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원기옥 씨




                                                                                                       일제 강점기, 악명 높았던 순사 이름은 " 도끼이마까상 " 이라고 한다. 도끼로 이마까 순사가 저지른 악행은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순사보다 악랄했다고 하니 그가 저지른 악행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아리가또 고자 새끼 !

그런데 다카기 마사오보다 악당인 도끼로 이마까 순사보다도 더 악랄한 일본 순사가 있었으니....... 이름하야 도끼로 깐데또까 순사'였다. 박근혜 어록을 잠시 빌리자면 도끼로 깐데또까 순사는 " 그러니까, 한 번 물면, 거, 그래서, 막, 그러니까 내가 뭐라 했죠, 호호호, 살점이 뜯어질 때까지 막, 물어뜯는 " 진돗개 같은 캐릭터였다. 도끼로 이마를 까는 순사도 무섭지만 깐데또까 순사는 핀-포인트 타겟 조준이 가능한  정밀 타격의 달인이어서 깐 데 또 까는 잔인한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진정 싸울 줄 아는 싸울아비요, 살점이 뜯어질 때까지, 호호호 물어뜯는 진돗개 같은 사내'였다.

내 성격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어서 한 놈만 붙잡고 죽자사자하는 캐릭터'다. 내가 한국 영화를 비판할 때마다 등장하는 이가 임권택이요, 문학을 비판할 때마다 등장하는 이가 윤대녕이다. 내 사전에 마침표는 없다. 투비컨티뉴가 마침표로 사용될 뿐이다. 일본 순사 이름으로 설명하자면 20년째 임권택과 윤대녕을 깐 데 또 깐다. 개인적으로 두 사람에 대한 독한 감정은 없다. 다만, 두 사람의 작품 세계'가 가지고 있는 촌스러운 세계관이 한심하기 때문이다. (임권택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비판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윤대녕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그곳에서 항상 묘령의 여인을 만난다. 

" 묘령의 여인 " 이라는 표현은 윤대녕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인장'이어서 이 문장을 사용할 때는 윤대녕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소설 속에서 묘령의 여인'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는 여인을 볼 때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 이제 곧 소설 속 남자 주인공과 묘령의 여인이 질펀한 섹스를 하겠군 ! "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원기를 잃었던 남자는 묘령의 여인과 화끈한 섹스를 하고 난 후 원기를 회복한다. 마치 삼복 더위에 삼계탕 먹고 기운을 차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녀의 이름따윈 물을 필요없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 그녀 이름은 원기옥이다.

윤대녕 소설 속 여성은 남성의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박카스 같은 활력소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윤대녕이라는 남성 작가를 콕 찍어서 그렇지 한국 문단의 남성 작가들 대부분은 유사 윤대녕'이다. 좋은 예로 박범신의 << 은교 >> 도 윤대녕의 원기옥 캐릭터'다. 작가는 은교를 예술적 영감 운운하며 뮤즈라고 숭배하지만 묘령의 여인 원기옥일 뿐이다. 한국 남성 작가에서 여성이라는 존재는 육보시의 대상일 뿐이다. 한국 문학이 이 지경이라면 한국 사회는 말할 것도 없다. 남성 권력을 비판하는 글(http://blog.aladin.co.kr/fallen77/9360403 )에 대해 남성들은 개떼처럼 달려들어서 물어뜯기 일쑤다. 나는 안 그러거등요 !                          

그럴 때마다 나는 남성이란 족속이 얼마나 촌스러운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나는 남성으로서 내가 개새끼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남성 권력을 비판하는 글에 동조하게 된다. 남성이 남성 권위에 도전하는 글에 동조하지 않으니 계급 투표에 위반된다고 힐난한다면 할 말은 없다. 권위(혹은 권리)보다는 인권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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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5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05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06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안 그러는데, 남자들 싸잡아 비판받는 것이 싫다.˝

이런 주장을 하는 남자들은 남자가 여성차별,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압니다. ‘나는 안 그러는데‘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있어요. 그 표현을 쓰면서 자신은 여자로부터 비판받는 남자들(성범죄자, 성차별하는 남자 등)과의 거리를 두는 거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한 두명씩 있어요. 그걸 알면서도 가볍게 넘어가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적어도 주변에 성차별, 성희롱 비슷하게 하는 지인이 있으면 타일러줘야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6-06 20:45   좋아요 0 | URL
거리 두기가 공정한 객관화를 하기 위한 애티튜드인데, 오히려 반대인 경우입니다. 나는 아니다, 그러므로 너의 논리는 가짜다라는 태도야말로 참 편협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