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세 시가 되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마법처럼 느려진다. 오후 세 시에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한가한 사람들이고 새벽 세 시에 깨어있는 이는 걱정거리가 많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온다는 최승자의 독백처럼 이렇게 눈을 감을 수도 없고 이렇게 눈을 뜰 수도 없을 때 세 시'가 온다. 그러니까 새벽 세 시는 사람 나이로 치면 서른 살'이다. 나이 서른은 젊은 시절의 마지막 시기라는 점에서 쓸쓸한 황혼이다. 이 시간이 가장 외롭다. 가장 깊고, 가장 춥고, 가장 조용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 거리를 걷는 이는 오로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뿐. 주정뱅이는 세 시가 주는 고독한 정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부류'다. 그렇기에 새벽 세 시에 불 켜진 집 창문을 보면 위로가 된다. 그것은 일종의 " 불면의 연대 " 이자 " 고통의 공감 " 이다. 깨어 있으라. 누구든 깨어 있으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짧은 단편 << 깨끗하고 밝은 곳 >> 은 늦은 밤, 카페의 풍경을 담는다. 늦은 밤 카페 손님도 모두 돌아갔는데 노인 한 사람이 남아서 술을 마신다. 그 노인은 지난주에 자살하려다 실패한 이다. 그 노인은 새벽 3시까지 카페에서 앉아 술을 더 마시고 싶어 하고, 젊은 웨이터는 3시 전에 카페 문을 닫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젊은 웨이터보다 나이 든 웨이터는 그 노인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잠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빛이 필요하니까, 캄캄한 밤바다에서 좌표를 잃고 난파된 배는 등대의 빛이 간절히 필요한 것처럼. 단선적인 내용에 짧은 분량의 단편이지만 읽는 내내 벼린 칼끝에 베인 듯 아프다. 책을 덮고 나면 걸작 반열에 오를 작품이라는 제임스 조이스의 성찬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게 된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새벽 세 시'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