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ㅡ 연대, 연립, 그리고 알박기(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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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청년은 왜 눈에 보이지 않는가
작년에 이사를 두 번이나 했다. 평균 전세 거래가 집값의 80% 선(부동산 중계업자의 말에 의하면 집값의 90% 선에서 전세가 책정되기도 한단다)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니까 전세 가격이나 그 전세를 내놓은 집 가격이나 대동소이하다는 말이다. 미친 전세'라는 과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전에 살던 집 전세금'보다 2배나 많은 돈을 지급했지만 이사한 집 평수는 전에 살던 곳에 비해 절반으로 반토막이 났다. 실내 동선이 1/2로 줄어든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의 축소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축소된 만큼 스트레스'가 증가했다. 전세 대란'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문화시설이나 편의시설이 도보 10분 안에 모두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옆에 백화점이 있고, 백화점 옆에 영화관이 있고, 영화관 옆에 관공서(구청, 보건소, 문화원 따위)가 있어서 편리한 점이 많았다. 내가 사는 지역구에서 내가 사는 동네는 중산층과 서민 사이의 계층이 사는 곳처럼 보였다. 여기서 잠깐, 동네 풍경을 잠시 기술해야 될 것 같다. 동네의 90%를 차지하는 주택 형태는 < 연립주택 > 이었다. 20년 전부터 빌라 건축 붐이 일면서 단독 주택(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대지 면적이 100평이 넘는 연립 주택을 건설해서 이 동네는 연립 주택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게 되었다. 이 동네 빌라들은 대부분 지은 지 20년이 되지 않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 몇 개월 살다 보니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영세 구멍가게가 너무 많은 것이다.
중산층이 사는 동네인가 아닌가는 자신이 거주하는 집에서 반경 100미터 이내에 구멍가게가 몇 개나 있는가를 확인하면 된다. 가난한 주거 환경일수록 구멍가게 수가 많다. 내가 내린 기준에 의하면 < 반경 100미터 이내에 구멍가게가 5개 이상 > 이면 그 지역은 가난한 서민들이 몰려사는 곳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 내가 사는 동네는 중산층 거주 밀집 지역이 아니었다. 소주 가격 인상에 인상을 찌푸리는 서민이 모여 사는, 서민형 달동네였던 것이다. 기존의 달동네와 차이가 있다면 언덕에 군락을 이룬 달동네가 아니라 평지에 군락을 이룬 달동네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가 사는 동네가 중산층이 모여 사는 동네라고 착각했을까 ?
건물 외양 때문이었다. 빌라 한 채는 대지 면적이 백 평'이 넘는 규모였지만 그 빌라 한 채 안에 마련된 십여 채의 주거 환경은 10평 내외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큰 상자 안에 작은 상자 10개가 들어간 경우'다. 백 평이 넘는 빌라가 우뚝 솟아 있으니 시각적 착시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이 착시 현상 앞에서 무릎 탁, 치고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했다. 머릿속 번개'가 번쩍했다. " 대한민국 집권 세력, 머리 좋구나. 시부랄 새끼들 ! " 한국에는 " 슬럼(도시 빈민화) " 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 나라 미국에는 뉴욕 할렘이 있고, 프랑스에도 방리유가 있는데 대한민국은 슬럼가'라고 지시할 만한 " 만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화약고 " 가 없다.
슬럼의 초기 형태였던 < 달동네 > 가 서울에서 사라진 지도 이미 오래이다. 달동네 하면 떠오르는 < 봉천동 > 이나 < 사당동 > 이미 아파트 촌이 된 지 오래이다. 달동네 판자촌에 모여 살던 도시 빈민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점'이 생겼다. 빈부 격차가 심할수록 슬럼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왜 대한민국은 슬럼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 그 해답은 이웃이 링크'를 건 글 속'에 있었다. 글이 길지만 내용이 알차고 진솔하다는 점에서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 글은 내가 평소 가지고 있었던 < 대한민국에는 왜 슬럼가가 없는가 ? > 에 대한 해답처럼 보였다. 대한민국 주택 정책은 뉴욕 할렘이나 프랑스 방리유처럼 빈민들이 한 장소에서 군락을 이루지 못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슬럼화는 폭동이나 범죄 따위의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도시 미화에도 악영향을 주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기에 집권 세력은 빈민을 한 장소에 < 집결 > 하는 방식보다는 < 분산 > 시키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나는 이 방식을 < 풍요 속의 빈곤 ㅡ 정책 > 이라고 명명하겠다. 좋은 예'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임대 아파트'다. 건설사는 달동네를 허물고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조건으로 의무적으로 달동네 세입자를 위한 임대아파트 1동을 지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파트 단지 내에는 아파트 10동에 영구 임대 아파트 1동이 지어지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같은 단지 내 주민'이지만 속내를 파고 들면 단지 내 입주민의 임대 아파트 거주자에 대한 차별은 노골적이다.
그들은 임대 아파트 주민을 투명인간化시키기 위해서 분리 정책을 펼치기 일쑤'다. 정문을 통한 단지 내 출입을 막고, 대신 뒷문을 통해 출입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신문 따위에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임대 아파트에 사는 동네 주민'한테서 직접 들은 말이었다. 그들은 단지 내 21세기 불가촉천민인 셈이다. 차별에 대한 항의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다수이면서 강자이며 자신보다 부자들이니깐 말이다. 이렇듯 단지 내 임대 아파트 주민은 단지 내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한민국 주택 정책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정상적인 주거 환경 속에 빈민을 박는다. 일종의 < 알박기 > 인 셈이다. 그들은....... 쥐 죽은 듯이 산다.
아파트 단지가 아닌 연립주택으로 구성된 동네도 이와 비슷한 " 알박기 - 정책 " 이 펼쳐진다. 아파트는 대부분 비슷한 환경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단지'라는 공간은 생활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의 연립 공간인 셈이다. 하지만 단지 내에 그들과는 다른 빈곤 계층이 살 수 있는 영구 임대 아파트가 있듯이, 연립 주택 안에도 빈곤 계층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반지하와 옥탑'이다. 빈민은 바로 이곳에 산다. 그들은 연립 주택 주민 가운데에서 소수자이다. 그들은 연립주택 주민보다 작은 공간에서 살기에는 지나치게 낮거나 지나치게 높은 곳에 산다. 있는 듯, 없는 듯....... 쥐 죽은 듯. 이러다 보니 빈민은 동네마다 곳곳에 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빈민을 철저하게 < 투명인간화 > 시킨다. 그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집권 세력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 빈곤 고립 정책, 일명 알박기 > 는 매우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빈민들이 뭉치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생활 환경이 비슷한 사람끼리 연립하며 영역 표시를 할 때 사회로부터 소외된 빈민은 더욱 고립되어 자신의 흔적을 지운다. 자신이 사는 동네에 대한 애향심이 생길 리 없다. 당연히 지역구 선거에 대한 관심도 없다. 한국 정치가 노린 대목이다. 나쁜 점은 쥐새끼처럼 배우는구나. 대한민국 정치가를 두고 하는 소리다. 국가는 국민에게 애국을 강요한다. 하지만 국민은 법 질서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경멸할 자유가 있다. 대한민국 좆같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빈민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한 치 앞이 어둠이다. 그들을 향한 위로는 없다. 채찍만 있다. 기득권은 그들에게 등을 떠민다. 그들에게 조은 시인의 < 지금은 비가 > 에 나오는 시 한 구절을 보낸다.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