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허기
세밑이 되면 교수 신문'에서 올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뽑는다. 2015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세상이 어지럽고,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다'는 혼용무도(昏庸無道)를 뽑았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식인의 이벤트'는 궁금하지도 않다. 세상이 어지럽고,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던 해가 비단 지난해뿐이었던가 ? 혼용무도가 2015년을 대표한다는 게 오히려 새롭다. 2015년, 내가 바라본 지난해의 특징은 < 슬/픈/허/기 > 였다.
먹방이 대세'다. 아프리카 티븨 개인 방송으로 시작된 먹방이 이제는 케이블 티븨를 넘어 지상파로 진격했다. 셰프가 점거한 먹방은 이제 예능의 품격이 되었다. " 돌격, 앞으로 ! " 의/식/주'에서 가장 원초적인 " 니즈 " 가 < 食 > 이라는 점은 < 먹방 열풍 > 의 두 가지 상호 모순적 측면'을 보여준다. 먹방의 인기는 얼핏 보기에는 " 먹고살 만하니 " 까 식문화에 관심이 쏠리는 현상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앞으로 " 먹고살 걱정 " 에 대한 반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깐 대한민국 대중의 < 食 > 에 대한 탐닉은 풍요와 빈곤 사이에 놓인, 이상한 강박'에 가깝다. sbs 간판 예능 프로그램인 << 정글의 법칙 >> 은 < 빌어먹지 않고 주워먹고 사는 삶 > 을 재현한다.
다시 말해서 << 정글의 법칙 >> 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 무일푼으로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학적 실험'이다. 병만족은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쌀도 없다. 그들이 머무르는 정글은 사람이 없는 무인도'라기보다는 고립무원에 대한 은유처럼 읽힌다. 다시 말해서 정글은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는 곳이다. 그렇다, 자본 정글에서 < 돈 > 이 없다는 것은 구원을 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救援)의 반대말은 무원(無援)이다. 고립된 무원은 "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 먹을 수 있는 낭만도 없는 곳이다. 당연히 병만족에게 음식의 " 향미 " 는 사치'다. < 질 > 보다는 < 양 > 이다. 자급자족'이라는 측면에서 tvn의 << 삼시세끼 >> 는 << 정글의 법칙 >> 보다는 사정이 낫다.
만재도 또한 고립무원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차승원은 김병만보다는 사정이 낫다. 홀아비에 애 딸린 김병만보다는 조강지처인 유해진'이 있지 않은가 ! 더군다나 키울 애도 없다. 이들 부부(차승원-유해진)는 자식 대신 개와 고양이를 키운다. 그뿐이 아니다. 만재도에 가면 ~ 집이 있고, 만재도에 가면 ~ 개와 고양이도 있고, 만재도에 가면 ~ 고추장과 된장도 있고, 우럭, 볼락, 쏨치, 물미역, 거북손도 있고...... 어쨌든, 차승원-유해진 동성 커플의 소꿉놀이는 재화 없이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극'이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의 먹방 문화'가 미슐랭 가이드를 중심으로 한 서구 식문화'와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 정글의 법칙 >> 이 오로지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상황극이라면, << 삼시세끼 >> 는 역설적으로 먹기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극'이다.
차승원-유해진 부부의 목표는 오로지 삼시 세 끼'다 ! <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상황극 > 이 더 풍요로운 삶일까, 아니면 < 먹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상황극 > 이 더 풍요로울까 ? 동일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묻자. <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상황극 > 이 더 비극적일까, 아니면 < 먹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상황극 > 이 더 비극적일까 ? 혹은 어느 쪽이 더 절망적일까. << 삼시세끼 - 설정극 >> 을 관통하는 정서는 < 그림의 떡 > 을 재현해 보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 헨리 단편인 << 크리스마스 선물 >> 에 나오는 낭만을 부릴 수도 없다. 차승원의 머리는 짧고 유해진은 집안 대대로 가보처럼 내려온 회중시계도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맨발과 불알 두 쪽뿐 ! 그래서 부부는 미슐랭 가이드가 소개하는 맛집 음식'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대문 시장 갈치조림을, 종로 3가 닭도리탕 맛을 흉내내는 놀이를 한다. 그들의 목표는 " 그럴 듯하게 만드는 것 " 이다. 그럴 듯하쥬 ? << 집밥 백선생 >> 이라는 프로그램도 같은 맥락'이다. 집밥 열풍은 어머니 손맛을 그리워하는, 건강한 웰빙 음식에 대한 소망처럼 포장했지만 꼼꼼하게 뜯어보면 경제적 이유'다. 월급봉투는 부피가 줄어드는데 점심값은 치솟는다. 7000원이 기본이다. 이때 등장한 사람은 백선생, 백종원이다. 그는 요리를 가르쳐주는 가정 선생이기보다는 살림을 알뜰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경제 선생에 가깝다. 외식도 사치가 되는 시대이다 보니 집밥에 대한 필요성이 집밥 열풍을 불러온 것이다. jtbc의 << 냉장고를 부탁해 >> 도 이와 다르지 않다. 냉장고 안에 있는 식재료로 돈 주고 사먹는 음식을 재현하는 프로그램이다.
<< 정글의 ...... >> , << 삼시세끼 >> , << 집밥 백선생 >> , << 냉장고를 ....... >> 는 모두 집밥'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본의 독점, 경쟁에서의 도태, 경제적 빈곤, 암울한 미래가 만든 결과'다. 먹고살 만한 시대는 지나고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미래의 공포가 < 食 > 에 대한 대중적 강박으로 나타난 것이다. 대중은 먹방을 보며 침이 고인다. 하지만 이 허기는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음식을 보며 침을 흘리는 서구의 기름진 허기와는 다르다. 그래서 지금의 허기는 슬프다.
- 차승원-유해진 부부가 타인의 도움 없이 고립된 섬에서 삼시 세 끼를 해결해야 된다는 점에서 만재도는 고립무원이요 무인도'다.
- 정희진은 한겨레의 << 정희진의 어떤 메모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O.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다시 펼치니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다른 이야기다. 이렇게 짧은 분량에 이토록 생각할 거리가 많으니 새삼 문학과 철학의 경계가 따로 없구나 싶다. 대단한 장편(掌篇)이다. 스물두 살의 가난한 부부 짐과 델라. 사랑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 상대에게 가장 ‘필요한’ 성탄절 선물을 한다. 델라는 머리카락을, 짐은 시계를 팔지만 그들이 받은 선물은 이제는 소용없는 머리빗 세트와 시곗줄. 나는 두 가지가 걸렸다. 하나는 가난한 남성은 물건을 팔지만, 가난한 여성은 몸의 일부(머리카락)를 파는(팔 수 있는) 현실. 이것이 성매매가 성별 중립적이지 않은 이유다. 선물을 사기 위해 매혈하는 남성은 드물다. 게다가 델라의 머리카락 묘사는 남성들의 판타지가 투사된 듯 사뭇 관능적이다. “지금 델라의 아름다운 머리채는 갈색의 폭포처럼 잔잔하게 흔들리며 몸 주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려 마치 긴 웃옷같이 되었다.”(3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