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도 겨우 읽고 있는 요즘.  한겨레신문 정문태기자의 칼럼에 나온 숫자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뱅뱅 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719417.html

 

일부를 발췌하면,

 

'파리 희생자는 130명으로 늘었고 부상자만도 4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이 사건을 통해 그동안 폭력에 감춰져온 평등의 문제를 돌아볼 때가 아닌가 싶다.

.

.

.

.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테러에 맞선 전쟁을 선포한 미국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뒤부터 살해당한 민간인이 1만8000여명에 이른다. 지난 한 해만도 어린이 714명에다 여성 298명을 포함해 시민 3699명이 희생당했고 6849명이 중상을 입었다. 테러와의 전쟁에 휘말린 이웃 파키스탄에서는 같은 기간 시민 2만1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과 캐나다와 이라크 보건부 공동조사단에 따르면 2003년 미군의 제2차 이라크 침공 뒤 2015년까지 50만명을 웃도는 시민이 희생당했다. 리비아 보건부는 2011년 미군과 나토군의 리비아 공습 뒤부터 시민 3만여명이 살해당했다고 밝혔다. 시리아인권감시소(SOHR)는 미군과 그 동맹군이 시리아 전쟁에 개입하고부터 올 10월까지 4년 동안 최대 34만여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미국-사우디아라비아 다국적군이 8개월째 소리 없는 학살전을 벌여온 예멘에서는 시민 2700여명이 살해당했다. 이 모든 희생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이 그 동맹국들과 손잡고 저질러온 21세기 학살극의 결과였다. 그렇게 100만 시민이 학살당하는 동안에도 이 세상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100만 희생자들이 파리 시민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 100만 희생자들이 무슬림 시민이었고, 가난한 시민이었던 탓이다. 그 100만 희생자는 미국의 동맹국 시민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리하여 그 100만 시민 죽음들 앞에선 추모도 묵념도 없었다. 날뛰던 언론도 몸을 사렸다. 이게 정치, 경제, 종교, 인종적 차별로 일그러진 21세기판 평등의 실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 이런 기사를 옮기는 것 뿐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안녕하시냐, 는 안부인사 받는 것도 달갑지 않은 요즘이다. 한 게 뭐 있다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12-01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2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큰 일을 치렀습니다.

 

월요일(11월 9일)

가족과 떨어져 낯선 사람들의 간병을 받아가며 4년간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별세하셨습니다. 3학년 학기말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는데 3교시 감독을 끝내고 잠시 자리에 돌아와보니 전화가 여러통 와있었습니다. 확인해보니 좀 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였지요. 잠시 우왕좌왕하다 4교시 시험감독에 들어갔습니다. 소식을 들은 동료가 대신 감독을 해주겠다는 걸 사양했습니다. 눈물은 났지만 이미 어머니의 죽음은 예견된 사실이라서 그래도 내가 맡은 일은 최대한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일만 남았는데 한 시간 정도 일찍 서두른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지요.

 

특별휴가를 신청하는 일 등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고 학교문을 나서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생협에 가서 달걀과 쌀식빵과 냉동 치킨크로켓을 사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집근처에서 내려 농협에 들러 얼마간의 돈을 인출했습니다. 수능을 치러야 할 딸을 위해 며칠간의 일용할 양식과 수능 당일의 도시락과 비상금을 준비했습니다.

 

얼만 전에 준비했던 어머니의 영정을 들고 남편과 함께 화성시에 있는 장례식장에 당도해보니 큰오빠와 새언니가 얼추 준비를 해놓고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20년 전 얼굴이 찍힌 영정을 두고 좀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 사진은 제 결혼식 때 어머니와 제가 얼굴을 나란히 하고 찍은 것인데 어머니의 은은한 미소가 무척 아름다운 사진이었습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효도다운 효도를 한 날이었기에 저에게는 의미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던 작은 오빠는 장성한 조카들에 이끌려 택시에 태워줘 오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보내진 후여서 식장의 분위기는 더욱 침울하고 무거웠습니다. 저와 한 살 터울인 미혼의 작은 오빠는 여직껏 직장 생활과는 거리가 먼 고립적인 생활을 해와서 술에 취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곤 합니다.

