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 인 의 소 울 푸 드 :
한국 문단에게 : 삼계탕 드실라우 ?
대한민국은 대대로 농경 사회이다 보니 노동자에게 삼복 더위만큼 " 개 같은 날의 오후 " 는 없을 것이다. 그늘 없는 논밭에서 일하다가 살인 더위에 쓰러지는 사람 많았으니 복날은 흉일이라 여겨 씨 뿌리기, 여행, 혼인, 병 치료 등을 삼가는 풍습이 있었다.
복날에는 그늘에서 쉬면서 계삼탕으로 몸보신을 하며 기운을 차렸으니 몸이 편한 날이라. 일종의 폭염주의보에 따른 임시 공휴일인 셈이다. 그때 먹던 계삼탕이 지금의 삼계탕이다(옛날에는 귀하디 귀한 삼보다 계가 앞섰는데 지금은 계보다 삼이 앞섰으니 영양가는 그때보다 높을 것이다). 이 풍습은 지금까지도 유지되어 복날이 되면 삼계탕을 먹는다. 삼계탕 한 그릇에 대략 1000칼로리'라고 하니 대표적인 고열량 음식이다. 여기에 더해서 특식으로 몸보신한다고 전복에 각종 해산물을 넣은 용궁삼계탕 한 그릇이면 한 끼 칼로리가 아닌 하루 칼로리를 섭취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삼복 더위에 삼계탕 특식으로 원기를 회복하려 했던 옛 조상의 지혜에 무릎 탁 치고 아 _ 하게 된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서 영양 과잉 사회에서 삼계탕으로 몸보신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식생활 습속'인지는 다시 한 번 재고할 문제이다. 현대인이 기운이 없다 _ 라고 말하는 것은 하루 끼니를 걱정하던 시대의 농민이 삼복 더위에 기운이 없다 _ 라고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이다. 현대인의 만성 피로를 영양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영양 결핍보다는 영양 과잉의 결과'이다. 그렇기에 만성 피로를 고열량 음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된 치료이다.
한국 문학에서 남성 작가들이 범하는 오류도 이와 비슷하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만성 피로의 원인을 잘못된 생활 습관(영양 과잉 식생활)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영양 결핍에서 찾는다. 그때부터 기이한 식도락 여행이 펼쳐지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윤대녕 소설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는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인한 의욕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식도락 여행을 떠난다. 그에게 " 묘령의 여인 " 캐릭터는 삼복 더위에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먹는 삼계탕이나 영계백숙으로 소비된다. 묘령이라는 단어가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여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계백숙에 가까울 터다. 초면에 실례합니다만, 우리....... 섹스할까요 ?
섹스와 삼계탕의 공통점은 버, 벌거숭이라는 점과 뜨, 뜨거워서 땀 흘리며 먹는다는 점이다. 으라차차, 먹고 나니 기운이 불끈 ! 젊은 여성을 " 몸보신을 위한 삼계탕 " 으로 취급하는 문학적 애티튜드는 박범신의 << 은교 >> 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진단 결과가 잘못되었으니 치료 방법이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 작년에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 문단 내 성폭력 " 사건은 한국 문단을 자지우지하는 남성 문단 권력을 여성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싶다. 한국 남성 작가가 쓴 소설을 읽고 영혼이 털리는, 구멍 난 가슴을 치유하는 기적을 경험했던 이가 몇이나 될까 ?
삼계탕이 소울 푸드였던 시대는 끝났다. 몇 가지 당부드린다. 밥이 보약이라는 하나 마나 한 소리 그만하고, 기운 없다는 신소리도 그만하시라. 또한 땀 뻘뻘 흘리며 삼계탕 먹는 풍경을 현대인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시원적 여행 따위로 포장하지는 말자. 그냥, 솔직하게 삼계탕이 먹고 싶다고 말하라. 뒤로 호박씨 가는 당신보다는 당당한 찰스 부코스키가 좋다. 한국 남성 작가가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이 꽤나 촌스럽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만사가 귀찮고 피곤하며 매사에 짜증을 자주 내고 기운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한국 남성 작가에게 상계동 영희네 영계백숙 대신 크누트 함순의 << 굶주림 >> 을 추천한다. 이 소설, 끝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