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이라서 뒷북 치는 기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어서 아주 조금만 베껴놓으려고 한다.
















p.38~39

 "어머니와 그 스티븐이라는 사람 - 그들이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에 슬퍼요. 그들은 어렸고,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어요 -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뭐라고 지을지 이야기하고,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두 사람은 결코 서로를 잊지 못했죠. 그래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해서 살았던 내내 아버지가 어머니의 마음에 들지 않는 뭔가를 하면, 그때마다 어머니는 스티븐을 떠올리고는 그가 그 상황에서 얼마나 훌륭했을지 생각했을 거예요. 그리고 스티븐의 아내라는 그 루스라는 여자도 - 아마 같았을 거예요. 그녀가 그를 실망시킬 때마다 그는 예쁘고 발랄했던 사라를 떠올리며 두 사람이 같이하는 삶은 얼마나 멋졌을지 생각했겠죠. 그러니 두 부부는 평생 방에서 이 유령들과 함께 살았던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슬퍼요. 모두에 대해 슬프지만, 특히 유령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당신 아버지와 루스가 슬퍼요."


p.429

 "아니, 그건 악이 아니야, 래리. 부서진 사람들이지. 부서진 사람이 되는 것과 악이 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혹시 네가 그걸 모른다면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부서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내가 네게 이걸 말해주는 이유는, 너는 그런 부서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살면서 운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야,"


p.433

 "이 글을 읽었던 게 잊히지 않는데 - 오래전에 읽은 거지만 - 그 글에서 유명한 영화감독이 말했어. 대화보다 더 섹시한 건 없다. 나는 늘 그걸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너와 루시가 하는 게 그거야 - 대화를 하지. 좋아, 이제 잘 들어, 보비.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마. 그런 대화는 하지 마. 그렇게 하면, 서로 마음을 고백하기 시작하면, 토끼처럼 섹스를 하게 될 테고, 너희의 세상 전체가 무너져내릴 거야. 마거릿이 그것 때문에 죽게 될지도 모르고, 심지어 윌리엄도 죽게 될지 몰라. 그러니 하지 마, 보비.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 그러지 마."

 "알고 있어. 하지만 그녀를 원해, 지미. 오, 맙소사."

 "이겨내야 해.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내 말 새겨들어. 내가 유경험자야. 그리고 너를 아는데, 너는 그 사실을 끌어안고 살 수 없을 거야. 아주 어렵겠지만, 그녀를 계속 사랑하면서 살 수는 있어. 하지만 그녀를 안으면, 그런 너로는 살 수 없을 거야. 너는 밥 버지스야. 나는 너를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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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6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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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맛 소설. 카사노바의 추락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소설로 읽히는 짜릿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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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부모조차 편이 되어주지 못했던 한 불우한 남자가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기 위해 긴 여정에 나선 이야기.( 이 문장을 생각해내느라 며칠 잠을 설쳤다.)



다음은 가장 상징적인 대목.


p. 264~265

  렉스가 말했다. "내가 엘리자베스를 잃고 가장 아쉬워하는 게 뭔지 아시오?"

  모린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는 거요."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뇌종양이었잖아요, 렉스. 렉스가 어떻게 싸울 수 있겠어요?"

  "의사들이 엘리자베스가 죽을 거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포기했소. 우리 둘 다 포기했지요. 결국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리란 건 나도 알지만, 엘리자베스를 내가 얼마나 붙들고 싶어하는지 보여 주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나는 그때 분노했어야 옳아요, 모린."

(중략)


  그 대화가 모린에게 오래 남았다.



아내(혹은 남편. 혹은 아들, 딸. 혹은 엄마, 아버지. 혹은 친구)가 치명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비겁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본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는 것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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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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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거칠게 말하면, 사랑을 떠나보낸 여인의 자기비판적인 반성문. 이 책의 마지막 글자까지 읽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사랑에 대한 고찰을 소설이라는 형식에 담아낸 이 소설은 독특하다. 한 권의 철학서 같기도 하고, 예술이론서 같기도 하고, 길고 긴 반성문 같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동어반복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면서도 결말엔 시치미 뚝 떼는, 장난기 가득하고 배짱 두둑한 한바탕의 회오리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어쨌냐고? 학구적이고 철학적인 세계를 넘나드는 경험에 감탄하다가, 술 취해서 같은 말 되풀이 하는 주사꾼의 기나긴 넋두리 같은 동어반복에 질리기도 하다가, 애틋한 첫사랑의 추억을 소환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곱씹기도 하는, 블록버스터의 세계....작가가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말을 온통 쏟아놓은 작품에 그저 허우적거렸다고나 할까. 풍경에 압도 당하면서도 진저리를 내며 끝까지 고지를 향해 걸을 수밖에 없는 등반이라고나 할까. 한번 풍덩 빠져서 며칠 허우적거리는 맛이 각별하다.


마음에 착착 달라붙는 표현들이 적잖은데 그중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기면...


p. 272~273

" 철학에 주제라는 건 없어. 철학이 우리에게 뭔가 삶의 윤리적인 지침을 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웃기는 거야. 물론 어떤 지침인가를 주긴 하지. 그것은 지침이 없다는 지침이야. 사람들은 철학이 무엇인가 적극적인 것을 말해 주기를 바라. 철학은 그러한 것을 내재하고 있지 않아. 철학은 이를테면 텅 빈 거야. 양파를 벗겨 나가면 거기에 핵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철학도 벗겨 나가면 그 안에 무엇도 내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양파가 단지 여러 겹의 표층만으로 의미 있듯이 철학도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형식에 의해서 유의미한 거야. 그것은 주제를 지니지 않지만 주제들을 명석하게 만들지. 그러고는 그 주제들을 증발시켜 버리지. 단지 그거야. 이제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이나 윤리학 등을 포기해야 해. 멋진 말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

  사람들은 철학에는 무슨 좋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철학은 내게는 좋은 것이었어. 단지 무슨 좋은 것들이 없었을 뿐이야 그러니 내가 너한테 이리저리 말해 줄 수 없는 이유를 알겠지? 철학 하는 첫 번째 마음가짐은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데 있어. 철학은 그저 현존하는 사건의 명료화를 기할 뿐이야. 철학은 명료화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잘난 소리를 하기 위해 철학을 해서는 안 될 거야. 과학은 단지 현상의 포착이야. 소위 사태의 발생과 비발생의 총합이지. 그리고 철학은 거기에 방어선을 치는 철책이야. 다른 헛소리들이 그 안에 못 들어오도록.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누누이 말하는 한계야."

  이것이 그가 철학뿐만 아니라 삶에 부여하는 의미였다. 나는 이 말을 우리 이별 전에 듣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말 자체가 우리 이별의 내재적 동기였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그의 선고.

  "삶은 무의미하다는 의미밖에는 없어."



이렇게 읽어도 저렇게 읽어도 의미가 샘솟는 듯한 작품을 이렇게 거칠게 마무리하다니... 

얼마전 별세하신 시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불현듯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오듯, 이 책에 대한 잔상 역시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불시에 떠오를 것이다. 일단은 완독에 의미를 두며 작가님의 친절에 대한 인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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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ama 2024-01-01 11: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루피닷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도 책탑을 쌓아봤다, 일괄 구매한 헌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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