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을 읽다가...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에게 지우는 학습노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앞에 공자님 말씀을 들어 “얻는 게 없다”고 했는데, 지배세력에겐 이로운 부수적 효과가 적어도 두가지 있다. 세계 최장의 학습시간으로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비판의식과 계급의식은 형성하지 않은 채 등급과 석차로 서열을 규정함에 따라 머리 좋거나 경제력 있는 부모를 둔 학벌 엘리트집단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그 둘이다. 총총한 눈빛의 아이들 앞에서, 참된 교육자라면 이와 같은 교육 현실을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75242.html#csidxc41abc06ed4831b88e71a0feeef12af

 

 

무자비한 학습노동은 성찰없는 성실성을 몸에 배게 한다. '세계 최장의 학습시간으로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에 익숙'하게 되는 성실성이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몸에 밴다. 성실성에서 벗어나면 세상에서 도태된 것 같은 위기의식이 생길 정도로 성실성의 늪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의 교육현장에선 성찰없는 성실성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기 어렵다. 무자비한 학습노동에 매몰되어 매 학년 매 과목마다 등급과 석차로 서열을 규정 당하기 때문에 계급의식이나 비판의식이 싹틀 여지가 없다. 자신에게 매겨지는 등급과 석차에 심신이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다. 등급과 석차에서 밀리면 자연스럽게 패배감과 더불어 복종이 자리잡는다. '머리 좋거나 경제력 있는 부모를 둔 학벌 엘리트집단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복종심을 키워주는 게 등급과 석차이다. 세상은 이런 등급과 석차를 이용해 서로를 경쟁시키고 이런 손쉬운 방법으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길들여진다. 점수가 매겨지는 것에 쉽게 순응하게 된다.

 

 

 

이곳 알라딘에서도 해마다 등급이 매겨진다. 한 해에 읽은 책의 권수로,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단 횟수 등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는 리뷰를 올릴 때마다 읽은 책에 대한 등급을 매긴다. 책이 훌륭하건 그렇지 않건 모든 책은 지은이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분신과도 같은 것인데 거기에 감히 점수를 매긴다. 그것도 아주 손쉽게 클릭 한두 번으로. 매우 불쾌한 일이다. 저자들은 분명 별의 갯수에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등급과 석차에 묵묵히 견디는 이런 인내심에 한번쯤 딴지를 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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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신문을 보고 놀랐다. Sam Smith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는 것. 알았다한들 공연장에는 가지 않았겠지만 내한 사실도 몰랐다는 게 좀....

 

지난 여름 실크로드 갈 때 기내에서 내내 들었던 Sam Smith의 노래들. 그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그의 노래를 잘 안다고도 할 수 없지만,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그의 당당함 때문이다.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그가 한 다음의 말이 참 인상적이다.

 

"이 노래를 통해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요. 나는 '게이'인 것이 자랑스러워요. 사랑은 사랑일 뿐이에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한 노래. Him 을 음미해본다.

 

[Verse 1]
Holy Father, we need to talk
I have a secret that I can’t keep
I’m not the boy that you thought you wanted
Please don’t get angry, have faith in me

[Chorus]
Say I shouldn’t be here but I can’t give up his touch
It is him I love, it is him
Don’t you try and tell me that God doesn’t care for us
It is him I love, it is him I love

[Verse 2]
I walk the streets of Mississippi
I hold my lover by the hand
I feel you staring when he is with me
How can I make you understand?

[Chorus]
Say I shouldn’t be here but I can’t give up his touch
It is him I love, it is him
Don’t you try and tell me that God doesn’t care for us
It is him I love, it is him I love

[Bridge]
Ohh, ohh  Oh, I love
Ohh, ohh  No, no, I love
Ohh, ohh  I love
Ohh, ohh Ohh, ohh
Him I love Ohh, ohh
Him I love Ohh, ohh
Him I love Ohh, ohh
Him I love 


 [Outro]
Holy Father, judge my sins
I’m not afraid of what they will bring
I’m not the boy that you thought you wanted
I love him

(가사출처: daum)

 

 

그래도 끝내 sins 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참 안타깝다. 애절하다. 사랑은 사랑일 뿐이라면서.

