메모를 하지 않았으며 전체 내용정리를 하지 않았으며 <미괴오똑>을 읽으면서 그만 생각이 얽혀버렸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어본다. 어쨌든 그러니까 결국은 내 능력 부족이라는 말이다.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으나 그것을 요래요래 잘 엮고 짜는 능력이... 이 글에서 가장 핵심인 부분은 "그냥 읽으세요"가 되겠다. 이 말을 그저 두서없이 길게 늘여 쓴 것이라 보면 된다. 그러나 뭐라도 쓰긴 써야 겠고 그래서 일단 쓰기는 썼다. 항상 말일 전에 에라 모르겠다 모드가 된다. 와, 변명 쩔어.




"우리 시대 여성들은 '자유로운' 노예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굴종을 선택한다. 여성들은 정서적으로 너무나 쉽게 '홀딱 빠져들도록' 배워왔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손 치더라도 분명하게 생각할 수 없다. 하데스(또는 제우스나 디오니소스)는 딸이자 처녀인 페르세포네를 그녀의 어머니인 데메테르 여신으로부터 빼앗아왔다. 수 세기 동안 가족들은 이와 같은 작별을 해왔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여성들도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그 길을 따라 허둥지둥 지하세계로 걸어 내려간다." (135) 


"개별적으로 치료를 받고 공개적으로 입원을 한, 그래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대다수 20세기 여성들은 미친 것이 아니다. 플라스, 웨스트, 피츠제럴드, 패커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대단히 불행하고 자기파괴적이며 경제적으로 무력하고 성적으로 불능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간주되지 않았던가. 우리 문화에서 정말로 미친 여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사회는 그와 같은 경험을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제거해버린다. 광기는 차단되고 수치스러운 것이 되며 잔혹하게 취급당하고 부정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남성들과 정치하고가 과학 - 그 자체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본보기 - 은 비이성적인 것, 즉 무의식적인 사건이나 집단적인 역사의 의미에 다가가거나 접촉하려고 하지 않는다." (139) 


"대부분의 임상의들은 여성의 성적 자기규정에 필요한 사회정치적(심리적) 조건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남성들이 생산과 재생산의 수단을 통제하고 있는 한 여성들은 결코 성적으로 자신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성(또는 성적 쾌락을 위한 그들의 능력)을 경제적인 생존 및 모성과 맞바꾸어왔다. 익히 알다시피 여성의 불감증은 그와 같은 맞교환이 없어져야만 없어질 것이다. 매춘, 강간, 가부장적인 결혼이 혼외 임신, 강요된 모성, 비모성적인 부성, 나이 든 여성의 성적 박탈과 같은 개념(관행)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는 한, 여성들은 '성적'일 수가 없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의 불감증은, 여자아이들이 불감증을 겪지 않고 있는 여자 어른에게 돌봄을 받고, 그런 어른들을 보고 자랄 때 없어지게 될 것이다." (168) 


"'광기'라는 것은, 남자에게 나타나든 여자에게 나타나든 간에, 과소평가된 여성 역할을 수행하거나 혹은 개인에게 부과된 상투적인 성역할을 총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조건화된 여성의 역할을 완전히 수행하는 여성들은 임상적으로 '신경증적'이거나 '정신병적'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들이 입원당하는 것은 우울증, 자살 시도, 불안신경증, 편집증, 식이장애, 자해 또는 난잡한 성교 등과 같은, 대체로 여성적인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거나 혹은 이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취하는 여성은 자신뿐 아니라 사회를 경악하게 하는 만큼, 그들에 대한 추방과 자기파괴는 매우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다. 이런 여성들은 또한 '정신질환적'이라고 분류된다. 이들이 만약 입원을 한다면 정신분열증, 동성애, 난잡한 성교 등과 같이 비교적 덜 여성적인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불감증과 마찬가지로 난잡한 성교는 '여성적인' 동시에 '비여성적인' 특징이다. 단지 한쪽은 '여성성'으로 도피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여성성'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182) 


"우리 문화의 정신건강 윤리는 남성적이다. 이와 같이 성별에 따라 정신건강에 관해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탓에 인간의 정신건강에 관해서는 오로지 남성적 기준만이 존재하고, 이는 사회와 의사 모두에 의해 강화된다. ... 남자아이들의 '공격적인' 행동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이유는 가부장제가 그들이 좀 더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성성'을 실천하도록 원하기 떄문이다." (199) 


"중요한 것은 학문(예술)을 하는 남자들은 찰나적이고 낭만적인 순간을 제외하고는 여성 주체와 자신을 강력하게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제정신은 두 다리 사이에 단단히 정박해 있기 때문이다." (210) 


"심리치료와 결혼 제도는 서로를 되비추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를 지탱한다." (253) 


"전통적으로 심리치료사는 여성 억압의 객관적 사실을 무시해왔다. 여성 환자는 아직까지 남편이나 치료사와 '진정한'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직접적인 혜택을 누리는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255~256) 


