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뱅이 클럽 모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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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모임에서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다. 7시간 동안 떠들었는데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목소리가 훌륭하세요. 목소리 괜찮네 _ 가 아니라 목소리가 훌륭하다니.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끄러워서 전율하는 내게는 예상치 못한 럭키 펀치'다. 물론 (주거나 받거니 하는 칭찬 도모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기는 하나) 불치병 환자에게 주는 가짜 환약이지만 어찌 되었든! 압니다, 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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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택시는 어디 갔을까 ? 도로에 빈 차는 보이지 않았다. 날은 춥고 기다리다 지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낮에는 꼴뚜기처럼 나왔는데 새벽이 되자 오징어로 둔갑하여 걷는데 자꾸 흐느적거리게 된다. 나중에는 오징어에서 문어가 되었다. 왜 항상 꼴뚜기로 나가서 문어가 되어 거리를 방황하는 것일까. 꼴뚜기, 오징어1), 문어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소리지만 셋 다 생김새는 비슷한데 오징어(烏賊魚)나 문어(文魚)는 어류를 뜻하는 접미어 魚로 끝나는데 왜 꼴뚜기는 한자가 아닌 순우리말인 " - 기 " 로 끝나는 것일까 ? 한자어 魚로 끝나는 물고기 이름과 순우리말인 물고기 이름, 예를 들면 물텅벙이(아귀) 갈치 멸치 넙치 개복치 볼락 우럭 쏨뱅이 쏘가리 송사리 미꾸라지 망둥이 가자미 따위의 생김새를 서로 비교 평가하면 답은 나온다. 초등학생에게 물고기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그려지는 그림의 형태2)를 간직한 물고기는 대부분 - 魚 로 끝난다. 그 옛날에 한자를 독점했던 기득권 - 양반 - 남성 계급 - 어르신'이 보기에 생김새가 예쁜 물고기에는 한자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모양이 궤궤하지 못하고 기기하거나 기괴하게 생긴 물고기(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는 한자 작명을 거부했다. 그렇기에 최초의 이름인 순우리말 이름을 가진 물고기는 한자의 공습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어와 오징어는 ? 꼴뚜기와는 달리 이 녀석들은 양반을 상징하는 먹물이 나오잖아. 참...... 먹물스러운 태도다. 예쁜 것만 보면 환장하는 버릇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됐고 ! 충무로에서 서대문 로터리까지 행군했다. 다행히 빈 차를 발견하여 구조되었다. 얼추, 1시간 정도는 걸었던 것 같다. 택시 기사님이 백마 탄 왕자님처럼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거스름돈은 통 크게 기사님에게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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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노포(老鋪) 두 곳을 들렀다. 한 곳은 50년째 한자리에서 영업 중이고 다른 한곳은 30년 된 곳이다. 나이가 들다 보니 같이 늙어가는 점포만 찾게 된다. 노포라는 단어 조합이 마음에 든다. 늙을 老, 가게 鋪. 정확한 쓰임새라면 " 가게 " 는 무생물이니 老가 아니라 古 가 되어야 하지만 이 단어는 허름하고 오래된 가게에 생명을 부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맛은 사실 허구의 세계이다. 눈을 가린 채 코를 막고 (사과라고 속이고) 양파를 주면 피실험자는 그것을 사과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씨 없는 사과라며 맛있게 먹는다. 같은 수작으로 수분을 뺀 수박을 주면 소고기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맛있단다. 내가 노포를 찾는 이유는 맛 때문이 아니라 장소애(topophillia) 때문이다. 필동해물에서 모듬 해물이 맛있는 이유는 싱싱한 해물이 아니라 초라하게 늙어가는 가게에 있다. 그것은 일종의 늙어가는 것에 대한 지지이며 초라한 것에 대한 응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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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이 5세 수준이었던 오세훈이 서울시장이었을 때 한 짓은 피맛골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그가 내놓은 변명이 꽤나 아름다웠다. 피맛골은 길이 좁고 구불구불해서 불이 나면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습니다 ! 오세훈 뜻대로 구불구불한 피맛골은 직선으로 정비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노포가 아니라 대나무였다. 죽순도 아니면서 죽순처럼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고층건물을 보니 우후, 개에게 죽순 꼴 ! 피맛골이 개발되면서 그곳을 떠났던 노포를 찾아 알음알음 종로 어느 빌딩에 있다는 가게를 찾은 적이 있다. 그때 먹은 음식은 이때 먹는 음식과는 달랐다. 30년, 한결같이 같은 맛을 냈던 주인의 손맛은 변함이 없었으나 신기하게도 맛은 변해 있었다. 당연히 그 많던 손님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 이 가게는 문을 닫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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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미화 사업이라는 이유로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들은 사라졌다. 이제 서울이라는 도시는 직선만 남은 세계가 되었다. 바둑판 도시는 아름답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자연친화적 환경에서 멀어지게 된 이유는 바로 직선이 난립한다는 데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곡선의 소멸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하자면 서울은 곡선은 없고 직선만 난립하는 도시다. 자연에서 곡선은 속도는 늦추는 역할을 담당한다. 경사진 산길이 대부분 구불구불거리는 형태인 것도 속도를 늦춰서 추락의 위험을 감소하기 위한 전략이다. 강도 마찬가지다. 곡선은 물 흐름을 늦춰서 강 밑바닥이 깊게 파이는 것을 방지한다. 직선이 악셀레이터 역할을 담당한다면 곡선은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서울이라는 도시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 같다. 곡선을 담당했던 골목이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런 도시에 사는 도시인은 걷는 속도가 빨라진다. 이 속도는 도시인의 자발적 선택은 아니다. 도시인이 지방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살면 서서히 보통의 걸음으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도시에서 걷는 속도는 비정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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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러니까 이 글의 핵심 요약을 20자로 줄이자면 이런 말이다. 페루애의 목소리는 훌륭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