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성실한 결여
80 넘어서 공부하려니
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눈 뜨면 잊어버린다
아들 둘 딸 둘 다 키웠는데
그 세월 조금 잘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 며느리가 공부한다고
자꾸 하라 한다 시어머니 똑똑하라고
자꾸 하라 한다
- 공부 전문 ㉠
뒤늦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가 쓴 시다. 제목은 << 공부 >> 다. 원문은 맞춤법이 틀린 문장이 많아서 편집자의 마음으로 고쳤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80 너머가 공부할라카이
보고 도라서이 이자부고
눈 뜨만 이자분다
아들 둘 딸 둘 다 키았는데
그 세월 쪼매 잘 아랐우면
조앗을 거로
우리 미느리가 공부한다고
자꼬 하라칸다 시어마이 똑똑하라꼬
자꼬 하라칸다
㉡
" 어떻습니까, 틀린 철자를 고치니 의미 전달이 정확하고 보기 좋죠 ? " _ 라고 말했다가는 문학을 사랑하는 알라디너에게 무식한 놈이라며 따귀를 맞을 것이 분명하다. ㉠과 ㉡은 같은 시이지만 수용자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힌다. 곽두조 할머니가 쓴 시 << 공부 >> 는 틀린 글자여야지만 제대로 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 이자부고 " 의 바른 문장은 " 잊어버리고 " 이지만, " 이자부고 " 는 " 이자부고 " 라고 쓰여야지만 시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 팔순 넘은 나이에 가나다라 한글을 배우니 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눈 뜨면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 잊어버리다 " 라는 단어도 어느새 잊어버려 " 이자부고 " 라고 쓴다. 할머니의 공부는 工夫가 아니라 空夫다. 할머니에게 배움은 곧 망각이다.
만약에 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눈 뜨면 잊어버린다고 하소연하던 할머니가 냉큼 " 잊어버린다 " 라고 또박또박 글을 쓰다면 할머니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왜 ? 잊어버리다라는 단어를 잊어버리지 않았으니깐 ! 곽두조 할머니의 空夫 정신은 시종일관 " 톤 앤 매너 " 를 지켜서 유쾌하다. 이 유쾌함은 이 시를 읽는 독자의 지적 우월성에서 오는 만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함에 있다.
내 얼굴을 그리다
그리믈 그림 게 기분이 조타
눈코입을 그린 게 기부니 조타
처마하고 팔다리 그리고
그 미태 내 이름도 써보이 기부니 조타
나도 이리 때가 이다
공부하는 날 기다리는 게 마으미 즐거따
- 기부니 조타 전문
<< 기부니 조타 >> 라는 시에서 다른 것은 둘째 치고 " 그리믈 그림 게 기분이 조타 " 에서는 < 기분이 > 이라고 정확히 썼지만 다음 행에서는 " 눈코입을 그린 게 기부니 조타 " 에서는 < 기부니 > 라고 쓴다. 아이구야, " 보고 도라서이 이자부고 / 눈 뜨만 이자분다 " 는 고백이 허투루 내뱉는 엄살이 아닌 것이다. 바로 그 지점. 이 불량한 망각과 성실한 결여'가 시를 아름답게 만든다.
곽두조 할머니의 시에는 " 미니멀 " 하며 " 겨우 사는 삶 " 에 대한 철학이 담겨져 있다. 시인에게 종성 따위( 그림에서 종성인 ㅁ 따위를 생략한다거나 기분에서 ㄴ 를 잃어버린다거나 ) 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하는 삶보다는 더는 삶에 익숙한, 농부의 아내로서 겨우 사는 生을 통해 얻은 철학일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 솔직하다는 것 > 은 순진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솔직하다는 것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전부'다. 미래파 시이든 파솔라시이든, 형이상학이든 형이하학이든, 시는 솔직한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소설가에게는 " 구라 " 가 장점으로 작용하겠지만 시인에게는 " 진실 " 이 무기이다. 가짜로 꾸며낸 시의 서정은 기만이다. 그렇기에 서정주의 시가 황홀하다는 사실에 몸이 떨리기는 하지만 그 시인에게 온전하게 동의할 수는 없다. 한편,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읽다 보면 이 사내 참.... 찌질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돼지비계만 들어있다고 식당 주인에게 욕을 하질 않나, 거리에서 아내를 두들겨패기도 한다. 햐, 이 사소한 남자를 보게나.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내 눈에는 서정주보다 김수영이 깊은 울림을 준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부류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서정주는 양념 맛으로 먹는 민물 매운탕 같고, 김수영은 싱싱한 대구 생선에 소금 약간으로 간을 한 게 전부인 대구 맑은탕 같다. 서정주는 가짜 감정을 포장하기 위해 너무나 과도하게 양념을 뿌려서 양념 맛이 재료 본연의 맛을 가렸다. 이처럼 스타일이 판이하게 다르다 보니 김수영이 서정주를 싫어했던 모양이다. 고은의 말을 빌리면 김수영은 서정주를 체질적으로 싫어한 이유가 셋이었는데,
하나는 그 토속성이 견딜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늘어지는 서정성이 견딜 수 없다는 것이며, 마지막은 그의 반동성이 역겹다는 것이다. 아마도 서정주 또한 김수영이 지적한 반대 지점에서 김수영이 역겹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남진우가 서정주를 옹호할 때 가짜는 가짜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하게 된다. 한국 시단에서는 꽤 잘나가는 남진우나 권혁웅 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불쾌한 감정은 자극적인 양념으로 범벅이 된 음식을 먹고 난 후의 복통과 비슷하다. 캡사이신이 당신의 소중한 괄약근을 콕콕 쑤실걸? 아마도 그들이 << 공부 >> 라는 시를 썼다면 ㉠ 처럼 쓰지 않을까_ 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해자 시인은 시 << 시 안 쓰는 시인들 >> 에서 " 공중에 펼쳐진 넓디넓은 종이에 한 자 한자 새겨지는 까막눈이 시 속으로 대님이가 까악까악 날아왔습니다 이 땅에 시 안 쓰는 시인 참 많습니다 명녀 아지 은심이 숙희 승분이 경애 춘자 상월이 이쁜이, 시보다 더 시 같은 생이 지천입니다 " 라고 말한다. 시인이랍시고 어깨 으스대며 시를 쓰는 시인보다 시 안 쓰는 시인이 더 시인 같은 시대'다. 칠곡 배움터에서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이 쓴 시를 모은 시집 << 시가 뭐고? >> 가 남진우나 권혁웅의 쁘로빠쇼날적인 시집보다 더 좋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