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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 여성 철강 노동자가 경험한 두 개의 미국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12월
평점 :
대체로 슥슥 읽히는 이 책이 마냥 잘 읽힌다고만은 할 수 없다. 노동의 세계가 어떤지, 지금 이 거대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위치와 역할이 어떠한지, 애초에 이 사회에서 노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내가 하고 있는 노동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해본 적이 있다면,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 제철소의 노동이란 이렇구나, 하고 넘겨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이라는 두 글자에 얽히고설킨 문제들, 자본과 불평등과 젠더와 정체성과 폭력, 어느 것 하나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는 문제들이 이리저리 흩어져있다가 모이기도 하다가 겹치고 떨어지고를 반복하며 일상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고, 책의 이야기에 내 그런 일상이 겹쳐져 보이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은 그냥 읽지 않는다. 나는 나를 생각하고 대입도 해보고 감정이입도 하고 문제를 끌어다 내 경우에 맞춰보기도 하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다른 생각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냥 에세이야, 하고 말 책일 수도 있는 걸, 나는 내 '임금노동' 혹은 '돈이 되는' 노동에 대해 생각하느라 책을 읽은 직후에 리뷰를 쓸 수가 없었다. 아 물론 오래 묵혔다고 해서 그 생각들이 쨘 하고 글자들로 정리되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다. 그저, 그랬다는 말이다. 동시에 그 '돈이 되는' 노동에 대해 고심하느라 글로 정리할 (마음의) 여유 또한 없었다는 말도 된다.
'경제적 독립'이 중요하다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고, 많은 사람들이(책에서도) 말한다. 맞는 말이다. 독립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것만큼 독야청청 독립하는 일이 인간 생에서 가능하기나 할까 하는 물음은 차치하고. 문제는 사회의 '이렇게 생겨먹음'이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어떤 모양의 어떤 식의 독립이 진정한 경제적 독립인가. 쳇바퀴에 올라서서 열심히 페달을 꼬박꼬박 밟거나 쳇바퀴에서 내려와 다른 모양의 페달을 열심히 꼬박꼬박 밟거나, 그게 선택이라고 한다면 뭐 그렇다고 치자. 올라서거나 내려서거나,가 여성(나)에게 열려있는가? 오랜 경력단절이 경력인 여성(나)에게 어떤 '임금노동'이 주어지는가? 주어진다,는 표현이 거슬린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쟁취,해야 하는 것인가. 역시 '노오력'밖에 없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환상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그렇게 말을 했다. 돈이 없으면 밖에 나가 뭐라도 해야지. '몸을 쓰는' 노동이라도 해야지. 실제로는 그 '몸을 쓰는' 노동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는 걸, 가장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세상 가치 없다고 후려쳐지는 '비임금노동', 주로 여성이 집에서 하는 모든 일들도 그렇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장 덜 중요한 자리에 놓고 살아간다. (자리조차 없을 때가 많다.)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음'에는 내 이런 태도와 생각도 한몫 하고 있다. 몸을 쓰는 임금노동은 하고 싶지 않은 일, 꺼려하는 일, 저평가되고 스스로 저평가하는 일, 할 일이 없을(?) 때 하게 되는 일, 모두가 기피하는 일... 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로 다시 '이렇게 생겨먹음'을 재생산한다. 그러니 몸을 쓰는 노동(이라는 말도 웃기지만. 몸을 쓰지 않고 하는 노동이 어디 있단 말이야.)은 하찮지 않다, 위대하다, 가치있다, 고 외치면서 자기 최면을 거는 내가 환상 속에 살고 있는 거지. 최면을 걸어야 할 정도로 익숙한 세상의 관습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거지.