"여성은 스스로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강간당한다. 여성의 순종적이고 타협적이며 동정적이고 유혹적인 행동의 대부분은 강간의 책임이나 강간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구축되었다. 강간은 근대 산업자본주의 시대 훨씬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그것은 한 남자가 다른 사람의 직접적인 신체적 고통과 심리적 모멸을 통해서야 비로소 쾌락이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행위(또는 사회 체계)에 대한 적절한 은유로 보인다. 아는 이성에 의한 강간과 임신이라는 생물학적인 사실과 의미가 가부장제 가족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이었다고 믿는다. 남성들이 자신의 유전적 불멸성을 증명하려는 욕구 또한 주요 요인이었다. 이러한 욕구가 너무 강렬해서 남성들은 자녀가 자신의 정자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당연히 여성의 몸을 식민화하고 여성의 자유를 제한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516) 


"의식이 기적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여성이 권력을 획득하지 않고 가부장제를 물리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악조건에서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자유롭고 도덕적인 선택에 따라 폭력 행사를 거부하기 이전에 폭력이나 자기방어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517) 


"여성이 전혀 다른 더 나은 과학과 언어를 발견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이런 제도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공공 및 사회 제도를 점진적이고 근본적으로 장악해야 한다. 여기서 '장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남성들처럼 공공제도에서 우위를 점해본 경험이 없는 여성들로서는 '평등'이나 '개별성'만으로는 여성의 억압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26) 


"여성은 많은 일들과 많은 생각, 많은 사람들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 어떻게든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아 초점을 그처럼 급격하게 옮긴다는 것은 극도로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모든 '여성적인' 신경과 감정이 날카롭게 자극되면서 심각한 대가가 따르게 된다. 어떤 여성은 그처럼 급격하게 초점을 이동시킬 때 '미쳐'버린다."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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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2-30 08: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본문에 언급하신 528 인용은 저도 밑줄 그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필리스 체슬러가 말해줘서 너무 좋았어요!

난티나무 2021-12-30 14:58   좋아요 2 | URL
저도요. 이런 말 계속 해주는 사람 있어야 해요, 진짜. 자꾸 까먹을 수 있음! ^^;;;;;;

청아 2021-12-30 08: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겠습니다. 미괴오똑 저도 그냥 읽을께요!!ㅋㅋ네이버 검색결과에 놀라서 다음에 검색해보니 네이버 왜이런거죠? 예문을 들어도 하필! 이 책을 읽으면서 길에서 마주치는 여성들을 볼 때 어쩐지 더 짠하고 애틋하더라고요.난티나무님 완독 수고하셨어요!!!!

난티나무 2021-12-30 15:03   좋아요 2 | URL
미미님 요즘 저도 여성들 볼 때의 심정이 그래요… 마음이 아파… 흑. 너무 이러면 안 되는 거죠?^^;;;
다음에서 보니 속담이 또 가관이네요. 허허…. 아 진짜… (미친 녀편네 떡 퍼 돌리듯,이라는 속담…)
🙏🙏🙏

거리의화가 2021-12-30 09: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crazy는 왜 유독 여성들에게 붙여지는가 항상 늘 불만이었는데 이 책 읽으면서 분노하기도 하고 일정 부분 해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도 밑줄이 너무 많아서 어느 순간 정리가 더 어려운 느낌이더라구요.
여성들이 자신을 구해야 한다는 말은 백번 천번 옳은 말입니다!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먹고 일하고 싸우고 해야 할 것 같아요.

난티나무 2021-12-30 15:09   좋아요 2 | URL
분노의 책이죠. 쓴 사람도 읽는 우리도! 저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여성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게 다른 사람을 위하고 먼저 생각하는 습성을 버리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너무 몸에 배어버려서…ㅠㅠ 나를 위해 먹고 일하고 싸우고!!!! 👏👏👏

수이 2021-12-30 10: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괴오똑은 읽으신 분들 평이 다 좋더라구요. 저는 알 수 없는 거리감에 좀 이따 읽어야지 했는데 아무래도 여기저기 말씀을 하시니 읽어봐야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2022년에도 내내 함께 읽으면서 더 많은 생각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난티나무 2021-12-30 15:12   좋아요 3 | URL
미괴오똑 페이퍼라도 쓰고 싶은데 잘 될 지 모르겠어요. ㅎㅎ 생각이 많아져서…
함께 하는 2022년!! 😍😍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vita님~~~^^

수이 2021-12-30 15:17   좋아요 2 | URL
언니 요새 애교가 는 거 같아 ㅋㅋㅋㅋㅋㅋ 😘

난티나무 2021-12-30 15:30   좋아요 2 | URL
아니 제가요?@@ 그라믄 안 되는데…ㅋㅋㅋ 아아 사랑이 막 넘쳐흐르는가….. 좀 주워담아야 하겠다아… 쓰읍 😝😝😝

수이 2021-12-30 15:3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12-31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기 전에 <미괴오똑> 시작해서 아직 그 책은 조금 남아있는데 같이 읽기 잘한 것 같아요.
미쳤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이 책을 써내려간 저자의 강단과 통찰에 박수를 보내구요.
그 책을 힘들게 읽고 쓰는 우리들에게도 박수를 보냅니다*^^*

난티나무 2022-01-01 23:40   좋아요 1 | URL
박수를!!!!!!!
단발머리님 해피뉴이어!!!!!!! 편안한 1월 1일 밤 보내세요~~~~~^^

- 2022-01-04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 더 읽으면서 임파워링합니다! 난티님 새해 복 많이받으세요 !

난티나무 2022-01-05 01:11   좋아요 1 | URL
임파워링!!!!!!! ❤️❤️❤️
공쟝쟝님도 복 많이 받으시길!! & 건강!

