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추정 나이 7살의 유기견을 입양했었는데 우리 가족과 만 6년을 함께 살다가 일주일 전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름은 아진군. 


아진군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단 한번도 짖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짖지 않는 개였다.

식구가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꼬리 같은 거 흔들지 않는다. 꼬리치지 않는 개였다.

귀여워서 안아보면 금새 발버둥쳤다. 사람에게 안기지 않는 개였다.

부드러운 이불이나 폭신한 방석, 바닥에 깔린 옷감 등에 앉기를 좋아했다. 제 누울자리를 귀신같이 알아보는 재주가 있는 개였다.

먹는 걸 좋아해서 모르는 사람이 주는 간식도 잘 받아먹고, 밥상 옆에 와서 맛있는 거 하나 달라고 발로 툭툭 건드리곤 했다. 먹는 거 외에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법이 거의 없는 냉철한 개였다.

실외배변을 좋아해서 하루 두 번 산책 시간이 되면 빨리 나가자고 신호를 보내곤 했다. 이럴 때만 유일하게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개였다.

유기견 보호소에 있을 때 다른 개들한테 세 군데나 물려서 상처를 꿰맨 채 우리집으로 왔었다. 산책 중 다른 개를 만나면 슬슬 피하느라 바빴다. 다른 개에게 관심도 없을 뿐더러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는, 겁 많고 소심한 개였다. 그러나 동네의 '예쁜이'라는 하얀 강아지만은 예외였다. 보호소에 있을 때 늘 함께 붙어있던 방울이라는 이름의 암컷이 있었는데 각각 입양되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되었다. 둘 다 입양하지 못해서 아진군에게 매우 미안했다.

사람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그 흔한 '앉아!' 나 '손!' 이런 거 해본 적이 없다. 사람에게 아양을 떨지 않는 개다운 개였다.

그러나 저를 향한 인간의 애정의 정도쯤은 알고 있었다. 아진군을 입양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딸아이가 손을 내밀면 부드럽게 혓바닥으로 핥아주고, 밥을 주고 산책을 시켜주는 내가 손을 내밀면 킁킁 냄새만 맡고 가만히 있는데, 남편이 손을 내밀면 고개를 돌렸다. 산책을 나만 시켰나? 남편도 거의 늘 함께 똥을 치웠는데도 그랬다. 아진군에게도 나름 안목과 척도가 있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줄 몰라서 온갖 장난감이 소용 없었는데 그래도 개는 개라서 이따금 수건 따위를 물어 뜯었다. 이런 개다운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신기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개답지 않는 개의 개다운 용기가 그렇게 보기 좋았다.

이러했던 아진군이 갔다.




아진군 수첩이다. 예방접종을 하느라 세 군데의 동물병원을 다녔었다. 

첫 번째 동물병원은 과잉진료가 심한 곳이었다. 처음이라 조심스럽던 우리는 의사의 말에 순순히 따랐지만 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이게 맞나? 하는 심정이었다.

두 번째 동물병원은 산책하다가 만난 견주들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곳. 아침 일찍 줄을 서서 번호표를 타고 제 시간에 맞춰 다시 가서 진료를 받는 게 힘들었지만 과잉진료 없고 친절한 곳이었다.

세 번째는 새로 이사와서 알게 된 곳으로 구도심에 있는 병원이다. 병원도 낡고 의사도 늙었으나  정말 개를 개답게 대하는 곳이었다. 환자 챠트 같은 거, 컴퓨터로 하는 고객 관리 같은 거 전혀 하지 않는 곳으로 개의 이름 따위 묻지도 않았다. 개에게 이상한 짓, 말하자면 과잉보호를 한심하게 보는 의사선생님이 있는 곳이었다. 진료 때마다 기본적으로 받는 진료비(오천원 정도)도 없고 (대신 발톱 손질이나 귀청소, 초음파 따위도 없음) 딱 필요한 처치에 합당한 비용만 받았다. 한마디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곳이었다. 접종 날짜도 기억하기 쉽게 '광복절에 오시면 됩니다'라고 하며 저 수첩에 스티커 따위 붙이지 않고 기록을 해주었다. '허참... 이런 수첩도 있나?'하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수첩도 더이상 기록할 칸이 없고 더이상 기록을 남길 만한 개도 이제는 없다. 내 인생의 어떤 시기에 와서 한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었던 우리 아진군.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늘 집에 개가 있었다. 늘 똥개였으나 또한 집안의 재산이기도해서 어느 정도 성견이 되면 여름 복날을 지날 때쯤 어머니의 살림 밑천이 되어주곤 했다. 심지어 사위의 몸보신용으로 희생되기도 했다. 그래서 단한번도 개가 늙어서 죽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늘 마음에 걸렸는데 나는 드디어 해냈다. 소위 품종 따위 없는 똥개를 끝까지 길렀다. 잘가라, 아진군. 고맙다, 아진군. 개다운 개였던 아진군, 안녕~~