 

밤 늦게까지 큰오빠 내외가 다니는 성당에서 많은 분들들이 와주셔서 연도를 바쳐주셨고 제 직장 동료들도 먼 길을 마다않고 와주셔서 저를 위로해주셨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의 영정 앞에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화요일(11월10일)

오전 5시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 2시쯤에 다시 왔다는 작은 오빠는 소주 세 병을 마시고 술에 취해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잠시후 잠이 깬 작은 오빠는 아직도 만취 상태로 말도 안 되는 논리와 특유의 남 속 뒤집는 말들을 마구 쏟아냈습니다. 작은 오빠의 주정을 받아주는 사이 서울에서 작은 아버지와 사촌형제들이 도착했습니다. 10년 만에 뵙는 작은 아버지 앞에서 작은 오빠가 또다시 추태를 부리기 시작하자 작은 아버지는 몹시 불쾌해하셨고 저희 가족 역시 속이 뒤집히기 시작해서 결국 건장한 두 조카가 제 삼촌을 달래가며 위협하며 억지로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냈습니다.

 

제일 마지막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작은 오빠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요.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엄마의 오줌 똥을 받아봤냐? 그걸 생각하면 기분이 처참해진단 말야."  작은 오빠의 도발적인 언어와 행태를 보고 서른 살이 넘은 두 조카가 그렇다고 제 삼촌을 미워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촌을 이해는 하는데 삼촌의 행동 방식이 틀렸을 뿐'이라고 나름 깊은 생각을 내보입니다.

 

오늘은 조문객들이 참 많이도 오셨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조문객을 제대로 대접도 못하고 대화도 몇마디 나누지 못한 채 초라하게 차려진 상차림으로 대신했습니다. 그중에는 이십여 년만에 만나는 고향분들도 계셨는데 역시 몇마디 나누지 못하고 고맙다는 인사말도 제대로 못한 채 보내드리기도 했습니다. 섭섭하셨을 텐데 나중에라도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입관식이 있는 날입니다. 30여 년 전에 어머니께서 미리 만들어놓으신 수의를 입고 계신 어머니를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뵙는 날입니다. 성당에서 오신 신도분들의 기도소리가 든든한 힘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눈물은 흘렀지만 담담했습니다. 2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와는 좀 달랐습니다. 자발적 존엄사를 선택하신 아버지의 죽음은 저에게 청천벽력 이상이었습니다. 성당에서는 장례미사조차도 거부당했었지요. 노무현대통령의 서거 때 보여주었던 카톨릭 단체의 애도를 보던 장면이 지금도 저를 서럽게합니다. 죽음이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인데 이 인간들의 종교라는 것은 편협하고도 편협합니다. 종교와 화해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한평생 일꾼처럼 살아오신 저희 어머니는 저희도 모자라서 손주들 대학 등록금까지 손수 마련해주셨습니다만 언제가 이런 말씀도 하셨지요. "수금하느라고 여름에 한창 더울 때도 아이스케키 하나 못 사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사는 게 참 억울해." 이 말씀을 옮기고 있자니 또 눈물이 고입니다. 어머니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게 죄송스러워 다시 눈물이 흐릅니다.

 

수요일(11월 11일)

오전 9시에 발인식이 있었습니다. 미리 부탁한 검정색 리무진에 관을 안치하고 남편과 제가 탑승했습니다. 영정은 사위가 드는 것이라하여 남편이 내내 어머니 영정을 가슴에 안고 있었지요. 25년 전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저는 미혼이었고 제일 맏이인 언니는 병원에 있는 환자라서 우리 아버지에겐 사위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보다 두 살 아래인 사촌여동생의 남편이 아버지 영정을 모셨습니다. 허, 무슨 이런 관습이 있답디까? 사위가 없으면 그만이지 없는 사위를 딴데서 빌려와서라도 영정을 모셔야 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고 화가 납니다. 어머니 영정 만큼은 그래도 사위 손에 맡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나 또한 어이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투덜거렸더니 남편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장례식 자체가 유교에서 비롯된 가부장적인 제도일 뿐이야. 상주의 팔에 다는 완장에도 계급을 적용한 것이고. 사위가 영정을 드는 것은 사위도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행위야."라고.