 

 

여담: I hold my lover by the hand...성문종합영어식으로 말하면, 신체의 일부분을 만지거나 건드릴 때는 신체부위 앞에 전치사+the...를 쓴다. by the hand...이런 예를 들려주며 아이들에게 슬쩍 이 노래를 가르쳐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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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10-1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누가 막겠어요.
꼭 관련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에 본 설치 미술이 생각나서, 생각난김에 제 서재에 올려봐야겠어요.

nama 2018-10-11 18:51   좋아요 0 | URL
동성을 사랑한다고 해서 남한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지요. 나와 다르다고 해서 욕할 것도 아니고요. 사랑은 사랑일 뿐이지요.
 

*이 글은 전체공개했다가 비공개로 돌렸는데, 다시 전체공개를 한다. 마음 바뀌면 다시 비공개로 돌릴지 모른다. 사적인 얘기여서 조심스러운데 낙태죄에 대해 한마디쯤 하고 싶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내게는 직장, 결혼이야말로 일말의 공짜도 허용되지 않는 견고한 철옹성 같은 벽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나도 소위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 진입해서 늦은 나이에 출산도 했다. 서른 초반의 직장, 서른 중반의 결혼. 요즘은 이런 게 대세라서 별로 얘깃거리가 되지 않지만 내가 20대를 보냈던 80년대엔 흔치 않은 경우였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도 모르게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아이를 낳았으나 나는 아이를 키워보지 못했다.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주말에만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즈음에야 아이와 함께 시어머니께서 우리집으로 오셔서 함께 살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처음부터 우리 아이를 키워주시겠다고 하셨다. 기왕 키워주는 것이니 둘째도 낳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이 전혀 고맙게 들리지 않았다. 시댁 식구중에는 이런 말을 서슴지 않는 분도 있었다."애 하나 더 낳아. 두 사람이 맞벌이하니까 한 사람이 버는 건 애 키워주시는 시부모님 생활비로 쓰면 되겠네." 내가 애 낳으려고 결혼했나. 시부모님 부양하려고 결혼했나.

 

42살에 어쩌다 임신이 되었다. 재고의 여지도 없이 애를 지웠다.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남편에게조차. 나는 결혼 전부터 나름대로 가족계획을 하고 있었다. 자식을 낳는다면 딸 하나만을 낳으리라고. 그리고 그걸 이루었으나, 애를 낳아서 키워보지도 못하고 돈 벌어 시부모 봉양하고...이게 결혼이냐는 회의감만 깊어졌다. 

 

어느 토요일에 낙태 수술을 받았다. 물론 혼자 갔다. 수술대에 누운 나를 보고 어린 간호사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애기가 불쌍해요."를 남발했다. '이런 잡것들' 이라는 욕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한편 내가 죄를 짓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되돌릴 생각같은 걸 할 내가 아니었다. 의사도 그랬다. '자궁외 임신이라 어차피 낳지 못할 아이입니다.'라고.

 

토요일에 수술을 하고 다음날인 일요일엔 교재연구를 위해 시내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구입해왔다. 다음날인 월요일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는데 몸이 너무나 아팠다. 오후 수업을 몰아서 오전에 해치우고 조퇴를 신청했다. 그 당시 근무한 학교는 신설 학교라서 소수의 교사가 많은 업무를 맡고 있는 상황이라서 누구에게 부탁할 처지도 아니었다. 병가를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월요일 오후에 몸을 추스르고 어김없이 화요일에 출근했다. 서러웠다.

