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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 4백 년 전에 부친 편지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6년 9월
평점 :
사랑은 그렇게 찾아들었다. 어여쁜 소화꽃을 앞세우고 뽀얀 얼굴, 아리따운 자태를 살포시 내보이던 그 모습은 숨을 멎게 하고 심장을 떨어트렸다. 소화꽃이 아니라 상사꽃이라고 해야할까보다. 고이 갈무리한 그 꽃은... 붉은 색이었다.
사신은 붉은 색을 좋아한다. 붉은 피와 같은 처연한 붉은 색. 팔목수라는 옥황상제의 정원지기라는 관을 쓴 사신이었다.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팔목수라는 비틀린 웃음을 흐느꼈다. 이대로 죽어버리리.. 만 년의 세월을 찾아다녔다. 하늘의 정원에서 소화꽃을 훔쳐 달아난 계집을. 이젠 도둑을 잡겠다는 의기도, 자신이 관리하던 정원이 흠집났다는 분노도 세월에 침식되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거라고는 허기진 배와 깡마른 몸,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 뿐.
응태와 여의는 서로 사랑했다. 순탄치 못한 운명이었다. 응태는 명이 짧았고, 여의는 죽을 운명을 거스르고 살아났기에 세상과 인연을 맺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둘은 운명이었던 거다. 응태는 여의를 만나기 때문에 일찍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다는 운명이 나왔고, 여의는 응태를 만나야 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랬기에 양가 부모님의 가슴 아픈 고민과 조치들은 빛을 바랬다. 둘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다.
단 하루를 살아도 그대와 함께이고픈, 몸은 죽어도 사랑은 죽지 않고 4백년을 넘게 피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댓가는 혹독했다. 가슴 떨리게 고운 마음은 차게 식은 몸에 남았고, 홀로 남은 여인은 부서지는 심장을 부여잡고 떠나는 남편에게 깊은 연모의 정을 편지로 남겼다.
윤회는 끝나지 않는다는 하운 스님의 말은 차라리 위로였다. 둘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졌을까. 다음 생에는 부디 팔목수라의 눈에 띄지 말기를.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팔목수라 역시 애처롭지만 이제 그 복수는 그만하길. 팔목수라 역시 죽어지면 다시 돌아갈 것이니.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언약은 그녀의 편지에, 무덤가에 피어있는 능소화에 남아 처연한 붉은 꽃을 가득 피웠다.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