 

장지는 아버지를 모신 천주교공원묘지로 어머니를 위해 이미 가묘는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가묘라는 것도 상당히 잔인합니다. 25년 전 아버지 장례 때 만든 것이니 그동안 이 가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셨을까요? 끊임없이 죽음을 떠올리시지 않았을까요? 살아계신 분에게 참으로 잔인한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걸 지적한 사람은 역시 우리 말썽꾸러기 작은 오빠였지요. 작은 오빠는 날카로운 지적을 잘 합니다만 자신에게는 무한히 너그러운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목요일(11월 12일)

지난 주 텔레비전에서 기상예보를 보는데 이렇게 씌어 있더군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대입수능일 금요일 토요일..' 그 대입수능일입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났는데 안방에서 함께 잠을 자고 있는 딸아이를 깨울세라 안방화장실을 두고 거실에 있는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딸아이가 수능을 치르는 날입니다.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어서 재빨리 모드를 바꿔야 하는 날이지요. 우리 어머니는 참으로 불쌍하십니다. 아무리 '하나가 떠나면 하나가 도착한다. 하나가 도착하면 하나가 떠난다.(시인 권혁웅의 칼럼에서)라고 하지만 미처 애도할 틈도 없이 딸아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니 우리 어머니는 지지리 복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저는 딸을 위한 걱정은 하지만 기도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딸아이가 공부한만큼만 결과가 나오기를 바랄뿐이었습니다. 딸아이가 시험을 치르는 학교 근처에서 서성거리지도 않고 촛불 하나 켜지 않았습니다.

 

지난 2월부터 재수에 들어간 딸은 일요일에도 쉼 없이 공부에 정진했습니다. "공부할만큼은 다 했어. 더 이상 할 수 없어."라는 딸한테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조용히 지켜볼 뿐입니다만 마음만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 부모로 산다는 건 고역입니다. 시스템을 따르자니 화가 나고 그렇다고 시스템을 벗어날 용기도 없습니다. 무력한 인간을 만드는 곳입니다.

 

금요일(11월 13일)

삼우제가 있는 날. 수능이 끝나 한층 가벼워진 딸을 데리고 큰 오빠가 사는 동네의 성당을 가기 위해 전철에 오릅니다. 가는 내내 머리가 자꾸 옆으로 떨어집니다. 잠이 쏟아집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새 모양을 갖춘 어머니의 묘 앞에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절을 합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작은 오빠도 말 없이 절을 올립니다. 작은 오빠는, 지난 발인식 땐 장례미사고 뭐고 다 빠지고 직접 산소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머니관을 매장할 때 조용히 한 삽 떠서 어머니관에 뿌렸습니다. 다른 식구들이 한 삽씩 흙을 붓는 것을 바라보는 것보다 작은 오빠를 바라보는 것이 왠지 가슴이 짠해집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지도 못한 채 병원에 입원중인 언니는 떠올리지 않았습니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비가 오는 바람에 삼우제를 급하게 끝내고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던 요양병원 근처의 식당에 가는 건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재작년 봄 어머니 생신 때, 작년 봄 어머니 생신 때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더랬습니다. 와중에도 수능을 끝낸 딸아이를 사촌 오빠들이 챙겨주는 모습이 귀엽고 정겹습니다. 오빠들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딸아이는 어려워하지만 따라주는 맥주를 벌컥벌컥 잘도 마십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딸아이가 다니던 학원 근처에 있는 치과에 들렀습니다. 이빨이 썩어가도 치과에 갈 시간이 없어 참고 참다가 하는 수 없이 수능 며칠 앞두고 다니기 시작한 병원입니다. 왼쪽 오른쪽 썩은 이빨이 한두 개가 아니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가게 생겼습니다. 겨우 치료를 마치고 나오니 이번엔 휴대폰 사러가자고 합니다. 제딴엔 공부한다고 2년 넘게 사용한 2G폰을 이제는 새 스마트폰으로 바꿔줄 때가 온 것입니다.