 

 

낙태는 임신을 한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해도 결정권은 임신한 사람에게 있다.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는 어린 소녀에 대한 기사를 볼 때마다 우리나라는 참 잔인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녀는 얼마나 무섭고 서러웠을까? 여자를 이렇게 대접하는 나라에서 저출산 운운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자식을 몇 년간 돌봐주신 시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은 시어머니가 생존하시는 한 평생동안 지속된다. 내가 그렇다. 그나마 아이가 하나였으니 망정이지 둘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할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있을 수 없는 얘기지만, 만약 내가 다시 아이를 낳는다면 내 손으로 오롯이 아이를 키우고 싶다. 아이가 크는 과정을 오롯이 함께 하고 싶다.

 

 

낙태죄 운운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코웃음만 나온다. 도대체 낙태가 죄가 되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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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7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07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07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a 2018-10-07 22:12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낙태와 임신 중단이 어떻게 다른가요?
결국 뱃속의 태아를 없애는 건 똑같은 사실인데 표현을 다르게 한다고 사실이 달라지나요? 임산부를 존중하는 표현이 임신 중단이겠지만 낙태라는 씁쓰름한 죄의식이 전혀 없다고도 볼 수 없거든요.

2018-10-08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09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09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09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나라 2018-10-08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죄의식을 느끼기엔 여성인 ‘나‘의 현실이 더 씁쓰름하지요. 현재 우리나라 현실을 고려할 때 낙태 문제는 오롯이 해당 ‘여성‘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nama 2018-10-08 14:13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나의 현실이 씁쓰름하니까 낙태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낙태 문제를 여성의 판단에 맡기지 못한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으면서 역시 씁쓰름합니다.

2018-10-08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09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빵집에 식빵을 사려고 들어서는 순간, 잘 생긴 청년이 문 앞에서 내게 작은 빵봉지를 내민다.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빵을 주려고 나왔다나. 오우, 기특한 녀석. 누구누구 샘 아니냐며 자기를 알아보는지 묻는다. 얼굴이 눈에 많이 익었다. 기억은 나는데 이름은....모르겠다. 이럴 땐 솔직하게 물어본다.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은 기억 안 난다고. 녀석이 이름을 밝혀주니 몇 년 전 기억이 오롯이 난다. 은근히 미운 짓을 한 녀석이었으나 워낙 거물급이 많아서 그 축에 들지는 않은, 그래도 얌전한 녀석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당시의 거물급 아이들이 꿈 속에 나타나곤 하는데 그런 날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식빵을 사러왔으니 매장으로 들어가 식빵 한 봉지를 골라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신용카드를 내미니 제자녀석이 그냥 가져가란다. 엉? 이래도 되나? 주인 아들은 아닐텐데....

 

"고마워,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더 잘해줄 걸 그랬네.ㅎㅎㅎ"

 

"이미 늦었어요. ㅎㅎㅎ."

 

 

 

고맙다, 도형아. 너그러운 청년으로 성장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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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가의 꿩은 열 걸음 가서 한 번 쪼아 먹고, 백 걸음 가서 한 번 물 마신다. 새장 안에 갇혀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비록 왕 같은 대접을 받는다 해도, 마음이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192쪽)

 

 

 

 

 해설은 이렇다.

 

'모든 존재자는 각기 나름의 고유한 본성을 지닌다....(중략)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고, 새는 창공을 날고 있을 때 자유롭다. 바로 그런 환경, 즉 자득지장에 거할 때에야 비로소 모든 존재자는 자신의 본성을 자유롭고 활달하게 실현하며 생명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중략)

 세상에는 혼자 묵묵히 무언가를 연구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여러 사람들을 두루 만나며 사업을 도모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작더라도 '자기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넓은 무대에서 이름을 떨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또 물질적인 부를 누려야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적인 부유함을 더 중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이 안쓰럽게 보인다고 해서 그 반대의 행복을 안겨주려 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되레 큰 고통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결국 자신의 본성에 어울리는 곳, 자신의 마음이 편한 곳에 거해야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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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06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사진이 넘 멋져요~

nama 2018-09-07 06:5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산책하며 종종 보곤 하는데 사진으로 담기에는 역부족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