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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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용 요약 없는 감상문.


최은영 소설만 읽으면 우는데 어김없이 이번 소설도 그렇다. 시작은 8% 지점, 할머니와의 재회 장면이다. 딱히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무덤덤한 만남, 그 무덤덤함 속에 깔린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장편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넘어가는 페이지와 함께 나는 계속 눈물을 흘린다. 이른 아침 일어나지 않은 채 책을 읽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다. 눈물을 닦다가 페이지를 넘기고 눈물을 흘리고 손으로 닦고, 페이지를 넘기고. 그렇게 끝까지. 


어째서 이 여자들은 이렇게 정이 넘쳐 흘러서. 어째서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옛날에도 지금에도. 남자들이 없는 세상, 존재하지만 다른 세상에 서 있는 남자들. 고되고 슬픈 삶을 사는 여자들. 풀어내지 못한 감정들. 서로를 알아서, 알아봐서, 고통스럽지만 서로를 끌어안는 여자들. 어쩌자고. 어쩌자고 이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그러나 그런 연대도 실은 기만이 어느 정도 깔린 것은 아닌가, 문득. 혈연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 관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납득해보려고 발버둥친 결과는 아닌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그 거리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혹은 거리 따위 개나 줘버려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여자는 여자가, 여자를 여자가, 다독이고 쓸어주고 안아주고 그래야 하는지. 그걸 제대로 못하는 여자는 또 어찌해야 하는지. 어째서 남자는 늘 없는지. 없어도 괜찮은지. 차라리 없는 게 나은지. 


엄마의 엄마의 엄마... 요즘 읽는 페미니즘 책들에도 그렇고 연달아 읽은 소설들에도 그렇고 엄마, 딸, 할머니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그 사이에는 죽음이 있다. 가끔 생각한다.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보고 싶다고,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있을 때 잘하라고 하는데. 나는, 나도 그런 말 하게 될까. 엄마 보고 싶다고 울까. 솔직히 지금으로선 장담하지 못하겠다. 때론 나라는 인간이 한없이 냉정하구나 싶기도 하다. 어쩌면 혼란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후회가 되는 것은, 엄마나 할머니와 나눈 대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조금은 기억의 조작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을 지워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신기하리만치 남아있는 기억이 없다. 어쨌든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고 기억한다. 할머니는 너무 먼 곳에 살았고 이젠 세상에 없다. 엄마도 멀리 살았고 지금도 멀리 산다. 이젠 만나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야지. 어릴 땐 어땠는지, 할머니는 어땠는지, 결혼하면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어릴 땐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엄마가 기억하는 엄마를 이야기해 달라고 해야지. 그러면 엄마의 기억 속에서 나를 얼마쯤은 건져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이기적인 딸의 속마음. 엄마도 엄마를 얼마간은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화. 다만 감정적으로 싸우지 말 것. 더이상의 상처는 반사. 


100자평에 썼지만 마지막에 나에게 떠오른 말은 "우리들의 밝은 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밤은 밝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는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 

(밑줄긋기를 앞부분밖에 하지 못했다. 빌린 책은 이미 반납했다. 뒷부분은 이야기에 빠져 읽었나 보다.) 

"난 혼자가 편해."
내가 엄마에게 해줄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엄마가 온전히 내 편을 들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리라는 희망 같은 것을 나는 포기했다. 그와 이혼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가 입은 상처보다도 이혼당하고 혼자가 될 사위를 신경썼다.
‘나는 너는 걱정이 안 돼. 그런데 그 약한 애가 나중에 자살이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7%

"아빠는 너 이혼한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하더라."
엄마가 무심하게 말했다.
"자기 딸이 쪽팔리는가 보지."
"그래도 너희 아빠 같은 사람이 없어."
"그래?"
"아무리 그래도 아빠는 아빠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 김서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라.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아.’ 이혼을 결심한 내게 아빠가 한 말이었다. 나보다 사위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아빠의 모습은 별로 놀라운 게 아니었다. 아빠가 내 편이 되어주리라는 기대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8%

"어떤 분이셨어요?"
"누구? 우리 엄마?"
"네."
할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에 내내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냥……"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봤다. "보고 싶지."
할머니는 내가 마치 할머니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입가에 힘을 줘서 웃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 11%

그 말에 군인 둘이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남편이 없는 여자아이를 원하는 거였다. 그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도 군인들이 혼인하지 않은 여자아이들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부모들은 고작 아홉 살, 열 살밖에 안 된 딸들을 흔인시켰다. 그게 딸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에게 ‘주인‘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 13%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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