 

시인의 말이 맞나봅니다. '하나가 떠나면 하나가 도착한다. 하나가 도착하면 하나가 떠난다.'

 

"엄마, 고마워요." 딸의 말인지, 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ppletreeje 2015-11-14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그간 참 많은 일들이 있으셨군요...
이젠 좀 다 내려놓으시고, 잠을 푹 주무시면 좋겠어요.
삼가 nama님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nama 2015-11-14 14: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큰 일들을 연속으로 겪으니 오히려 중화되는 기분이 들어요. 묘합니다.

2015-11-14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4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르미온느 2015-11-1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 가족사를 담담하게 ^^함께 기도해요!

nama 2015-11-14 21:48   좋아요 0 | URL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이런 가족 얘기하는 거 싫어하셨어요. 제가 좀 그래요. 엄마 말을 잘 듣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hnine 2015-11-17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오늘에서야 이 글을 읽었네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는게 참 억울해 라고 하신 어머님 말씀이 제 가슴을 치고 갑니다.
제 아버지 돌아가셨을때도 제 남편이 영정을 안고 위패는 제 아들아이가 모셨지요.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인데, 날이 추우면 추워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겨울이 오면 겨울이 와서 자꾸 생각나고 눈물납니다. nama님 심정이 어떠시겠어요. 그냥 같이 울어드리고 싶네요.

nama 2015-11-17 07:49   좋아요 0 | URL
집안의 경제를 일으키고 후손들을 끊임없이 챙기시느라 당신은 일꾼처럼 사시고, 자신을 위해서는 조그마한 낭비도 허락지 않으셨던 어머니였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들 때문에 마음 고생도 심하셨고, 아픈 자식은 평생 마음의 십자가였지요. 자식들은 부모의 인간적인 약점을 들춰내곤 했지만, 당신은 자식들의 못난 점을 입에 담지 않으셨지요. 아침부터 눈물이 고이는군요.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나.

지난 여름 어느 연수에서 였다. 첫날 첫시간, 개강식이 열리는 자리인데 국민의례를 생략한 채 연수가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라는 최소한의 의식조차 없었다. 이건 뭐지? 안해도 되나? 갑자기 어리둥절해졌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공공기관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연수는 첫날 첫시간을 의례히 국민의례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디 연수뿐인가. 학교에서는 전체직원회의를 할 때마다 당연히 국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성당에 들어갈 때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듯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신성하다면 신성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절차가 빠져버리니까 갑자기 숨죽었던 의식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안해본 짓을 해본다는 것, 반대로 해본 짓을 안해본다는 것이 뜻밖의 기쁨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국민의례가 빠진 연수기관에서 받은 연수는 아이러니하게도 광복 70주년과 관련된 독립운동과 인물에 대한 연수였는데 내용도 알차고 풍부했으며, 마치 내가 독립운동가가 된 기분이었다. 국민의례가 빠진 덕분에 신선해진 두뇌가 마음껏 활동했기 때문이었을까.

 

의식이 트인 기관장을 만나는 것은 분명 이 시대의 행운이다.

 

둘.

어제는 <여덟 단어>의 저자인 박웅현의 강연에 갔었다. ' 이 시대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멘토, 박웅현 작가가 전하는 "창의적" 메시지' 가 그 주제였다. 그의 책 두어 권을 재미있게 읽었던지라 기대가 컸었다.

 

드디어 시작.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국민의례가 시작되어 가슴에 손을 얹었는데 잠시 후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가 진행되는 동안 심장 위에 얹은 손이 꿈틀거리고 기분이 지루해지면서 자꾸 딴생각이 들었다. 손은 애국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애국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박웅현, 이 분의 강의는 좀 색다르게 시작했다.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일단 10~15분 정도 청중에게서 질문을 받아 화이트보드에 하나씩 적어나간다. 질문이 칠판 가득차면 하나씩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묘한 것이 결국은 진행자의 의도에 맞게 질문이 꿰맞혀진다는 것이다. 형식은 질문에 답변하는 식이지만 결국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하는 셈이 된다. 방법만 다를 뿐이다.

