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할수록 빛난다
불교에서는 전생(前生)에서 쌓은 < 업보 > 에 따라 후생(後生)에서 행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후생은 죽은 뒤에 오는 생애'이니, 현생은 전생 때 쌓은 업보의 결과'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인과응보-서사'를 믿지 않는 편이다. 불행은 지난날에 저지른 악업에 따라 그에 해당되는 과보를 받는 일도 아니요, 행복 또한 선업에 따른 과보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날아가는 새를 향해 날아오는 야구공처럼( 혹은 무심코 던진 돌에 연못 속 개구리가 맞아죽듯이) 불행은 " 무의미한 충돌 " 에 불과할 것이다. 그 야구공이 새가 전생 때 쌓은 업보의 현현이 아니듯이, 불행의 원인 또한 인과의 결과가 아니다.
불행은 가능성 희박한 우연과 가능성 희박한 우연이 서로 무의미한 충돌로 인해 빚어진 혼선이다. 원인은 없고 결과만 존재하는 것이 불행이다. 그렇기에 < 불행 > 이라는 서사는 항상 예측 불가능하며, 냉정하고, 인과응보와는 별다른 연관이 없다. 만약에 어떤 불행이 예측 가능하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운명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오이디푸스는 불행을 당한 자가 아니라 운명에 갇힌 자'다. 반대로 프란츠 카프카는 불행을 다룬다. 단편 << 변신 >> 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눈을 떴을 때 직면하게 되는 것은 " 원인 없는 결과 " 이다. 그는 자신이 왜 흉물스러운 벌레가 되었는지(- 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장편소설 << 심판 >> 의 주인공 요제프k도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설명이 불가능한) 어느 날 아침 두 명의 감시인인 뷜렘과 프란쯔에 의해 자기 하숙집에서 체포 당한다.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은 소설 << 성 >> 도 마찬가지'다. 논리의 세계가 인과 관계를 밝히는 과학적 사고에 기초한다면 카프카 문학을 관통하는 것은 비논리의 세계이다. 그것은 예측불가능하고 불확실하며 무의미하다. 카프카 문학은 기승전결에서 " 기 - 승 - 전 " 이 제거된 채 미완성으로 끝나는, 무작위로 작동하는" 결 " 만 남는 이야기의 세계다.
나는 범죄 영화가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지만 사랑 영화(로맨스 영화가 아닌)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서는 못내 아쉽다. 왜냐하면 사랑의 본질은 행복보다는 불행의 본질에 가까우니까. 사랑은 가능성 희박한 우연과 가능성 희박한 우연의 충돌이 아닐까 ? 이 조우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모두 제각각이다(happy families are alike. every unhappy familiy is unhappy in its own way - 안나 카레리나) 라는 톨스토이의 문장을 살짝 비틀자면 행복은 모두 비슷해서 설명이 가능하지만 불행은 불행한 이유가 모두 제각각이어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다룬 영화가 관객에게 많은 설명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기, 승, 전이 없는 끝만 남은 영화가 좋다. 사랑 영화의 본질은 끝이 주는 위로이다. 설명이 가능한 사랑은 신파다. 그것은 잔인할수록 아름답고 실패할수록 빛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