난티나무 2022-01-05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데 글 다시 읽어보니 그냥 읽으세요, 의 대상은 여성과 광기인데 왜때문에 미괴오똑을 그냥 읽으신다고???ㅋㅋㅋ 😊😊😊 다 읽자!!!!
 
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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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버리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사실 이런 내용인 줄 몰랐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또 울게 되겠구나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지금껏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 든다. 왜 아기(아이)를 '버리는(포기하는)' 사람은 늘 엄마인가? 아이의 입장에서 '버려졌다는' 이유로 부모를 특히 엄마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이 과연 일반적인 감정일까? 사정이나 상황이 불가피하다고 해서 편을 드는 건 아니다. 나라도 증오할 듯하다. 그런데, 어쨌거나 왜 '버리게' 되었는지 진실을 알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 아닌가? 사람은 이미 일어난 한 가지 일에 수만 가지 이유를 갖다붙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 이유가 실제로 그러한지 확인할 길이 없어도 말이다. 어떻게 엄마가 돼서 아이를 버릴 수가 있어? 이 말은 또다른 '모성 신화' 때문은 아닌가? 


프랑스에 처음 와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마르고 키가 크고 말수가 없는 한 사람을 알았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한국말을 하지 못하고 자주 표정이 굳은 것처럼 보이던 그. 힘들었겠다, 어릴 때 고생했겠다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 복잡하고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을 헤아려보려는 시도는 하지 못했다. 해외입양은 난해한 단어였다. 어느 날 갑자기 사는 곳이 바뀌고 사람들이 바뀌고 말도 통하지 않는 어른이 엄마 아빠로 부르라고 하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허구헌날 놀려대는 삶. 소설의 주인공 '나나'는 그런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 사람이다. 슬픔과 분노와 증오가 얼룩진 그 감정의 강도를 알기는 어렵다. 이제 아주 조금 짐작할 수는 있을 것도 같다. 나도 이방인으로 살고 있지만 '버려진' 것이 아니고 설령 그것이 도피였다 할지라도 내 선택으로 여기 있으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식구들이 있으므로, 그 짐작은 어렴풋한 것이 될 테지만. 아이 학교에서 동양인이라고 놀림과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애가 닳았지만 절대 학교에 찾아가지 말라는 아이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왜 여기에서 이런 취급을 당하게 하는지, 선택을 후회하며 자책했다. 외모만 조금 달라도 약자/타자가 되는 학교 안 세상이다. 어른들은 표 내지 않으려고 노력이나 하지. 아이들은, 좋게 말해준다면 솔직하다. 혐오를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이 외모라는 조건에는 피부색, 인종과 더불어 순수혈통(?)이냐 아니냐도 들어간다. 엄마나 아빠가 프랑스인이 아니라면, 그 아이도 차별의 세계에 놓인다는 말이다. 백퍼 한국인의 외모를 가진 아이들은 학교 생활이 힘들 수밖에 없다. 친해지고 나면 인종 간 심리적 거리가 줄어들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눈에는 늘 이방인. 그러니 오죽하랴.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부모를 증오하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 어쩌면 그 증오심이 삶의 버팀목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나나의 눈으로 천천히 짚어나가는 인물들의 역사는 슬프다. 그들은 착취당했고 당연히 힘도 없었으며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없었다. (이미 나온 '입양'이라는 단어 외에 소설 속의 여러 상황을 보여주는 단어들을 여기에 쓰면 그 단어들이 소설의 이미지를 규정지어버릴 것 같다...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글이 될 테지만 감수한다.) 

그래서 나는 '우주'의 존재를, 걱정한다. 그건 엄마가 될 '나나'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이 과연 둘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인지는... 모르겠다. 엄마조차 커버해 줄 수 없는 삶, 나나는 우주를 지켜보는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 한편으론 복희의 두번째 엄마 연희를 어느 정도 이해할 듯하다. 이방인을 만드는 재주들이 너무도 탁월한 사회를 나라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고난은 개인이 이겨내야 하는 것일까? 도망가서도 불행해야 하는 것일까?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계속 지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삶은 더 나았을까? 내가 도망친 게 아니라 등을 떠밀린 거라면, 어떤 삶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심'은 어디까지가 진심인가. 진심은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상처받기 싫고 불안하기 싫어서 덮어놓고 다른 색으로 칠해놓은 것을 진심이라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믿고 싶은 마음, 그것을 진심이라고 말하는 마음. 소설 속 여자들의 마음은 '단순한 진심'이었을까. 그들이 만드는 확대가족과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은 공감과 연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으나 그 이면에는 질투와 인정욕구, 욕망 등도 동시에 존재한다. 일관성 있게 착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이방인, 결국 장소가 어디냐의 문제는 아닐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생 최대의 난제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 여전히 어렵다. 그 뒤에, 거기에서 멀리 있는, 여자들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괴로움이 있든 없든 삶은 계속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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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3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이 소설 가뭇가뭇 하지만 많이 울면서 읽었던 기억은 나네요. 뭐랄까.. 의외의 정말 의외의 소설 이었어요!

난티나무 2021-12-23 15:47   좋아요 2 | URL
되게 어려운 소설이었어요. 죽죽 읽히는데 생각은 막 얽히고… 아, 작가의 말에 나온 책 사야 하는데!!! 아! 또 책 사는 이야기…로 넘어가면 안 되는데!!!!!^^;;;;;;

잠자냥 2021-12-23 15:52   좋아요 2 | URL
쟝쟝 증말 울었쪄? 나도 궁금하네.

