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잇다, 있다. - 읽기에서 존재로 이어지는 24편의 리드레터read letter
김흥식 지음 / 태학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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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접한 책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유쾌하고 몰입감 좋은 책으로 지은이에 대한 관심 폭발. 이런 재밌는 책 더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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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1.

80년대쯤인가, 동네와 동네를 잇는 시내버스를 갈아타면서 1번 국도를 종주하면 재밌을 거라고 제안한 사람이 있었다. 개그맨 전유성이다. ...수원 - 병점 - 오산 - 송탄 - 서정리 - 평택 - 성환 - 천안.....이렇게 지역명을 나열했던 그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 양반은 어디까지 가봤을까, 내내 궁금하다. 그래서 그런가. 낯선 버스를 보면 종점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덜컥 이사온 동네에 낯선 버스노선이 눈에 들어왔다. 찜통 더위에 하루종일 에어컨 틀고 앉아 있기가 미안한 어느 날, 000번 버스에 올랐다. 수많은 정류장 중에 <경기도자박물관>을 목적지로 정했다. 서쪽방향 생활권을 벗어나 평소에 갈 일이 없는 동쪽방향 지역으로 빠져나가니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전혀 낯선 길은 아니었다. 예전에 홍천을 드나들며 잠시 농사 흉내를 내던 시절에 뻔질나게 지나다니던 도로와 도로변 충전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가 난생 처음 가는 길로 접어들자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형지물을 살폈다. 별 특이할 것도 없는 풍광이지만 처음 보는 풍경은 기분전환이 된다. 내겐 아무래도 이주형 유전자가 콕 박혀 있는 것 같다.


박물관 입구에서 하차. 동선을 따라 걷다보니 박물관보다 도자기판매업소가 가까워서 그곳부터 둘러보았다. 넓은 매장에 손님이 적은 탓인지 입사한 지 보름되었다는 판매원분이 이를 데 없이 상냥하다. 마침 도자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며 세 곳의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는 무료입장권을 건넸다. 아, 이 친절을 어쩌나.




셋째줄 세번째의 '불수감'이 낯설다. 설명에 따르면, "불수감은 모양이 부처의 손과 같은데다 '불佛'과 '복福'의 발음이 유사해 다복多福으로 이해된다." 이해가 되나? 불과 복이 발음이 유사한가? 지금도 어쩌다가 백화점 과일 매장에 등장한다는 과일이 조선시대에 그림 소재가 되었다는 게 흥미롭긴하다.




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경기도 도자요 지도. 특히 김포를 보시라. 김포를 서울에 편입시킨다고? 차라리 대한민국을 서울공화국으로 바꾸는 게 나을 듯. 


경기도민으로 태어나서 경기도민으로 살고 있는 나는 다른 데는 이렇게저렇게 연결고리가 있어 다 가보았는데 유독 구리와 동두천과는 인연이 없다. 조만간 답사해보리라.


박물관을 벗어나 한 정거장을 걸어가니 소머리국밥 동네가 나온다. 유명한 배연정소머리국밥 말고 그 옆집인 시레기전문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사먹으니 오늘 소풍 완성!



소풍2.

역시 에어컨 켜기 미안한 날 밖으로 나갔다.

양평 두물머리와 수종사



뭔가 처연한, 

눈치, 염치도 없는 권력자는 당당,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


명절날 시댁에 간 아들과 며느리 같은,

아들은 소파에서 뒹굴고, 며느리는 주방에서 종종거리고.





수종사에서 바라본 양평 두물머리. 

남양주 운길산 중턱에 자리잡은 수종사. 시원한 전망보다도 저 높은 곳에 절을 짓느라 고생했을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당신은 즐기고 나는 일하고.




두물머리의 명물 연핫도그. 핫도그에 시니컬한 내 입맛에도 맛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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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Zone of Interest>를 인덕원에 있는 롯데시네마에서 감상했다. 상영관이 드물다보니 난생 처음 인덕원까지 가게 되었다. 50석 중 관객이 7명 쯤이었나. 영화의 포인트는 사운드(배경음악)라는 걸 미리 찾아서 알고 갔기에 망정이지 멋모르고 갔더라면 영화 후반부에서나 겨우 알아차렸을 지도 모른다. 음울하고 불유쾌하면서 뭔가 불안하게 하는 사운드는 역시 영화의 압권이었다.

'끔찍한 장면 없이 끔찍한 영화'. 그 끔찍함은 영화도 영화지만 내 안의 끔찍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요양원에서 말년을 보내셨던 엄마는 어느날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집에서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너밖에 없다." 누군가는 평생 병에 걸려서 눈물겹고, 누군가는 외로워서 애달프고, 누군가는 식솔을 책임지느라 어깨가 무거워서 안타깝고, 생각해보면 모두 제각각 '불쌍'한데 나만 유일하게 그런 걱정없이 살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엄마는 참...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불쌍하다고 생각한다는 걸 모르시나...씁쓰름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내내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내가 그렇게나 이기적이었나. 내 몫을 살아내느라 내 삶도 만만치 않았는데 엄마가 보기에는 그래도 다른 자식들에 비해서 수월하게 사는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너만 안 불쌍하다."라는 말씀이 이 영화를 보고나서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안의 무관심과 이기심을 질타하는 듯했다. 중심을 잡으려고 얼마나 애쓰며 살았는데..하는 서글픔과 함께.


