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온 초코파이 :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스피노자를 만만하게 보고 덤볐다가 학을 떼고 물러난 적이 있다. 스피노자는 항상 문장을 끝내면서 " ...... 이로써 이 논증은 증명되었다 " 라고 자신있게 말하지만 그럴수록 내 밑천은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아니, 도대체 뭐가 증명되었다는 거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피노자를 통해서 어렴풋이 알게 된 사실은 스피노자는 유물론자'에 가깝다는 점이었다(물론 내 주장은 오독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정신에 대한 신체의 우월성을 강조한 철학자였다. 영어 단어 physical은 육체와 함께 물질(물리적-)이라는 뜻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체는 물성을 띤 물질이다. 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는 윤리학이면서 동시에 물리학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의 << 에티카 >> 원제가 <<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 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 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하학이 물리학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스피노자 식 방법 서설은 물리학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인간 관계를 물리적 작용 혹은 물리적 적용으로 이해하게 되면 인간에 대한 집착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뉴턴의 운동 기본 법칙 3가지는 고스란히 인간 관계에도 적용된다. 인간과 인간은 마음을 나누기보다는 관성과 가속도 그리고 작용 반작용의 성질에 따라 대응한다. 오리온 초코파이 광고 < 정 > 시리즈는 마음이 사물(물성)과 접촉할 때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여기서 초코파이는 마음의 환유이다. 초코파이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만드는 오브제'다. 스피노자 씨 말씨를 흉내 내자면 :
이로써 마음은 초코파이와 접촉하면서 情을 표현한다는 내 논증은 증명되었다. 한국인은 내면에 속하는 마음을 외면으로 끄집어내어 전달하는 방식으로 얼굴(표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 얼굴은 마음의 창 " 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물난리가 나서 집이 떠내려가면 우선 대성통곡부터 한다. 사고 수습보다는 감정 표출이 우선한다. 반대로 일본인은 놀랄 만큼 차분한 표정으로 대응한다. 감정 표출보다는 사고 수습이 먼저다. 일본인이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집을 보며 대성통곡하지 않는 이유는 되도록이면 남을 보지 않으려는 문화적 습속에 있다.
일본의 행인들은 다른 행인을 보지 않는다. 특히 한국에서라면 행인이나 인근의 타인들을 제 맘껏 쳐다보고, 지긋이 보고, 노려보고, 째려보고, 싱긋거리면서 보고, 구경거리처럼 보고, 느물거리면서 보고, 되돌아 뒷모습까지 챙겨 보지만 일본의 거리에서 일본 행인들이 시선을 처리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1). 그러니까 일본인이 얼굴 표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일본 특유의 남을 보지 않으려는 문화적 습속 때문이다. 타인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무례에 해당되듯이 마찬가지로 얼굴 표정을 통해서 감정(마음)을 표출하는 것도 삼가해야 할 것에 속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렇기에 기타노 다케시 영화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표정 변화가 없다.
반면에 한국 영화 속 배우들은 지나치게 웃거나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지나치게 운다. 한국 사회는 타인의 얼굴을 지나치게 살피거나(안색이 어둡다, 핼쓱하다, 얼굴이 좋아보인다, 기타 등등) 과장된 표정으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리는 신파 문화'에 속한다. 타인의 마음을 얼굴 표정에서만 읽어내는 방식은 촌스럽다. 요시다 겐코의 지적처럼 마음이란 사물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말투, 말씨, 말의 활용뿐만 아니라 예와 의, 격 그리고 사물을 다루는 방식과 그가 소유한 소품을 통해서도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개성을 만들며 이 개성들의 총합이 곧 문화를 형성한다.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얼굴과 표정을 관찰하려고 든다. 안색을 살피는 것은 때론 무례일 수도 있다. 병색이 완연한 환자에게, 환자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안색을 묻는 것은 무례한 짓이 아닐까. 김영민의 말처럼 때론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다.
1) 김영민 << 집중과 영혼 >> 남을 보지 않는다(1),(2),(3),(4),(5),(6)
일본을 '시선사회' 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말은 남들에게 보내는 시선을 최대한 자제하는 사회로, 서로의 시선을 조심하는 사회라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종류의 조심 속에서, 다시 차분한 사회의 오의(奧義 :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지니고 있는 깊은 뜻)를 읽어낼 수 있다. 거꾸로 생떼 쓰듯이, 행짜를 부리듯 나번득이면서 남들을, 남의 사생활을 엿보고 간섭하려는 사회라면 그것은 반시선사회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몸, 그 인격과 영혼에 대해 영영 닿을 수 없는 아득한 염려와 배려가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회일 것이다. 다른 수많은 나라에 비하자면 한국이 어느 정도 살 만한 곳이라는 기초적 사실을 기억하더라도,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은 더할 나위 없는 '반(反)시선사회' 다 ( 49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