라로 2021-12-2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읽고 싶게 만드시는 난티님!! 더불어 공쟝쟝님!! 하아~~~

난티나무 2021-12-28 04:30   좋아요 0 | URL
전자책 있죠 아마? ㅋㅋㅋㅋㅋ
 
제2의 성 2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95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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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열고 한참을 서성거린다. 희고 비어있는 공간, 어떤 글자들을 채워넣어야 할지 망설인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렇게 망설이다가 페이지를 닫았다. 안 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써야 한다,는 각오로 오늘도 페이지를 열고 한참을 서성거린다. 그동안 부분부분 부족하지만 페이퍼들을 썼으니 오늘은 책 전체에 대한 감상을 간략히 남기려 한다. 동서문화사의 <제 2의 성>은 1,2권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리뷰도 실은 2개를 써야 하는데 1권의 리뷰도 페이퍼들로 대신하기로 한다.^^;;; 


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자유로운가. 자유를 지향하며 살고 있는가. 자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인가. 존재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온몸으로 받고 온몸으로 겪고 온몸으로 답을 찾은 보부아르. 책을 읽는 내내 격정적으로 글을 써내려갔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느꼈다. 


1부는 솔직히 조금 지루(?)하기도 했다. 여자의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역사와 문화를 되짚어 밝혀내려는 작업이기에. 2부를 먼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듯하다. 실제로 1권과 2권을 들쳐본 페미니즘 초짜 옆지기는 2권부터 읽고 있다. (2권이 앞에 오면 더 좋았을 거라고.) 태어나서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 전체를 조망하면서 조목조목 따지고 비판하는 2부는 여자의 삶을 모르는 남자들에게도 훌륭한 안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읽고 생각한 만큼 옆지기가 읽고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슬며시 가져본다. 


"여자는 자기를 잃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자기를 잃어버린 상태로 있다." (879) 


너무 슬픈 말. 그런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서 더 슬프다.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잃느냐에 따라 여자들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일까. 잃어버려야 '함'을 알면서 동시에 잃어버리기를 거부하는 여자는 '모호성'이 더 증폭하는 것 같다. 정도의 차이들. 싫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헤매는 여자, 대충 끼워맞추고 잊어버리는 여자, 사소하게 언쟁하면서 스트레스를 축적하는 여자, 표출할 데가 없어 안으로 썩어가는 여자, 그래서 몸까지 아픈 여자, 들. 나, 나들. 수많은 나들. 

경제적 독립이 없이는 해방도 없다는 말에 무릎이 꺾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 해서 완전한 해방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에(이노므 사회!) 슬그머니 희망을 다시 손에 쥐어보고. 쥐락펴락하시는 보부아르님.^^ 


길고 긴 본문이 끝나고 이어지는 해설 또한 양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덕분에 갈피를 잃어 헤메는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간략하게 생애도 정리하고 있고 보부아르의 다른 저서들에 나타난 사상을 요약하고 있어서 도움이 된다.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을 것', '한 자리에서 썩어버리지 않을 것', '상대를 타자로서 인정할 것', '가치 있는 삶을 창조하기 위한 방법을 탐색할 것', '나만의 가치를 찾을 것', '존재로 존재하기'. 해설 부분을 읽으면서 건져올린 생각들.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 내 생각과 생활에 반영하지 않는다면 책을 읽은 보람이 사라진다. 슬슬 도망가고 싶어질 때 다시 이 책을 손에 들 수도 있겠다. 다른 책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언제든 그 때가 되면 보부아르의 견해를 조금은 비판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길게 자란 손톱이 키보드에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조금만 더 길면 두드리는 데 불편할 듯하다. 깎아야지, 다음 머리 감고 나서 잘라야지, 생각만 하면서 그 순간에도 보이지 않게 자라고 있을 손톱을 애써 무시한다. 아직 괜찮아, 아직은 걸리적거리지 않으니까, 곧 깎을 거니까. 마음에서 저도 모르게 솟아나는 '자유롭지 못한' 생각의 파편들, 삐죽삐죽 돋아나버린 열등감과 수동성, 끊임없이 자라는 내 손톱 같다. 적당한 때에 잘라주어야 하는 손톱마냥, 나를 부정하는 생각들을 잘라주어야지.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그렇게 나에게 손톱깎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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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1-01 0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부아르가 경제적 독립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는 게 정확한 지적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보부아르 결론 부분을 저도 좋아합니다.

제가 읽은 이번에 개정판 을유 제2의 성에서는 제2의 성 발표후 20년이 지나도 세상이 바뀌지 않아 보부아르가 급진적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부아르가 더 궁금해졌어요. 보부아르 전기를 시작으로 보부아르의 다른 책들을 계속 보려고 해요.

책 읽는 거 너무 좋아요, 난티나무 님.
:)

난티나무 2021-11-01 17:20   좋아요 0 | URL
우리는 모두 급진적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걸까요?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걸까요? ㅠㅠ 1949 - 1969 - 2021 바뀐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없지만 많이 바뀌었다고 할 수도 없는...
저도 전기 읽고 싶어져요. 다른 책들도요. 아 읽을 책이 많아랑~~~~~^^;;;;;; 깜냥은 안 되는데 가랑이 찢어질까 슬쩍 걱정되기도 합니다요.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11-0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문장 중에 879쪽 여자는 자기를 잃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이 문장 오늘 읽으니 엄청 가슴 아프게 읽히네요. 저도 정리해야 하는데 정리가 될지 모르겠어요. 함께 읽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11월 책도 같이 고고씽.

