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의 미학 - 20주년 개정판
승효상 지음 / 느린걸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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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이지만 학교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공간이 아닌 곳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공간. 업무 아닌 업무. 인솔하고 온 학생들은 저쪽 공간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나는 이쪽 공간에서 주어진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의 내 업무는 수업이 아니라는 것. 수업 받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일이다. 좋다. 잠시나마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이 작은 책을, 이 작디 작은 책을 여러 공간에서 나누어 읽는다. 역시 아이들을 인솔하는 일을 끝낸 후, 딸을 만나러 간 대학교정 나무 그늘에서 읽고, 오늘은 연수원에서 아이들이 수업 받는 교실 옆에서 이 책을 읽는다. 낯선 공간에서 읽는 맛이 각별하다. 이 책은 책을 읽은 공간을 품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나는 이를 '빈자의 미학'이라 부르기로 한다.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

 

I shall call this the "beauty of poverty".

Because of poverty. Here, it is more important to use than to have, to share than to add, to empty than to fill.

 

승효상의 철학이 담겨 있는 명문장이다.

 

우리말 어감도 좋지만 영어 표현도 매우 매끄럽다. 착착 감긴다.

 

 

반기능

우리가 지난 몇 십 년간 교육 받아온 '기능적'이라는 어휘는, 그 기능적 건축의 실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피폐화시켰는가. 보다 편리함을 쫓아온 삶의 모습이 과연 실질적으로 보다 편안한 것인가. 살갗을 접촉하기보다는 기계를 접촉하기를 원하고, 직접 보기보다는 스크린을 두고 보기를 원하고, 직접 듣기보다는 구멍을 통해 듣기를 원하는 그러한 '편안한' 모습에서 삶은 왜 자꾸 왜소해지고 자폐적이 되어가는가.

우리는 이제 '기능적'이라는 말을 다시 검증해야 한다. 더구나 주거에서 기능적이라는 단어는 우리 삶의 본질하머 위협할 수 있다. 적당히 불편하고 적절히 떨어져 있어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그런 집이 더욱 건강한 집이며, 소위 기능적 건축보다는 오히려 반(反)기능적 건축이 우리로 하여금 결국은 더욱 기능적이게 할 것이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도로가 꽉 막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나도 이따금 그 인파 중의 하나가 되지만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을 집 밖으로 몰아내는 주된 이유가 아파트라는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파트는 거주 공간으로는 대단히 편리한 곳이다. 지붕이 샐 염려도 없고, 집안으로 빗물이 들이닥칠 일도 없고, 빨랫줄에 넌 빨래를 걷어야 할 걱정도 없고, 땔감이나 연탄을 들여놔야 하는 걱정도 없다. 집을 지키는 똥개 따위를 키울 필요도 없다. 도대체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반면, 숨을 데가 없는 곳이 아파트이다. 어린 시절 그 불편하고 바람 숭숭 들어오는 재래주택에서 살 때는 속상한 일이 생기거나 숨어들고 싶을 때는 아무도 찾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집안 곳곳에 있었다. 생쥐가 드나드는 광, 어두컴컴한 다락방, 낡고 못쓰는 물건들이 쌓여있는 뒤란에서 상처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러나 아주 편리하고 기능적인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 숨을 곳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이제 숨을 곳이 없으니 그 숨을 곳을 찾아 밖으로 밖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너무 편리해서 심심한 곳이 되어버린 게 아파트이다.

 

하나 더. 이런 아파트가 돈이 되어 버린 세상이 안타깝다. 아파트는 집이 아닌 곳이 되어버렸다.

 

 

저자의 말처럼, '적당히 불편하고 적절히 떨어져 있어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그런 집이 더욱 건강한 집'이고, '기능적 건축보다는 오히려 반(反)기능적 건축이 우리로 하여금 결국은 더욱 기능적이게 할 것이다'.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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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10-1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 노무현대통령 묘역 설계하신 분이시죠?
봉하에 갔을 때 승효상님이 어떤 의미로 설계하신건지 조금은 알것 같았어요

nama 2017-10-20 07:02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제가 봉하에 갔을 때는 묘역 완성 전이라 좀 아쉽네요.
부여에 있는 신동엽문학관도 이 분이 설계하셨는데 인상적이었어요.

보통 2024-01-19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리뷰를 보고 책 구입을 결심했습니다. 건축이라는 학문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글이었어요. 감사합니다.

nama 2024-01-25 12:55   좋아요 0 | URL
제겐 좋은 책이었는데 보통님에게도 좋은 책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