 

하여튼 그런 그렇고. 첫 질문이 나왔다. 어떤 여자분이 손을 들었다. " 오늘의 강연 주제가 창의력인데 왜 꼭 국민의례부터 시작해야 되나요? 강사님은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첫 질문부터 만만하지 않다. 이후 여러 질문이 쏟아졌다. 대부분 창의력이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전체적인 강연의 흐름은 나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은 그저그런 수준이었다.

 

강연 도중 박웅현 이분도 뭔가 잘 풀리지 않는다 싶었는지 "오늘은 좀 뭐가 안 되는 것 같네요."라고 혼잣말 비슷하게 한다. 좀 그랬었다. 창의력을 말로 표현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차라리 창의력 있는 작품을 보여주는 게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대에 못 미친 강연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무엇이었을까. 막힌 기분이 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음, 바로 그거다. 국민의례와 애국가. 죽어가는 창의력을 살려보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든 강당에 울려퍼진 애국가. 애국을 강요하는 형식이 문제였다. 사람들이 이제는 알 것은 다 알고 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애국을 강요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애국가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하였더라면, 좀 더 창의력 있는 진행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되면 새삼 창의력을 주제로 한 강의가 필요 없게 되겠지. 그래서였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의 대학 입학까지의 공부는 시험 잘 보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중 국사 공부는 지금 생각해보아도 썩 괜찮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 세대는 국정교과서 세대이다. 국민교육헌장 암기로 지적 능력을 시험 받고 도깨비 뿔 달린 공산주의자들이 주위를 배회하던 시절, '자수하여 광명찾자,'는 구호 아래 철저한 반공교육-승공교육-멸공교육을 순차적으로 받으며 자라난 세대이다.

 

수능 이전에 학력고사가 있었고, 학력고사 이전에 예비고사가 있었는데, 나는 바로 그 예비고사 세대이다. 거의 전과목을 종합선물세트식으로 넑고 얇게 배워야 했다. 수학은 그때도 힘들었지만 한 일 년 전념해보니 그럭저럭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바로 국사 과목이었다. 말이 너무나 많은 과목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안한 방법은 교과서 암기였다. 어느 날 시험 문항을 분석해본 결과,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문장을 그대로 시험지 선다형 문장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부터 정밀한 정독으로 들어갔다. 국사책 한 페이지를 읽는 행위는 가히 종합예술행위였다. 눈으로는 책이 뚫어져라 한 단어 한 단어를 주시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그 글자의 위치를 각인시켰다. 그 결과 시험 문항에 나오는 문장을 보면 어느 페이지 상단 혹은 하단 몇 째줄에 위치한다는 게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단어 하나 바꾸어 출제해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문장으로 외운 게 아니라 그림으로 외운 것이다. 이름하여 시력암기법이었다.

 

단 두 번의 정독으로 가능한 공부법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30점 만점에 30점이 나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혹 틀렸더라도 한 개 정도.

 

그렇게 시험을 보고 나서 그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차피 오래 지속되는 공부법이 아니어서 오래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고등학교 때 공부한 국사과목은 내용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그저 공부방법만이 자랑스럽게 전리품인양 남아 있다. 나 이렇게 공부했노라고.

 

그렇게해서 대학에 들어갔더니 1학년 때 10.26 박정희 서거, 2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으로 이어지고, 졸업하니 과외금지라는 기상천외한 시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과외는 범법행위였으니 나는 당시 범법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물론 겁을 먹고. 어떤 시대였는데...

 

나의 두뇌에는 시험용 두뇌와 진짜 두뇌 두 개가 있다. 국정 교과서는 시험용 두뇌가 담당했다. 그간 정신분열증을 앓지 않고 잘 살아온 셈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10-09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a 2015-10-09 17:19   좋아요 0 | URL
암기력이 좋다니....그건 절대 아니구요. 시력이 좋았어요. 지금도 나쁜 편은 아니에요. 노안이 오긴 했지만요.

2015-10-09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9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9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