난티나무 2021-11-01 17:24   좋아요 0 | URL
ㅠㅠ 그쵸. 슬포..... (그래도 정리는 하셔야 합니데이.)
어제는 잠깐 무슨 프로그램 보는데 할머니들이 그림을 배우시더라고요. 지난 시절 잠깐 이야기하는데 저 분들도 다 잃어버리고 사셨구나, 그럼에도 얻은 건 무엇인가, 싶어서 같이 눙물이...ㅠㅠ
11월도!!!

단발머리 2021-11-0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 읽어서 너무 좋았어요, 난티나무님.
인용해주신 879쪽도 절절하고요.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게 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요. 수고많으셨어요,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1-11-01 17:27   좋아요 0 | URL
저도 여러분 덕분에 읽기를 마칠 수 있었어요~^^
계속 같이 읽어요!ㅎㅎ

막시무스 2021-11-0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통해서 여성의 역사를 알고 느낄수 있었던 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언급하신 자유에 대해 의미있는 고민을 해봤다는게 정말 좋았던것 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ㅎ

난티나무 2021-11-01 17:29   좋아요 1 | URL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죠. 막시무스님도 애쓰셨어요. 그리고 정말 잘 읽으셨어요~!^^

라로 2021-11-0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이 페이퍼와 지금 제가 읽고 있는 보부아르의 전기가 어떤지 맞물리면서 저도 곧 제2의 성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문단 비유 넘 좋아요!! 짱이에요, 난티님!!^^

난티나무 2021-11-01 17:31   좋아요 0 | URL
저도 나중에 전기 읽어보려고요.^^ 사르트르 이야기 좀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안 나올 수는 없고 참.ㅎㅎㅎ 손톱깎이!!! 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1-11-0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분과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어 더 값진 시간이시겠습니다.저도 마지막 문단!!!!
앞으로 손톱 깎을 때마다 난티나무님의 글을 떠올리게 될 듯 합니다.
부정적 생각들을 정리를 잘하고 사는 삶도 발전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여성들이 좀 더 지혜롭고 자유로운 세상이 왔으면 싶네요~
난티나무님의 생각들도 늘 곱씹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난티나무 2021-11-01 17:41   좋아요 1 | URL
악 어쩌죠. 손톱...ㅎㅎㅎㅎㅎ
남편과는 가끔 도란도란 자주 티격태격 때로는 침묵이...ㅋㅋㅋㅋㅋㅋ 에려워요.^^;;;
자만도 안 될 일이지만 자기비하도 안 될 일이니 늘 그 사이에서 중심 잡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실제로는 자주 비하 쪽에 서는 거 같아요. 내가 무슨, 내가 뭐라고, 왜 그랬을까, 이런 생각들 말이죠.
이번에 책읽는나무님과 따로 또 함께 읽어서 좋았습니다. 댓글은 못 남겼지만...^^;; 앞으로 노력해야 겠다고 또 슬쩍 다짐해 보아요.
 
세미나책 - 세미나 시작부터 발제문 쓰기까지, 인문학공부 함께하기
정승연 지음 / 봄날의박씨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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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성격(혹은 성향)을 한두 마디 단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닫는다. 나는 첫만남에 무척 긴장을 하고 낯을 가리지만 일단 친해지고 나면 때때로 걷잡을 수 없이 말이 흘러나와 내가 나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태도 발생한다. 그럴 땐 꼭 실수를 해서 밤마다 이불킥을 한다. 이런 실수를 쿨!하게 넘겨야 하는데 그걸 여적 못해서 끌어안고 산다. 때로는 엄청 소극적이면서도 또 어떤 때엔 적극적으로 보이는 때도 있다. 지금은 내 성격을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성격, 그 중 공부에 대해 아니 독서에 대한 나의 성격을 생각한다. 

그동안 책을 헛읽었다,는 생각은 작년부터 들었다. 학교를 다닐 때나 어학원을 다닐 때처럼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해야만 했던 때를 제외하면 어려운 책을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돌이켜보면 드문드문이라도 무언가를 쓰기는 썼다. 읽었고 썼지만 제대로 한 적이 거의 없다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평가한다. 글자들을 뛰어넘고 속독을 하는 버릇도 이제야 얼추 고쳤다. (페미니즘 책들이 나에게 준 또다른 선물!) 조금씩 어려운 책을 접하게 되고, 읽고 난 후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써내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런 만큼 책 읽기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바람은 커지고(잘 읽어야 잘 쓸 수 있으니까), 뭔가 치열하게(이런 모호함이라니) 독서모임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다. 블로그 이웃의 글에서 이 책을 보고 도움이 될 것 같아 바로 구입했다. (공부하기는 싫어하면서 열공하는 모임을 하고 싶다는 열망(?)은 왜 생기는 것인지. 그러니까 내 독서 성향도 역시 한가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다른 탐구 대상이다. 모순이야 모순.) 


