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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이연 지음 / 미술문화 / 2021년 3월
평점 :
가만히 생각한다. 나는 그림을 정말 좋아했을까. 내가 정말 좋아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좋아하는 것을 찾지도 못하고 그만 이 나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둥둥.
중고등학교 시절에 어렴풋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단 한번 고등학교 어느 날 점심시간 연습장과 연필을 들고 나가 휴게매점 등나무를 그린 적이 있다. 단 한번.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을 시선을 무척이나 의식했고 그 이후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가난했고 집도 가난했다. 그림은 돈이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시작도 안 하고 지레 포기했다. 미술을 하면 아마 엄청 잘했을 텐데,라고만 말해왔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그림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열망이었을까.
결혼을 하고 프랑스에 와서 첫아이를 낳고, 그림을 배웠다. 9개월동안 그렸지만 처음 배우는 그림을, 꼬물대는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뭘 얼마나 했겠나. 그럼에도 옆지기와 함께 미술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겁이 없었네. (지금 하라면 안 할 것 같다.) 사는 도시와 옆도시의 두 학교에서 면접을 보고 실기시험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그림은 말로 하는 거구나. 선을 하나 대충 그어놓았어도 그걸 말로 잘 표현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선을 그은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었다. 어학 1년 왕초보 실력으로는 당연히 잘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림이 절실하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학교를 가든 안 가든 계속 그리고 있었겠지. 15분여 주어진 포트폴리오 설명 시간에 면접관 앞에서 긴장한 나는 떠듬떠듬 짧은 설명을 단 5분만에 끝내버렸고 면접관들은 언어가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겁 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에는 이렇게 그려라 저렇게 그려라가 없다. 이러면 안 돼 저러면 안 돼도 없다. 앞부분을 읽으면서 이건 일종의 자기계발서와 같구나 생각했다. 그림 대신 인생을 넣어도 말이 되고 글을 넣어도 말이 되고 다른 무엇을 넣어도 말이 되었다. 작가도 같은 말을 한다. 다 비슷한 거구나. 자기계발서라 하면 일단 식상한 말들과 뻔한 안내와 같은 말 반복, 보나마나한 방법들 일색인 책이 많아서 시간이 아깝다 여길 때가 있다. 이 책에는 그런 말들이 적다. 물론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한 문장들은 아니다. 확실히 그건 아닌데, 동어반복도 많고 정말 쉽고 술술 읽히는 문장들인데, 그런데 책장을 넘기기가 아깝다. 아까워서 덮어놓고 아까워서 일부러 안 읽고, 작고 얇은 책을 아껴 읽었다. 이거 뭐 다 뻔한 소리 아니야,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될 지 모르겠다. 아니 내가 생각하는 만큼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본 만큼, 겪은 만큼, 생각한 만큼, 책 속의 글자들은 내게 다가온다. 그림 뿐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그 무엇이라도, 해야 겠다는 뽐뿌가 이는 책. 사실 앞부분 읽을 때 스케치북과 연필을 집어들고 싶은 욕망을 느꼈는데 몇 장 더 읽는 사이 그만 사그라들었다. 내 욕망의 크기는 딱 그만큼. 어쩌면 나의 욕망들도 폭발하기 전에 알아서 스르르 사그러들도록 사회화된 게 아닐까 무척 의심스러워지는 지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귀찮음이 모든 욕망을 이겨버리는 성격이던지.) 왜? 나는 미치도록 좋아하는 게 없을까? 이것도 조금 좋고 저것도 조금 좋고 그것도 조금 좋아서 조금씩 잘 하지만 뛰어나게 잘 하는 건 없을까? 해보고 싶은 게 없을까? 나는 왜 이럴까?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하지 않을까? 왜 계속 하지 않을까? 미리 포기하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틀릴까 봐 내뱉지 못한다. 당연히 내뱉지 않기 때문에 실력 또한 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분, 창피를 너무 기피하기만 하면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략) 난 당신이 겪은 창피는... 글쎄, 아직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잘할 만큼 연습하지도, 충분히 창피하지도 않았다. 창피가 반복되면 의외로 무뎌진다. 그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야 많이 했다고 할 수 있고, 그만큼 해야 그다음이 있다. 그림을 제외하고도 모든 분야에서의 성장이 전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만이 성숙해질 수 있다." (p.35)
엄마, 말을 해야 늘지, 프랑스말로 하자. 작은넘이 나에게 한번씩 하는 말이다. 으 프랑스어 너무 어려워, 공부해야 하는데, 내가 이런 잡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한다. 뼈때리게 맞는 말인데 뼈를 맞는 느낌이 들어도 안 한다. 그게 문제다. 항상 느꼈다. 어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도 좋은 머리도 아닌, 용기라고. 부끄러움을 디딜 수 있는 용기. 뼈아픈 말을 이연 작가도 하네.
