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이후, 이제 와서 고백하거니와 :
나는 친문보다는 비문이 좋다
롤랑 바르트의 << 사랑의 단상 >> 에서 나를 사로잡은 문장은 "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 이다. 이 문장은 문법에 취약한 사람이 판단해도 뜻을 알 수 없는 어색한 문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고 ?!
바르트는 관용구처럼 사용하는 나는 (배)가 아프다, 나는 (팔)이 아프다, 나는 (다리)가 아프다 _ 같은 문장 구성에서 괄호부 안에 들어갈 대상으로 1인칭 화자의 신체 부위가 아닌 타자인 " 그 사람 " 을 넣는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바르트가 이 비문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자아와 타자를 동일시해서 그 경계가 무너지는 증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자아는 그 사람이 아프면 내 팔이, 내 다리가, 내 배가 아픈 것처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내 오장육부이다. < 흉터 > 가 과거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기호라면 < 눈물 > 은 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한 기호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 아니라 팔이 잘려나가는 아픔 때문에, 다리가 뽑히는 통증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다. 그 통증은 마인드보다는 피지컬의 영역이다. 바르트가 사랑의 아픔은 본질적으로 환상통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바르트는 비문의 힘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징하게 설명한다. 그래서 나는 문장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비문을 경멸하며 기계적으로 정문(正文)을 강조할 때마다 쓸쓸한 생각이 든다. 언어는 순결할 때보다 오염될 때 생명력을 얻는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하나같이 히마리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공교롭게도 문학을 다루는 사람들만 모르고 있다. 하여,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련다. 이런 빙딱 ~ 페르난도 페소아 또한 << 불안의 책 >> 에서 이 사실을 지적한다. 발췌문이 조금 길지만, 내 이웃들이 그 찰나의 따분함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돼먹지 않은 무뢰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러니까, 에헴. 교양인이다.
나의 글쓰기 체계는 두 가지 원칙에 의거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훌륭한 고전주의 작가들의 전통을 좇아 나는 즉시 두 원칙을 좋은 글쓰기의 기반으로 삼는다. 첫째, 느끼는 것을 말할 때는 정확히 느낀 대로 쓴다. 분명하다면 분명하게, 모호하다면 모호하게, 혼란스럽다면 혼란스럽게 쓴다. 둘째, 문법은 도구일 뿐, 법칙이 아님을 명심한다......(중략) 문법은 언어 사용을 규정하면서 옳고 그름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동사에는 자동사와 타동사가 있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느낀 것을 사진처럼 남기기 위해 자동사와 타동사를 일부러 바꾸어 쓰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불분명하게 보는 대신 그렇게 한다. 내가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 " 나는 존재한다 " 고 말할 것이다. 내 영혼의 개별적인 실체성을 강조할 때는 "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 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성스러운 능력이 있는 존재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 존재한다 " 는 자동사를 타동사로 바꾸어 " 나를 존재시킨다 " 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문법을 초월한 승리자로서 " 나는 존재시킨다 " 고 말하리라..... 자신이 느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문법에 복종하라
불안의 책, 118쪽
페소아의 지적을 받아들인다면 롤랑 바르트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문법에 복종하는 대신 문법을 초월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판사에게는 헌법이 최고 권력이고 군인에게는 군법이 최고 권력이듯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문법이 최고 권력이지만 롤랑 바르트는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며 조까라마이싱을 외쳤던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문장은 종종 문법을 초월할 때 발생한다. 셰익스피어 문학이 지금에서야 위대한 문학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그 당시에는 평론가들로부터 비문투성이라는 조롱을 받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가 김애란의 << 바깥은 여름 >> 이라는 소설을 비판하는 대목은 김애란의 문장은 날것이 주는 비릿한 맛이 휘발되었다 _ 라는 점이다. 김애란 문장은 모양만 예쁜 쿠키 과자 같다. 그것은 발효된 숙성이 아니라 설익은 복종이다. 문장이 문법에 포섭되는 순간, 생명력은 상실된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문단 마피아들이 권력을 얻는 이유는 문법도 법이기 때문이다. 법을 장악하는 자는 권력을 얻는다. 신춘문예를 목적으로 작품을 쓰는 문창과 졸업생들의 문체는 문법적으로 나무랄 데 하나 없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서서 죽은, 딱딱한 나무 같다. 그들에게서는 날것이 주는 맛이 없다.
언제부터 문학이 커피 향이나 딸기 향만 나는 장르였나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냄새는 배제된 채 향기만 강조하는 문학은 살롱 문학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냄새를 부끄러워한 나머지 독한 향수만 뿌려대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라 풍각쟁이다. 요즘 유통되고 있는 한국 문학에서는 비린내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모두 다 방부제 처리가 된 모양이다. 문학은 위생학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