세미나,라는 단어는 친숙하다. 내가 해본 적은 없어도 들어본 적은 많다. 주로 학자들과 넓은 강당이 떠오르는 것은 드라마 때문이겠지만. 세미나가 뭐하자는 것인지도 이제야 알게 된 걸 보면 내 삶은 정말 세미나란 녀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런 웅장하고 엄숙한 대규모 세미나가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세미나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이제야 안다. 실제로 이름을 붙이지 않아 그렇지 생활 속에서 세미나 비슷한 걸 해본 경험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말이 길었다. 그러니까 나도 세미나 할 수 있다, 이 말이다. 독서모임에서도 가능하다, 이 말이다. <세미나책>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책을 제대로, 깊이 읽고 싶다고? 그럼 일단 '잘'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글을 쓰고 토론을 해. 그럴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거야. 라고 쓰니 식상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구체적인 방법을 여기 다 쓸 수도 없고 그러면 스포일러 되니까 안 하겠다. 이런 말 나도 하겠네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이 다 책을 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ㅎㅎ (간혹 정말정말로 이런 책은 #@!#$#!&#^&***((^$#$%%  싶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그런 책들 다들 보신 적 있죠?) 


내가 궁금했던 혹은 잘하고 싶었던 것은 '발제문' 쓰기다. 책을 읽고 글을 쓰려면 질문을 떠올려야 하는데 그 질문이 늘 1차원적이라 조바심이 났다. 물론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는 1차원적 질문밖에 할 수 없다. 그러니 결국 늘 결론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읽어라. 많이 읽어라. 깊이있게 읽어라.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책을 통해 힌트를 얻는다. 독서와 글쓰기 책들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혼자 책을 읽기만 해서는 발전이 없거나 느리다는 것. 예전에는 혼자 읽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싶었다. 이젠 발전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마침 다정한 이웃님이 강독(형식의) 모임을 권유하셔서, 하고 있는 다른 독서모임들도 있는데, 덥석 손을 잡았다. 앞에서 성격 이야기를 했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컴퓨터 카메라를 켜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엄청난 도전이기도 하다. 음독으로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 역시 나에게 없는 경험이다. 강독 형식의 세미나가 읽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책에 나온다. 다양하게 책을 읽는 방법을 탐구하기에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또 만나게 되는 행복은 당연히 함께 온다.) 


발제문으로 시작해서 모임 이야기로 끝날 뻔 했다. 그러니까 발제문. 며칠 전에 학술 회의를 줌으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세미나책> 을 실전 영상으로 보는 것 같았다! 논문을 쓴 교수님들이 내용 발표를 하고 그 논문을 미리 읽은 또다른 교수님들이 발제문을 준비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한정된 시간 탓에 빠듯하게 진행이 되긴 했지만 발제문은 저렇게 쓰는 것이구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당장 읽은 책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나는 발제문을 쓰게 되려면 엄청나게 연습을 해야 겠구나,도 싶었다. 그러나 좌절하지는 않으련다. 누구나 처음은 있다. 책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질문하라고. 원래 세미나는 내가 깨지려고 하는 거라고. 그걸 통해 배울 수 있는 거라고. 맞는 말씀. 창피해하면 배울 수 없다. 


" '나는 잘 모르겠다'는 말이라도 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모르겠다는 말을 붙여 가면 되니까요. 더 나아가서 이해가 안 가는 이유까지 설명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무엇을, 왜, 어떻게 '모르겠다'는 진술 자체가 세미나에서는 아주 중요한 발언이 됩니다. 세미나 팀원 전체가 달라붙을 만한 '문제'를 던지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입을 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할 말을 못 찾겠어서 입을 열 수 없다면 '할 말'을 찾지 마시고, '모르겠다' 싶은 문제를 찾으시면 됩니다. 전체를 다 모르겠다 싶으면 그중에서 특히 더 모르겠는 걸 찾아야 합니다. 어떤 걸 모르는지 모르겠다 싶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알겠다 싶은 걸 찾아야 합니다. 거기가 출발점입니다." (171) 


(위 구절을 치다 보니 문득,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가 있을 때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할 말을 못 찾겠어서 정적이 흐를 때의 난감함,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일 때의 조급함, 그럴 때 있지 않나 왜. 실전에 응용해 봐야 하겠다.) 


세미나를 잘 하는 법, 질문하는 법, 준비하고 진행하는 법, 유의점 등등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말도 하는 이 책은(가만 책이 말을 하는 것인가?) 그래서 한편으로 위로가 되기도 한다. 다만 "공부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실전 응용. 모르겠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기) 인생 공부를 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게 또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 않나? 지금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릴 시간이 내게는 있다. 누군가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을 수 있다. 그리고 간혹 비문은 아닌데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드는 문장들이 있(는 듯하)다. 딱히 잘못된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별 하나를 뺀다. - 그래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 


읽고 있는 어려운 책 중 하나인 우에노 지즈코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오늘 아침에 펼쳤다. 와 어렵다.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싶다. 아무래도 지금은 아닌 것 같아, 포기하고 그냥 글자만 읽을까 까지도 생각하다가 모르는 것 질문하기, 질문에 질문을 덧붙여 나가기, <세미나책>의 이런 말들을 떠올리며 꾸역꾸역 다시 글자들을 읽었다. (책에서 권하는 '목차 쓰기'도 제까닥 해보았다.) 다음번에 다시 읽을 때 분명 나는 더 잘 이해하게 될 거야 최면을 걸며, 지금 안 되면 다음에, 다음에 안 되면 또 그 다음에. 