"다만 여러분, 어떤 분야든 진지하게 시작한다면 전과 같지 않은 마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를테면 좋은 그림을 보고 순수하게 좋아할 수 없게 된다. 샘이 나고, 내 그림이 부끄러워지고, 막막해지는 기분마저 들어 마음이 복잡하다. 나는 좋아하는 작가가 있냐는 질문에 몇 년째 대답을 못 하고 있다. 한 사람으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편히 좋아하기 어렵다는 것이 더 크다. 이것은 열등감의 여러 증상 중 하나다." (p.51)
아아 그러면 나는 열등감 덩어리인가 보다.ㅠㅠ
"그럼 무엇을 관찰해야 할까?
당신이 가장 관심 있는 대상을 관찰하길 바란다. 그래야 흥미 있게 지속할 수 있다. 관찰도 결국 훈련이고 습관이기 때문에 반복해야 잘할 수 있다.
(중략)
결국 스스로를 아는 일은 인간을 아는 일에 가깝다. 타인의 마음이 궁금하다면 우선 자신을 먼저 살필 것을 권하고 싶다." (p.83)
잘 하고 싶은 일, 바로 나를 아는 일. 어려워서 자꾸 헤매게 되는 일.
"개성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충분히 각자의 개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당신이 평범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자기 자신에게 씌우지 않기를 바란다. 평범한 사람은 없다. 조금만 꼼꼼히 살펴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다. 그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치부하지 말고 가까이 들여다보자. 그러면 그 안에 각자의 색이 있다. 어떤 색들이 있을까?" (p. 139)
평범,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편협하게 써왔나 돌아보게 되는 지점. 그 평범의 기준은 무엇이었나. ㅠㅠ
"그렇다면 의심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뉴스, 정치, 교육, 사회 문제? 아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런 것들은 이제 막 사유를 시작한 개인에게는 먼 일이다. 우선 자기 자신부터 의심해 봐야 한다. 나조차도 내가 모르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지고, 다른 현상에서도 이면을 볼 수 있게 된다. 방법은 간단하다. 이면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당신을 알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은 평생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타인을 전부 헤아릴 수 없다. 잠시만요, 지속적인 사고가 결국에 대상을 정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음... 쉽게 이야기를 하자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하는 일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해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대상을 이해하려고 애쓰게 된다." (p.170~171)
잠시만요.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맞죠? 철학책 아니죠? 책의 거의 대부분이 이렇다. 그러니 그림 그리는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수도. 그러나 나는 좋았다, 무척. 그렇군요. 그래서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알지만 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또 뼈때리네요.
보자르 시험을 보았던 그 해 이후로 제대로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제대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좋아하지 않는다고 계속 착각하는 중인지도. 하지만 인생은 예측 불가능이라 했다. 혹시 아는가. 80이 되어서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50에 접어들며 읽었던 이연의 책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이 많은 도움과 위안이 되었다고, 아마도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면서?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