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 :
나이와 목소리
죽은 자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사회는 산 자에게도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회는 인간의 생명도 하찮게 여기는 사회'다. 전자는 죽어가는 모든 것에 대한 예의이고 후자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예의'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고(故) 백남기 농민의 부검을 강행하겠다고 선포했을 때 우리는 그 메스(mes)가 산 자에게도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도끼로이마까 " 라는 일본 순사보다 더 잔인한 순사는 " 깐데또까 " 라고 하던데,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도끼로 깐 데 또 까는 잔인한 정부다.
최순실 게이트'가 명약관화한데도 더 이상 지상파 티븨에서는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찾기 힘든 형국이다. 조용하다. 바로 그 점이 공포스럽다. 소음(시끄러운 사회)보다 무서운 것은 무음(조용한 사회)이 아닐까. 공포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을 떠올려보면 수긍하게 되는 사실이다.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장면은 무음이다. 조용한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박근혜의 한 말 한 말은 지루할 정도로 전파를 타고 방방곡곡, 가가호호, 구석구석 스며들지만 약자의 절박한 항변은 그 어디에도 들을 수 없다. 권력이란 소리를 장악하는 것으로 권력자는 대중의 신호(소리)를 소음으로 변조시키는 데 힘을 기울인다. 정치학은 곧 음향학이다.
그렇다면 소리를 얻기 위한 욕망은 권력자들에게만 있는 것일까 ? 그렇지 않다. " 소리를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 은 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이상한 놈이든 누구에게나 빨고 싶은 달콤한 추파춥스'다. 좆도 아닌 것이 나이 가지고 유세를 떠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이 권력을 움켜쥐게 될 때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금으로 장식된 권좌보다 폭력적인 인테리어 소품은 완장이 아니었던가 ! 가부장적 남성이 유독 나이 서열을 중시하는 까닭은 나이 어린 사람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 500년의 유구한 불알후드-들'은 밥상머리에서 그렇게 배웠다.
어르신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톤-다운'해야 하는 것은 유교사상의 핵심이다. 형님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조폭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클리셰는 형님 앞에서 눈치없이 크게 웃다가(혹은 떠들다가) 쥐어 터지는 장면이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_ 라는 속담도 있지만 박근혜와 백성, 두목과 부하의 관계에서는 그 웃음이라는 데시벨조차 조심해야 될 사항이다. 권력자는 소리에 민감하다. 그러다 보니 힘을 겨뤄야 하는 남자끼리 만나면 일단 저 새끼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가 적은가를 탐색해야 한다. 누가 형님인가라는 문제는 곧 형님 앞에서 목소리를 낮춰야 하는 아우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낮춰야 할 대상은 당연히 약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린 놈과 여자는 목소리가 크면 안 된다. 그들은 암탉이 울면 집안에 망한다고 생각하고 여자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상위 권력자는 목소리가 없다. 박근혜는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는, 변방의 꾀죄죄한 작은 나라의 우두머리일 뿐이니 권력 서열 1위가 보기에는 피라미'다. 세계를 움직이는 넘버원은 입이 없다. 그는 입 대신 손으로 의사를 전달한다. 수화가 곧 대화이다. 영화 << 대부 >> 에서 말론 브란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대신에 손짓이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손짓에 따라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산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자는 손짓보다는 눈짓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밑에 있는 참모가 뛰어난가 아닌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뛰어난 책략가는 (보스의 메시지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의중을 읽는 놈이 출세한다. 강자가 듣기에 약자의 소리는 항상 웅성거리는 소음처럼 들린다. 그렇기에 약자의 연대가 중요한 이유이다. 연대와 파업은 약자의 잃어버린 소리를 되찾기 위한 행위'이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나이 가지고 유세를 떠는 사람치고 목소리가 크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한 살 더 많은 것도 권력이랍시고 애지중지하는 것을 보면 시발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