*사족 : 제까닥,이라고 쓰면서 맞춤법 맞나 검색했더니 '제꺼덕'의 북한어,라고 나온다. '제꺼덕'이라고 써야 하나 보다. 몰랐다.^^;; (+ '제꺼덕'과 '재까닥' 둘 다 표준어라고 한다.) 


"읽은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입으로 말할 때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아마 ‘말‘로 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도 자기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걸 깨달을 수 없었을 겁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의 말로 읽은 것을 다시 전달하면서 알지 못했던 것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불균형은 바로 이어지는 다른 사람과의 토론 속에서 어느 정도 해소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해소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이 어디서 막혔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지요. 바로 그게 공부의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 P66

"세미나를 한다는 건 그동안 읽어 왔던 ‘책‘을 ‘텍스트‘로 바꾸는 것이고, ‘독자‘였던 자신을 ‘해석자‘로 바꾸는 겁니다. 능동적 읽기인 셈이죠." - P98

" ‘세미나‘는 결국 ‘질문‘에 ‘질문‘을 덧붙여 나가는 공부 형식입니다." - P176

"사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어떤 텍스트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렇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지식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공부‘가 단지 아는 것을 쌓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을 늘려 가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말하기가 어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느는 것도 분명히 있는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훨씬 정교해진다는 점입니다. 당연합니다. 세미나를 통해서 내 말의 한계를 지속적으로 실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말이 닿을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점점 더 잘 알게 됩니다. 그걸 보면 모든 인문학 공부는 결국 자신에 대한 공부로 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더 많이, 더 자주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자신의 무지가 매우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 P178

"그렇게 보면 누가 나보다 더 잘 알고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점에서 그의 ‘해석‘이 좀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뿐이니까요. 공부는 보다 넓고 긴 지평에서 보면 그와 나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물론 그 시점에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요.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모두 ‘공부‘ 앞에 평등합니다. 저마다 조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에는 우리 모두, 역사상의 유명한 사상가, 철학자들까지 포함한 우리 모두, 결국에는 이 세계와 이 세계 안에서의 삶을 배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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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27 02: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난티님!! 나도 난티님하고 같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 되었지만,, 흑흑
근데요, 사람의 성격을 몇 마디로 말하기 힘든 건 사실인데, 지금까지 양파처럼 하나하나 보게 되는 난티님의 성격(?)은 제게 아주 가깝게 느껴져요. 좋아요. 하핫(저처럼 말 못하고 일차원적 적인 사람 또 못 보셨죠???😅😅😅)

난티나무 2021-10-27 03:59   좋아요 2 | URL
멋진 라로님이 멋지다고 말씀해주시니 저도 끝갈 데 없이 좋은 이 마음~ 샬랄랑~~~~~ㅎㅎㅎㅎ
양파 같다고 하시니 (양파 좋아요!) 다 까고 아무것도 안 남지 않도록 발 밑에 흙을 잘 깔아두어야 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헤헷~

다락방 2021-10-27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학창시절 공부를 되게 안하고 못했거든요. 공부 잘하는 사람 너무 멋져! 하고 동경하였지만 제가 공부를 하진 않았어요. 저는 왜그렇게 공부를 안한건지.. 그시절 어른들이 공부도 때가 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라고 말할 때 귓등으로도 안들었는데, 아아, 저는 몰랐습니다. 제가 삼십대 중반이 되어 페미니즘 책 파고들고 강연 찾아 들으러 다닐지는요. 그렇게 열심히 읽고 듣고 다니면서 와, 학교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내 학력이 바뀌었을텐데...라는 생각을 수천번 했어요. 더불어, 공부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지 않나 싶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사람이 인생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총량이 있는데 제 경우엔 10대 20대에 그걸 안해가지고 30대부터 미친듯이 쏟아붓게 된거죠. 어쨌든 제 삶에서 공부의 양은 주어져 있으니까요.

저는 난티나무 님의 어린시절도 학창시절도 알지 못하고, 사실 이렇게 알라딘에서 뵙는게 전부라 아는 게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있을텐데, 지금 제가 이렇게 보는 난티나무 님은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공부하실 것 같아요. 제 경우가 공부총량의 법칙이 작용한 것이라면 난티나무 님의 경우는 공부에 재미를 붙이신 것 같달까요.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재미를 붙이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하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계속 읽고 쓰고 다양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난티나무 님을 이자리에서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난티나무 2021-10-27 18:20   좋아요 0 | URL
우왓 페이퍼급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공부를 잘 하고 싶었지만 잘 하지 못했습니다. 켁. 방법을 몰랐어요. 지금도 모르긴 하지만. 필요성은 완전 느끼는데 말이죠, 문제는 제가 공부란 걸 하기 싫어한다는...ㅠㅠ 책은 계속 읽을 것 같은데 그 안에서 뻗어나가는 여러 가지의 철학이나 정치학이나 역사나 기타등등 알아야 하는 것들 있잖아요? 그런 공부를 하게 될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락방님 댓글을 읽으면서 진짜 내가 공부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흉내를 내고 싶어하는 건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보부아르님도 ‘해방‘ 부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던데 이거 내 이야기 아닌가 싶어 찔리기도 했고요. 좀더 탐구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하하.
지금이 공부할 때다, 라는 말을 저도 제 아이들에게 하는데... 하아... 그걸 모르는 게 10~20대인 걸까요? 느무 안 하는 거죠.ㅠㅠ 어쩌면 그 나이는 공부하기에는 너무 어린 게 아닐까요? 30대 들어서야 뭔가 공부라는 걸 느끼면서 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런 생각이 막 드네요.ㅎㅎㅎ 뭐 지금의 나도 하기 싫은 공부가 아이들에게는 오죽하겠습니까. ^^;;;;;;;

수이 2021-10-2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냥 찰싹 언니 곁에 달라붙어서 놀래요.