영화 제목인 Zone of Interest를 나는 이렇게 번역해본다. '혼자만 잘 사는 놈(이 있는 곳)'이라고. 혼자만 잘 살겠다고 마음 먹은 놈에겐 보이는 게 없다. 그저 저 살 궁리만 하면 되니까. 나라꼴이야 어떻든 제 맘대로 하고야 마는 저 못난 인간들이 죽치고 있는 곳...이런 지긋지긋한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뿌리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뻗어가게 하는 이 영화. 책 한 권보다, 며칠 간의 여행보다 더 진하고 매력있다. 쉽사리 뽑히지 않는 뿌리를 심어놓는다.





지속적으로 내리는 비에 폰툰다리가 끊어졌다. 완전 고립은 아니지만 어쨌건 외부세계와 격리되었다. Zone of Isolation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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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기에서 읽은 내용이다. 조지아행 비행기에서 조지아어 알파벳을 공부하고 갔는데 현지에서 조지아어 글자가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이게 가능? 단 몇시간에 다른 나라 글자를 익힌다고? 실험삼아 해보았다. 




외국어는 초반이 중요한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배우려니 발음도 전혀 정확하지 않고, 알파벳 획을 긋는 순서도 모양도 그저 어렵기만 하다. 유아용 원서라도 볼까하고 주문했더니 절판되었다는 통보만 받았다. 애써 한글자 한글자 그려보았다. 떠뜸떠뜸 큰 소리로 읽을 땐 한글을 처음 배우는 할머니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삐뚤빼뚤한 글씨에 담긴 설레임과 신기함, 민망함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한글보다 천 년은 앞섰다는 조지아어 문자. 인구 370만 명의 작은 나라가 유구한 언어를 유지해왔다는 사실도 놀랍기만 하다.


외국어는 꼭 써먹어야만 배우나...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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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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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거칠게 말하면, 사랑을 떠나보낸 여인의 자기비판적인 반성문. 이 책의 마지막 글자까지 읽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사랑에 대한 고찰을 소설이라는 형식에 담아낸 이 소설은 독특하다. 한 권의 철학서 같기도 하고, 예술이론서 같기도 하고, 길고 긴 반성문 같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동어반복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면서도 결말엔 시치미 뚝 떼는, 장난기 가득하고 배짱 두둑한 한바탕의 회오리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어쨌냐고? 학구적이고 철학적인 세계를 넘나드는 경험에 감탄하다가, 술 취해서 같은 말 되풀이 하는 주사꾼의 기나긴 넋두리 같은 동어반복에 질리기도 하다가, 애틋한 첫사랑의 추억을 소환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곱씹기도 하는, 블록버스터의 세계....작가가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말을 온통 쏟아놓은 작품에 그저 허우적거렸다고나 할까. 풍경에 압도 당하면서도 진저리를 내며 끝까지 고지를 향해 걸을 수밖에 없는 등반이라고나 할까. 한번 풍덩 빠져서 며칠 허우적거리는 맛이 각별하다.


마음에 착착 달라붙는 표현들이 적잖은데 그중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기면...


p. 272~273

" 철학에 주제라는 건 없어. 철학이 우리에게 뭔가 삶의 윤리적인 지침을 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웃기는 거야. 물론 어떤 지침인가를 주긴 하지. 그것은 지침이 없다는 지침이야. 사람들은 철학이 무엇인가 적극적인 것을 말해 주기를 바라. 철학은 그러한 것을 내재하고 있지 않아. 철학은 이를테면 텅 빈 거야. 양파를 벗겨 나가면 거기에 핵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철학도 벗겨 나가면 그 안에 무엇도 내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양파가 단지 여러 겹의 표층만으로 의미 있듯이 철학도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형식에 의해서 유의미한 거야. 그것은 주제를 지니지 않지만 주제들을 명석하게 만들지. 그러고는 그 주제들을 증발시켜 버리지. 단지 그거야. 이제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이나 윤리학 등을 포기해야 해. 멋진 말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

  사람들은 철학에는 무슨 좋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철학은 내게는 좋은 것이었어. 단지 무슨 좋은 것들이 없었을 뿐이야 그러니 내가 너한테 이리저리 말해 줄 수 없는 이유를 알겠지? 철학 하는 첫 번째 마음가짐은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데 있어. 철학은 그저 현존하는 사건의 명료화를 기할 뿐이야. 철학은 명료화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잘난 소리를 하기 위해 철학을 해서는 안 될 거야. 과학은 단지 현상의 포착이야. 소위 사태의 발생과 비발생의 총합이지. 그리고 철학은 거기에 방어선을 치는 철책이야. 다른 헛소리들이 그 안에 못 들어오도록.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누누이 말하는 한계야."

  이것이 그가 철학뿐만 아니라 삶에 부여하는 의미였다. 나는 이 말을 우리 이별 전에 듣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말 자체가 우리 이별의 내재적 동기였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그의 선고.

  "삶은 무의미하다는 의미밖에는 없어."



이렇게 읽어도 저렇게 읽어도 의미가 샘솟는 듯한 작품을 이렇게 거칠게 마무리하다니... 

얼마전 별세하신 시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불현듯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오듯, 이 책에 대한 잔상 역시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불시에 떠오를 것이다. 일단은 완독에 의미를 두며 작가님의 친절에 대한 인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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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ama 2024-01-01 11: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루피닷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