입양 후에 이런 영상이 있음을 알았다.

더달: 아진군의 스트리트 시절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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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0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0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자 2025-02-1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다운 개!!
나마님 댁에서 사랑을 많은 받은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나중에 아진군이 마중을 나오겠네요...힘내세요.

nama 2025-02-10 15:50   좋아요 0 | URL
빈 자리의 허전함과 슬픔이 남네요.
감사합니다.
 

다리 하나 없는 개울을 폰툰이라는 부교를 설치하여 겨우 물을 건너고, 묵혀둔 땅을 일구어 밭을 만들어서, 올해는 삼 년 키운 도라지로 도라지 정과를 만드는 즐거움도 누렸다. 비야 여름이면 내리는 거라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계곡물이 불어나는 위험성도 익히 알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었다. 개울 둔치에 세워둔 자동차가 물에 잠긴 모습을 아침밥을 먹고도 한참 지나서야 발견했다. 오두막에서는 자동차가 보이지 않아서 일부러 내려가야 하는데 계속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몸 사리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나, 흠.




이렇게 잠기기 시작한 자동차한테 가려면, 목숨 걸고 저 물살을 헤치며 갈 수는 없고, 철옹성으로 둘러싼 옆집의 마당을 가로지를 수도 없는 노릇. 길도 없는, 경사가 급하고 나무가 우거진 정글 같은 뒷산을 타고 가는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차를 언덕으로 이동 시킨 후 한시름 놓긴 했다. 나는 그저 옆에서 지켜보고 남편이 이 모든 일을 담당했다. 그게 지난 일요일이었다.


지난한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폐차 수순을 밟아서 오늘 자동차가 떠나갔다.




남편은 약속한 모임에, 딸은 직장에, 나 홀로 떠나가는 차량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삐질삐질 나온다. 작년 11월 시어머니 상, 연속으로 이어지던 시이모님 두 분 상, 얼마 전 작은아버지 상에서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건만. 구순을 넘기신 분들의 자연사는 예견된 것이지만 식구 같은 자동차와의 이별은 너무나 갑작스러워서일까. 잘 가라, 2015년 생 싼타페야. (나는 자동차 운전면허도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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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7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9-28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24-09-28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이 되어주던 자동차, 떠나보내며 눈물 글썽이는 거, 저 잘 압니다. 물난리에 저렇게 보내려니 더 그러셨겠어요.
천사의 나팔이 예쁘게 피었네요.

nama 2024-09-28 08:34   좋아요 0 | URL
반은 트럭으로 사용한 차량으로 서쪽과 동쪽을 오가며 생활을 같이 했었는데... 식구 하나가 사라진 듯해요. 그 심정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듯해요.

천사의 나팔은, 아파트 주민이 심은 것 같은데 단지 내 구석구석 예쁜 꽃들이 피어있어요. 마음씨 착한 분들 덕분에 마음에 빛이 드네요.

불한당들의 모험 2024-10-1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컥!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다가왔습니다.
물살 너머 있는 새하얀 빛이 구리구리한 빛을 뿜어내는 우리 차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라 제 맘까지 아프네요.

nama 2024-10-18 10:35   좋아요 0 | URL
트럭 겸 사용해서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그 상처 하나하나에 마음이 실렸었는데...모두 옛 이야기가 되었네요.
 

인터넷에 떠도는 '동요에 담긴 부동산 시장의 진리'라는 꼭지에 한참 웃다가 급 씁쓸해졌다.