난티나무 2021-10-27 18:22   좋아요 0 | URL
같이 ‘놀자‘! ㅋㅋㅋ 놀면서 공부하는 방법 좀 연구해 봅시다.ㅎㅎㅎㅎㅎ
 
[전자책]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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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용 요약 없는 감상문.


최은영 소설만 읽으면 우는데 어김없이 이번 소설도 그렇다. 시작은 8% 지점, 할머니와의 재회 장면이다. 딱히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무덤덤한 만남, 그 무덤덤함 속에 깔린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장편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넘어가는 페이지와 함께 나는 계속 눈물을 흘린다. 이른 아침 일어나지 않은 채 책을 읽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다. 눈물을 닦다가 페이지를 넘기고 눈물을 흘리고 손으로 닦고, 페이지를 넘기고. 그렇게 끝까지. 


어째서 이 여자들은 이렇게 정이 넘쳐 흘러서. 어째서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옛날에도 지금에도. 남자들이 없는 세상, 존재하지만 다른 세상에 서 있는 남자들. 고되고 슬픈 삶을 사는 여자들. 풀어내지 못한 감정들. 서로를 알아서, 알아봐서, 고통스럽지만 서로를 끌어안는 여자들. 어쩌자고. 어쩌자고 이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그러나 그런 연대도 실은 기만이 어느 정도 깔린 것은 아닌가, 문득. 혈연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 관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납득해보려고 발버둥친 결과는 아닌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그 거리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혹은 거리 따위 개나 줘버려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여자는 여자가, 여자를 여자가, 다독이고 쓸어주고 안아주고 그래야 하는지. 그걸 제대로 못하는 여자는 또 어찌해야 하는지. 어째서 남자는 늘 없는지. 없어도 괜찮은지. 차라리 없는 게 나은지. 


엄마의 엄마의 엄마... 요즘 읽는 페미니즘 책들에도 그렇고 연달아 읽은 소설들에도 그렇고 엄마, 딸, 할머니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그 사이에는 죽음이 있다. 가끔 생각한다.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보고 싶다고,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있을 때 잘하라고 하는데. 나는, 나도 그런 말 하게 될까. 엄마 보고 싶다고 울까. 솔직히 지금으로선 장담하지 못하겠다. 때론 나라는 인간이 한없이 냉정하구나 싶기도 하다. 어쩌면 혼란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후회가 되는 것은, 엄마나 할머니와 나눈 대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조금은 기억의 조작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을 지워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신기하리만치 남아있는 기억이 없다. 어쨌든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고 기억한다. 할머니는 너무 먼 곳에 살았고 이젠 세상에 없다. 엄마도 멀리 살았고 지금도 멀리 산다. 이젠 만나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야지. 어릴 땐 어땠는지, 할머니는 어땠는지, 결혼하면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어릴 땐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엄마가 기억하는 엄마를 이야기해 달라고 해야지. 그러면 엄마의 기억 속에서 나를 얼마쯤은 건져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이기적인 딸의 속마음. 엄마도 엄마를 얼마간은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화. 다만 감정적으로 싸우지 말 것. 더이상의 상처는 반사. 


100자평에 썼지만 마지막에 나에게 떠오른 말은 "우리들의 밝은 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밤은 밝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는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 

(밑줄긋기를 앞부분밖에 하지 못했다. 빌린 책은 이미 반납했다. 뒷부분은 이야기에 빠져 읽었나 보다.) 

"난 혼자가 편해."
내가 엄마에게 해줄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엄마가 온전히 내 편을 들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리라는 희망 같은 것을 나는 포기했다. 그와 이혼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가 입은 상처보다도 이혼당하고 혼자가 될 사위를 신경썼다.
‘나는 너는 걱정이 안 돼. 그런데 그 약한 애가 나중에 자살이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7%

"아빠는 너 이혼한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하더라."
엄마가 무심하게 말했다.
"자기 딸이 쪽팔리는가 보지."
"그래도 너희 아빠 같은 사람이 없어."
"그래?"
"아무리 그래도 아빠는 아빠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 김서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라.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아.’ 이혼을 결심한 내게 아빠가 한 말이었다. 나보다 사위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아빠의 모습은 별로 놀라운 게 아니었다. 아빠가 내 편이 되어주리라는 기대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8%

"어떤 분이셨어요?"
"누구? 우리 엄마?"
"네."
할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에 내내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냥……"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봤다. "보고 싶지."
할머니는 내가 마치 할머니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입가에 힘을 줘서 웃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 11%

그 말에 군인 둘이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남편이 없는 여자아이를 원하는 거였다. 그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도 군인들이 혼인하지 않은 여자아이들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부모들은 고작 아홉 살, 열 살밖에 안 된 딸들을 흔인시켰다. 그게 딸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에게 ‘주인‘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 13%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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