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파 벳 H 는 의 성 어 다 :
덕혜옹주와 레 미제라블
명성 황후를 민비'라고 말했다가 교양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 적이 있다. " 에이치 ! " 재채기를 할 때마다 알파벳 H 소리가 나서 H가 의성어가 아닐까 라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목소리를 가진 H씨가 나에게 " 일본놈이 명성 황후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니 민비라는 명칭 대신에 앞으로는 명성 황후라고 해야 해요. " 라고 따끔한 지적을 했다.
그런데 나는 명성 황후라는 이름이야말로 시대착오적 근성이란 생각이 들어서 대화 내내 끝까지 민비'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민비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민비가...... 처음에는 나를 교양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던, 재채기를 할 때마다 에이치라고 소리쳤던 H씨는 급기야 나를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되는 양 쏘아보기에 이르렀다. 무능해서 나라를 망친 왕족에게 황후 ?! 박근혜 뒤에 무녀 최순실이 있었다면 민비 뒤에는 무녀 진령군1)이 있었다. H씨의 주장은 마치 나라를 망친 박근혜에게도 예우 차원에서 박근혜 각하 _ 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나는 박근혜에 대한 예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근혜야, 보고 있니 ?
그들은 < 나라를 위해 싸운 왕족 > 이 아니라 오로지 < 나를 위해 싸운 왕족 > 에 불과했다. 그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면서 맺은 한일병합조약 조문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불운의 구한말 왕실이라는 코스프레가 얼마나 혐오스러운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해도 나라를 걱정하지 않았다. 하물며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자기 가문의 안위에만 관심을 가졌다. 조선 왕실이 일본 측에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다. 한일병합조약 제 3조는 이렇다. “ 황제, 황태자, 후비, 후예에게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
여기에 덧대어 제 4조는 왕실과 그 후예들이 품위 있게 살 수 있도록 든든한 연봉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나라가 망하든 말든 일본 측과 연봉 협상에 올인한 것이다. 회사는 망해서 구조 조정이 한창일 때 사장이라는 놈이 자신의 연봉을 높게 책정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과 같다. 실제로 조선 왕실은 일본에서 주는 은사금으로 넉넉한 삶을 살았다. 일본 정부는 일본 천왕 왕실 다음으로 가장 많은 세비를 조선 왕실에게 주었다. 그뿐인가. 영친왕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 장관에게 읍소했다고 한다. “내 지위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 아무쪼록 지금과 똑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소 ? ”라고 물었다고 한다.
한일병합조약 전문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위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함.
융희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메이지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
영화 << 덕혜옹주, 2106 >> 를 보다가 뚜껑이 열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한말 왕실을 극단적으로 미화하는 영화를 보며 눈물이나 흘리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친일파가 아닐까. 우리는 왜 실패한 왕의 얼굴에 침을 뱉고 목을 베지는 못할 망정 그들을 숭배하고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대한민국은 왕정이 아닌 공화정 체제이지만 공화정 시민 일부는 여전히 왕정복고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는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가진 권력자였지만 사실은 왕이었고 박근혜는 왕비'였다. 그리고 박사모는 구한말 황국 신민이다. 그들은 공화정에 살고 있으나 왕정을 그리워하는 집단인 셈이다.
박근혜 정권 내내 박빠를 비판했던 서민 교수는 문재인 정권에서는 문빠를 공격한다(항간에 떠도는 " 서민은 박사모 회원 " 이라는 소문은 말 그대로 억지다. 그는 누구보다도 박근혜 정부 내내 박근혜를 비판했던 인물이다. 내가 그를 비판하지만 비난하지는 않는 이유이다). 박빠와 문빠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판단에서 나온 결정인 것 같다. 하지만 박빠와 문빠는 성질이 다르다. 박빠는 왕정을 복원하려는 자의 욕망이 반영된 집단인 반면에 문빠는 공화정 시민으로서 공화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집단이다. 문빠는 문재인을 동료, 동지, 친구, 멘토와 같은 수평적 관계로 인식할 뿐이지
그를 섬겨야 할 왕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빠가 왕정의 유령 집단이라면 문빠는 공화정 시민이 뭉친 집단이다. 19대 대선 때 문재인 낙선 후, 뮤지컬 영화 << 레 미제라블 >> 이 한국에서만 유독 흥행에 크게 성공한 이유는 문빠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공화주의에 가깝다는 데 있다.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자 왕정의 폭압을 피해 20여 년 동안 망명과 추방 생활을 반복했던,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던 빅토르 위고가 쓴 걸작이 << 레 미제라블 >> 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봉 당시 대한민국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한 뮤지컬 영화 << 레 미제라블 >> 은 낙담한 공화주의자인 문빠-들을 향한 위로이자 선물이었다.
서민의 진단은 틀렸다. 대한민국은 공화정이지 왕정 국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공화 시민이 공화정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광기가 아니며 정당한 의사 표현이다 ■
1) 진령군은 임오군란을 맞아 혼란과 공포에 빠진 명성황후에게 접근해 앞날을 예언하는 이능을 보여주며 홀렸던 무당이다. 이후 명성황후는 그에게 크게 의지해 국가적인 사안을 비롯한 모든 의사결정에서 그의 의견을 주로 참고했다. 무당에게 '진령군'이라는 군호가 내려졌다는 정식 기록은 없지만 당대 조선인들은 무당을 가리켜 진령군이라고 불렀으니, 무당이 스스로를 진령군으로 칭했으며 왕과 왕비가 그것을 묵인했음은 분명하다. 당시 천민으로 취급받던 무당은 물론이고 여성이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과 같이 왕족이나 받을 수 있었던 군호를 자칭했던 사례는 조선 역사에서 진령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파격적으로 신분이 상승한 진령군은 명성황후를 뒤에서 조종하며 국정을 농단했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재조지은'을 기리기 위해 한양에만 두 군데나 관왕묘가 생겼음에도 다시 북쪽에 진령군이 모신다는 관우의 사당이 새로이 세워졌다. 왕실에서는 굿판이 끊이지 않았으며 고대 중국의 영웅을 향해 현재 조선의 안녕을 기원하는 아이러니한 풍경도 벌어졌다. 국가의 방향을 책임져야 하는 고종의 뒤에는 명성황후가 있었고, 명성황후의 뒤에는 진령군이 있었던 것이다( 『 조선을 홀린 진령군 』 책소개 글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