1.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강/호수 주변에 위치한 집이 핵심 지역임을 암시

2. 기찻길옆 오막살이....역세권의 중요성

3. 두껍아 헌집줄게 새집다오.... 재개발 재건축을 노리는 전략

4. 곰세마리가 한집에 있어...최소 20평, 쓰리룸인 30평대가 주력

5.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그린벨트 지역과 같은 개발특수지역은 먹기가 쉽지 않음을 암시


1, 2, 3 은 언감생심,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집 값 동요 따위와는 전혀 상관 없는 위치에 있지만 그나마 4번이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고, 강원도 오지에 오두막이 있어 나름 기대를 품고 있는데 그것이 그러니까 말 그대로 깊은 산 속 옹달샘이라는 것.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달밤에 노루가 숨바꼭질 하다가

목마르면 달려와 얼른 먹고 가지요


노래의 깊은 산 속 옹달샘은 야생 동물이 물만 먹고 가지만, 실상은 노루 대신 고라니가 숨바꼭질 하듯 텃밭의 푸성귀를 할퀴고 간다. 며칠 집을 비울라치면 상추 모종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고구마순, 가지순, 고추순 마저 깔끔하게 잎사귀를 먹어치운다. 야생동물 초음파 퇴치기를 설치했더니 시도 때도 없이 지나가는 바람에도 울어대는 통에 소음공해를 일으킨다. 


그래도 개울이 있으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해당이 되려나. 알고보면 그것도 꿈만 야무지다.



폭 20미터가 채 안 되는 저 개울을 건너기가 어렵고 어렵고 어렵다. 비가 내리면 계곡물이 불고 물살이 세차 빈 몸으로도 건너갈 수 없다. 물이 빠져도 건너기 힘든 건 마찬가지. 납작한 잠수 시멘트 다리가 있으면 차량을 운행하여 짐이라도 쉽게 나르련만. 다리라도 하나 놔달라고 군청에 읍소한지 어언 16~17년. 응답없는 메아리. 매미/루사의 태풍 피해로 유실된 도로변에 산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고민 끝에 수백만 원을 들여 사진 속에 보이는 폰툰을 설치했다. 비가 많이 오면 바위에 묶여 있던 한쪽 밧줄이 풀리면서 맞은 편 물가쪽으로 밀려가 폰툰 유실을 막을 수가 있다. 그런데 얌전히 밀려가서 맞은 편에 자리잡으면 좋으련만 가끔씩 폰툰 몸체가 뒤집혀지기도 한다. 건장한 성인 남자가 벌레 뒤집어주듯 뒤집을 수 있는 있는 무게가 아니다. 체인 블록을 이용해 겨우 겨우 힘들게 뒤집어 주는데...저 일을 혼자 묵묵히 감당하는 남편을 보면서 '저이는 삼손이었구나' 새삼 감탄과 존경의 마음이 샘솟는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으로 보이지만 저 길을 오갈 땐 가능하면 장화를 신는다. 언제 어디서 뱀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 길 뿐이랴. 비가 많이 오면 전기가 누전이 되어 물을 쓸 수가 없다. 물 많은 동네에 물이 없다니...그렇다고 개울물 길어다가 화장실 변기통 채우기에는 몸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속 생활은 한번쯤 살아볼 만하다. 지방 소멸 시대에 작은 보탬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몇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야생을 겪어본다는 것. 하늘, 바람, 비, 눈, 별, 나무, 야생화...이런 것들이 주인공이고 인간은 다만 기생적인 생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봄철 양양과 간성(고성) 사이에 발생하는 양간지풍에 시달리기라도 하면 고해성사라도 하는 기분에 젖는다. 제 죄를 너그럽게 용서하시고...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북인도 레 지방의 산악지역에 덩그러니 위치한 곰파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고나 할까. 그리고 여행 욕구도 상당히 줄어든다. 청명한 밤 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들, 교교한 달빛에 서려있는 왠지 모를 오싹한 두려움, 시공간을 배분해서 들고나는 온갖 생명들과 그 짜임새 있는 질서, 칠흑 같은 밤. 여기 또한 이국의 땅. 도시와는 사뭇 다른 환경에서 불면증 없이 곤하게 잠자리에 든다. 다만 어려운 점이라면 역시 사람과의 관계. 인간 관계가 가장 어렵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은 역시 진리이지 싶다.


