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페이퍼를 쓴 지 한 달이 되었다. 그간 일들이 있었다.


  남편 친구들이 몇년 전부터 여행적금을 부었는데, 드디어 부부동반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여행지 선정을 두고 투표한 결과 동유럽으로 결정. 우리 부부는 코로나 이전에 이미 여행한 곳이건만 다수결에 밀려 여행을 복습하게 되는 이 슬픔 내지는 기쁨. 짧은 인생 갈 곳도 많은데 갔던 곳을 다시 가는 슬픔. 한번 가기도 어려운 곳을 두번이나 가게 되는 행운 같은 기쁨. 슬픔이 컸을까. 기쁨이 컸을까.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작심한 것이 있는데, 사진에 매몰되는 시간에 골목길을 더 배회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사진을 무시할 수 없어서 휴대폰에 저장된 기존 사진들을 다른 기기에 옮기기는 했다. 옮기면서 회의가 들었다. 이 사진을 나중에 쓸 일이 있을까, 다시 보게 될까. 살을 덧붙이기 보다는 살을 빼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자각. 사진 없는 여행을 다녀오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나......

동유럽이 처음인 여인네들은 사진에 미쳐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온갖 요사스러움이 되살아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이번 여행은 자폭과 자책의 연속이었다. 사진에 무슨 죄가 있으랴.

  헝가리 부다페스트 로컬가이드의 말씀. 90년대의 여행자들은 여행 정보를 A4에 프린트해 와서 하나하나 확인하며 학습하는 열정이 있었는데 요즘 여행자들은 그저 사진만 찍고 간단다. 아, 나는 90년대 인간이자 90년대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계속해서 이삿짐을 쌌다. 23년 만의 이사다. 온갖 잡다한 물건들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대학 때 쓰던 수첩, 중학교 때의 이름표와 교표까지...버려도 버려도 끝이 없다. 버리려는 마음을 버렸기 때문에.

  이사 전 날 밤 11시 30분에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찌해볼 수 없는 약속이 이사가 아니던가. 잔금 받고 잔금 치르고, 서류 확인하고, 복비 내고 취득세 내고, 이사비용과 입주청소비 치르고...통장의 잔액이 간당간당, 스릴 만점이 따로 없다. 이 모든 소동을 치르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는데 그간 소원하게 지냈던 관계로 우리 가족이 뒤늦게 등장하자 주변에서 냉기가 몰려왔다. 이튿날은 입관식 참석에 이어 딸내미 이삿짐 옮기는 날. 원룸에서 혼자 지내던 딸의 살림살이를 새로 이사한 집으로 옮기는데 냄비에 냄비를 쌓는 온통 플러스의 작업. 언젠가는 정리가 끝나겠지.

  입관식. 시신을 관에 모시는 예식. 지금까지 본 입관식을 나열하면, 아버지, 법수치 최선생님, 엄마, 언니, 그리고 시어머니. 이번 입관식을 주도하는 장례지도사는 뭐랄까. 숙연한 자리에 휴대폰은 시끄럽게 울려대는데 무음처리는 고의로 회피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관에 모신 시신을 가족들이 둘러싸고 사진까지 찍으라 하신다. 게다가 관뚜껑에 한마디씩 글을 남기라고 하더니 하트 뿅뿅 그림 지도까지 하신다. 여자 상주는 조문객과 맞절하지 않는다며 상주자리에서 배제시키더니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거리인지 모르겠다. 장례식이 무슨 이벤트냐고....나중에 딸이 그런다. 결혼식도 이벤트성 행사인데 장례식도 다를 것 없지 않냐고.

  장례식을 마치고 새집으로 돌어오니 모든 게 낯설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지역.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 빌트인으로 설치된 싱크대 정수기에서 물이 흘러 아랫층에 누수가 발생. 아랫층 여주인의 방문에 초긴장 상태. 다행히 어찌어찌 관계 개선으로 빵과 고구마, 장아찌 등이 오가며 무탈하게 끝났다.


  와중에.
















<나스타샤>를 쓰신 작가님이 친히 새로 출간한 소설을 작가 사인본으로 보내주셨다. 떨리는 가슴과 감격을 어찌 말할까.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읽고 있는데 여러 생각과 감정이 오간다. 



  새로 이사온 동네는 주변에 산책로가 여럿이어서 멍멍이 산책시키기가 좋다. 저녁을 먹고 가볍게 운동삼아 걷기에도 좋다. 사방으로 트인 길을 따라 여기저기 쏘다니기 딱 좋은 곳인데.... 이젠 무릎이 시원찮다. 계단 오르내리기가 부자연스럽고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너기도 슬슬 겁난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남편이 안쓰러워 한다. C'est la vie! 인생이 다 그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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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3-11-18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일이 많으셨군요.
어디로 이사를 하셨는지, 모쪼록 새집에서 좋은 일 많이 생기시길 바랍니다.
동유럽 여행기도 기회되면 풀어놓아주세요 ^^

2023-11-19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3-11-19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nama님 잘 지내셨나요.
이사도 하시고 여행도 하시고 그리고 집안의 큰일도 있으셔서 많은 일이 있었네요. 이사와 장례가 같은 시기에 있었으니 힘드셨겠어요. 이사간 곳에서도 좋은 일들 많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밤되세요.^^

nama 2023-11-20 08:03   좋아요 2 | URL
엄마 돌아가실 땐 딸 수능과 겹쳐 정신이 없었는데 시어머니 별세는 이사와 겹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어떻게 어떻게 넘어가네요. 나의 어머니들은 죽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구나...잠시 그런 생각도 드네요.
인천을 아주 떠나왔는데도 덤덤하네요. 여유만 된다면 이곳저곳에서 다양하게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해요.
무탈한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얄라알라 2023-11-19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nama님
줄여서 써주셨지만 행간에도 다 담기지 않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셨을 것 같아요.
휴대폰과 하트뿅뿅은 제가 상상해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풍경이네요.
23년만의 이사라 하시니 천천히 천천히 짐 푸시고 새로운 곳에서 기분좋게 시작하시기를요
!
유럽여행 사진 대방출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nama 2023-11-20 08:04   좋아요 0 | URL
제 평소 생각은...글이 삶을 따라가지 못한다, 입니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게 글의 한계라고 할까요. 가급적 말을 아끼게 되지요.
여행지의 에피소드, 시어머니와의 애증, 23년 동안 살았던 집에 대한 복잡다단한 감정과 새로운 둥지에 대한 소회...할 말은 많지만 꾹꾹 눌러둡니다. 언젠가 어떤 모양으로 터져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패키지 여행은 배부른 돼지를 사육하는 여행이라 포만감으로는 그만입니다만, 글도 사진도 곡진한 맛은 별로 없지요. 보여줄 사진 한 장 없다는 건 뭔가 슬픈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