이 책의 저자는 병력을 갖고 있다. 제철소 이야기만 주구장창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람은 한가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므로) 저자의 양극성 장애 이야기도 생활을 따라 이어진다. 곁의 사람 이야기도. 뭐랄까, 함께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이 자연스레 떠오른달까. <일할 자격>. 의사의 진단을 받지 않아도 여러 가지 장애나 병의 증상들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진단을 받은 사람은 '일할 자격'이 없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일할 자격'을 박탈당하지는 않는다. 무슨 차이일까. 여성이라 제철소에서 일하기 힘들 거야, 하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 차별. 쟨 좀 이상한 애야, 와 쟨 양극성 장애 환자래, 사이의 간극. 사회적 시선과 혐오와 구분. 부분의 일반화. 그리고, 내가 온전히 내 모습으로만 임할 수 없는 환경, 가면을 쓰거나 그 집단에 걸맞는 언행을 보여주어야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형태, 같은 것이 좀 역겨웠다. 그래야 버틸 수 있고 계속 일할 수 있는 거야, 세상은 '이렇게 생겨먹'었으니까. (아무래도 난 거기가 어디든 취직은 못하겠군.) "일할 자격"은 사회가 부여한다. 이걸 바꾸어야 하기는 하겠으나, 바꾸어서 쳇바퀴에 올라가는 일이 바람직하다고는 말 못하겠다. 적어도 지금 이 사회의 구조 속에서는. 더군다나 그 쳇바퀴라는 것도 해체되고 있는 와중에 '노동'은 점점 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겨진다. 계약직, 임시직을 넘어 초미세(마이크로)노동이 등장한 지 오래다. 첨단기술의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의 노동. 이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한번 짓게 되는 또하나의 사실이 있다. 책날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저자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는 백인 여성이다. 과정이 힘들긴 했지만 석사 학위도 땄고 제철소 경험은 3년 남짓이라고 한다. 개인이 얼마나 힘들었는가와 상관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후려치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가 흑인 여성이었다면? 아시아 여성이었다면? 이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네. 그럼과 동시에, 그래서 너는 이 책을 흑인 여성이 썼다면, 아시아 여성이 썼다면, 20년 노동한 사람이 썼다면, 그러면 만족할 텐가, 싶기도 하다. 독자의 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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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너모를 보면 클리블랜드가 생각난다고 샘과 찰리에게 말했을 때 그의 이야기에서 복수심과 관련된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 깊이 다이너모가 그 이상이란 걸 알았다. 그는 끔찍한 실패로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걸 지켜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만들었다. 또 계속 베풀었다. 또 계속 모형 차를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더 중요하게 그는 공갈꾼 몇이 열정을 앗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를 클리블랜드로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러스트벨트에서의 삶과 노동이 의미하는 바였고 트럼프가 우리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바였다. 트럼프는 우리의 회복력을 보는 대신 우리를 찌부러뜨려 최악의 면을 도드라지게 했다. 그는 산업노동자를 몰락한 자로 여겼고 몰락이 우리의 유일한 정체성이라고 우리 스스로 믿게 했다. 그는 우리의 불안을 감출 수 있는 희생양과 분노의 대상을 제공했고, 그로써 그가 더 큰 권력을 탐하는 또 한명의 부유한 권력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못 보게 했다. 그는 우리에게 복수심을 불어넣었고 우리의 분노를 부추겼다. 그는 우리 마음속의 선을 훼손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지키기 위해 싸우는 그 모든 것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그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 P190
⎾ 자기 몸에 대한 여성의 생각은 불신되기 일쑤였다. 여성은 신체적 증상에 항불안제를 더 많이 처방받았고 심근경색 증상이 나타나는데도 스트레스 검사를 더 적게 받았다. 극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을 찾았을 때도 진통제를 받으려면-만일 진통제를 받는다면- 남성환자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했다. 상당수의 여성은 증상을 입증하기 위해 남자 친구나 남편, 아들을 동반한 채 의사를 보러 갔고 심장병이나 뇌졸중같이 심각한 질병이 있는데도 오진되는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평등은 아빠가 입에 올리고 싶은 토론 주제가 아니었다. 평등은 남근과 질이 같은지를 따지는 논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육체가 생물학적 성과 젠더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 P215