앞산 자락에 장막을 걷듯 내려 앉던 햇볕이 드디어 우리집 마당에 내려 앉는다. 빨래를 말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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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퇴직한 마당에 털어놓는 건데

나는 교원평가제 때
나에 대한 주저리주저리 서술형 평가를
한번도 읽은 적이 없다.
조롱 당하는 기분이 더러울까봐.

교원평가제 참여를 거부했더니
담당교사가 곤란하다며
사유를 적어야 한단다.
'교원평가제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쓰시오.
이후, 불이익 같은 건,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저항이었다.
퇴직하게 되니 비로소 입이 열렸다.
얼마 후 퇴직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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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9-13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김누리교수님 영상을 보고나서야 교원평가제가 분명히 문제라는걸 인식했어요. 그 전에는 그냥 이상하다고만...어쨌든 부끄럽네요.

2023-09-14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73년,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이야기이다.


어느 봄날, 학교에 갔더니, 오늘은 수업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란다. 예고도 없었고 설명도 없이 그냥 집으로 가라니 덜컥 겁부터 났다. 할 수 없이 친구들과 집으로 향하는데 괜히 눈물이 났다. 지금 같으면 수업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라고 하면 얼씨구나 할텐데 그땐 좀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친구들 역시 그랬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부모님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더 이상 묻지도 않았다. 하루종일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튿날 등교해보니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도 전날에 대해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 출신의 젊은 담임 선생님이 장학적금을 장려하면서 코 묻은 돈을 모으게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40여 분, 버스를 타도 40여 분. 당시 산 속에 있던 학교에 가려면 시내버스에서 내린 후 20여 분을 걸어야 했으니 걸어가나 차를 타나 그게 그거였다. 작은 키에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게 안쓰러웠는지 부모님은 매일 왕복 차비를 주셨다. 꼬박꼬박 받은 차비를 착실하게 모아서 장학적금으로 담임 선생님께 드렸다. 60명이 넘는 우리 반에서 금액으로 내가 2등을 했다. 얼마 후 담임 선생님이 서울로 아주 떠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낸 장학적금을 들고. 내가 우리 반 대표로 장학적금의 행방을 묻는 편지를 선생님께 썼다. 답장이 왔다. 학교에서 월급을 받지 못해서 우리가 낸 장학적금으로 하숙비 등을 지불했노라고. 부모님 반응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말씀을 안 드렸거나 이야기를 했어도 '그럴 수도 있다'라고 가볍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귀가가 늦는다고 학교에 전화를 하시던 까칠한 성격의 아버지가 그 일로 학교에 전화를 하지는 않았으니까.


중학교 첫 여름 방학. 방학 중 비상등교를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학교에 큰 일이 발생했다. 재단 이사장이 교실과 나란히 있던 이사장실에서 자살을 했다. 학교를 설립한 지 3년 차 -그러니까 나는 3회 졸업생이다.- 빚에 쪼들려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이사장 부인과 아들이 교내에 있는 사택에 거주하면서 학교 운영을 맡았다. 지금도 얼굴을 기억한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당시엔 몰랐으나 이후 하나하나 꿰게 되면서 전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교사들이 월급을 받지 못해 파업을 했었고, 월급을 받지 못한 담임 선생님은 우리들 장학적금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고, 이 난관을 이겨내지 못한 이사장은 자살을 했던 것이다. 교과서로는 배울 수 없는 세상의 한 단면을 경험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오죽하면 선생님들이 파업을 했을까. 오죽하면 어린 학생들의 코 묻은 돈에 손을 댔을까. 오죽하면 이사장이 자살을 했을까. 불의와 부조리에 맞선 목소리가 무시당하거나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을 때 힘을 합쳐 저항하는 것. 이런 것이 파업이란 것을 조금씩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돈을 떼어본 경험도 의미는 있었다. 투자할 때는 신중을 기할 것. 절대적인 믿음 같은 건 없다는 것. 이사장의 죽음은 좀 어려웠다. 그래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았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학교에서 교사들의 파업은 학생들에게 무엇인가 생각의 자국을 남긴다. 하루치 수업 이상의 교육 효과가 있다.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아이들이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노동자로 살아갈 아이들이다.


9월 4일 전국 교사들의 파업을 응원하며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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