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 입학까지의 공부는 시험 잘 보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중 국사 공부는 지금 생각해보아도 썩 괜찮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 세대는 국정교과서 세대이다. 국민교육헌장 암기로 지적 능력을 시험 받고 도깨비 뿔 달린 공산주의자들이 주위를 배회하던 시절, '자수하여 광명찾자,'는 구호 아래 철저한 반공교육-승공교육-멸공교육을 순차적으로 받으며 자라난 세대이다.

 

수능 이전에 학력고사가 있었고, 학력고사 이전에 예비고사가 있었는데, 나는 바로 그 예비고사 세대이다. 거의 전과목을 종합선물세트식으로 넑고 얇게 배워야 했다. 수학은 그때도 힘들었지만 한 일 년 전념해보니 그럭저럭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바로 국사 과목이었다. 말이 너무나 많은 과목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안한 방법은 교과서 암기였다. 어느 날 시험 문항을 분석해본 결과,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문장을 그대로 시험지 선다형 문장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부터 정밀한 정독으로 들어갔다. 국사책 한 페이지를 읽는 행위는 가히 종합예술행위였다. 눈으로는 책이 뚫어져라 한 단어 한 단어를 주시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그 글자의 위치를 각인시켰다. 그 결과 시험 문항에 나오는 문장을 보면 어느 페이지 상단 혹은 하단 몇 째줄에 위치한다는 게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단어 하나 바꾸어 출제해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문장으로 외운 게 아니라 그림으로 외운 것이다. 이름하여 시력암기법이었다.

 

단 두 번의 정독으로 가능한 공부법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30점 만점에 30점이 나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혹 틀렸더라도 한 개 정도.

 

그렇게 시험을 보고 나서 그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차피 오래 지속되는 공부법이 아니어서 오래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고등학교 때 공부한 국사과목은 내용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그저 공부방법만이 자랑스럽게 전리품인양 남아 있다. 나 이렇게 공부했노라고.

 

그렇게해서 대학에 들어갔더니 1학년 때 10.26 박정희 서거, 2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으로 이어지고, 졸업하니 과외금지라는 기상천외한 시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과외는 범법행위였으니 나는 당시 범법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물론 겁을 먹고. 어떤 시대였는데...

 

나의 두뇌에는 시험용 두뇌와 진짜 두뇌 두 개가 있다. 국정 교과서는 시험용 두뇌가 담당했다. 그간 정신분열증을 앓지 않고 잘 살아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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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9 1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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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5-10-09 17:19   좋아요 0 | URL
암기력이 좋다니....그건 절대 아니구요. 시력이 좋았어요. 지금도 나쁜 편은 아니에요. 노안이 오긴 했지만요.

2015-10-09 17: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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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9 2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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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9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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