⎾ 이제껏 살면서 본래의 나의 모습과 내가 원하는 모습, 남자들이내게 원하는 모습, 그리고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 사이에 끼여 수없이 갈등을 해왔던 것 같다. 이 혼돈의 와중에 정작 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은 쉽게 간과했다. 때로 성차별의 영향은 괴롭힘이나 학대만큼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때로 그것은 충족할 수 없이 상충되는 기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 P234
⎾ 병실 앞에서 그가 부르던 장송곡을 떠올리고는 노래 부를 때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음악이 있을 때는 늘 말이 술술 나왔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를 때도 말을 더듬지 않았고 레드핫칠리페퍼스의 노래를 부를 때도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그를 보고 재빨리 웃어보였지만 목울대가 울컥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울지 않으려고 커피를 들고 수선을 떨었다. 크림을 더 섞고 설탕도 더 섞었다. 블랙커피 색이 점차 밝아지는 걸 지켜보면서 며칠 전에 간호사가 한 말을 생각했다. 적어도 저 남자 같지는 않잖아요. 어쩌면 간호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 아저씨 같지는 않을 것이다. 몇 달 동안 하는 일마다 엉망으로 꼬이는 바람에 나는 상황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의지마저 잃었다. 이 나라가 끔찍하다고-갇힌 기분이라고- 정신과 의사에게 말했을 때 나는 몇년 동안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란 생각을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고 무기력함을 느꼈다. 변화를 향한 나의 꿈은 헛되고 무익해 보였다. 미국은 약한 것들을 무자비하게 뭉개버리는 기어였지만, 나를 꾸짖은 정신과 의사는 옳았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미국을 전연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미국은 이민자가 의사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나라였다. 이곳은 망명과 기회의 나라였다. 거대한 실험, 세계제일의 나라. 그곳에는 자체의 결점이 있고 그것도 치명적인 결점이 대부분이지만, 절망은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말을 더듬는 아저씨가 그 증거였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키울 수 있었지만 지독한 패배감에 젖거나 자기감정에 몰입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안고 있지만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기댈 수 없었던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말을 앗아간 폭력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고통은 냉소를 키우는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방패처럼 들지 않았고 그 압력 아래에서 무너지지도 않았다. 삶은 그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목소리를 주었으므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 - P356~7
⎾ 리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리아와 함께 파란 쓰레기통을 맞잡고 바깥으로 나가자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용광로의 푸른 불꽃이 저 멀리서 타오르고 제철소가 우리 앞에 아득히 펼쳐졌다. 힘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이곳은 늘 상기하게 했다. 힘은 모든 것을 찢어발길 수 있는 한편, 강하고 탄탄한 것도 부드럽게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만사가 잘되길 기대하면서 수동적으로 서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발을 땅에 단단히 내딛고 통제하지 않으면 작은 흔들림에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 ⏌- P367
⎾ 어린 시절에 들은 온갖 상투적인 말이 일시에 떠올랐다. 꿈꾸면 이룰 수 있어! 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특별한 꽃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쩌면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는 이 빌어먹을 특별하다는 감정에 매료된 나머지, 나라를 온통 집어삼킨 개인주의의 유독성에 눈을 감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독선과 거만, 개인적 쾌락, 개인적 이야기, 개인적 믿음, 개인적 자만에 꼼짝없이 예속되어 눈가리개를 한 채 이데올로기에 매달리기를 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선호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면을 존중하지 않아도 되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룰 필요도 없으며, 우리의 현실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부정하는 것들이라면 제거하고 무시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선호했다. 공동체 대신에 열차 사고와 재앙과 스캔들을 추구했다.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한다면 그 어떤 것도 갈망했다.우리의 실제 모습―때론 혼란스럽고 따분한-을 직시하는 것보다 오락거리가 더 쉬웠기 때문이다. ⏌- P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