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대한 에티튜드, 첫 번째 이야기 : 편지
사물에 대한 에티튜드(ettitude)'라는 목록'을 하나 만들었다. 제목으로 굳이 태도나 자세'라는 말 대신 " 에티튜드 " 라는 외래어를 사용한 이유는 attitude에 essay를 덧대어 만들어낸 조합, ettitude'라는 데 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사물에 대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글 목록'이라 해두자.
<< 사물에 대한 에티튜드 >> 첫 번째 이야기는 < 편지 > 다. 디지털 문화의 폐허를 이야기하며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말할 때 자주 호명되는 것이 " 손 편지 " 다. 손 편지'는 모니터 안에서만 떠도는 메일과는 다르다. 메일에는 없지만 편지에는 있는 것, 그것은 바로 < 글씨체 > 다. 메일이 0과1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글 맵시라면, 편지 속 글씨체'는 글쓴이의 고유한 서명'이다. 글씨체를 보면 그 사람 성격이 보인다. 실제로 범인이 보낸 협박 편지 속 글씨체를 통해 범인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여 사건을 해결한 예는 무수히 많다. 누군가가 범죄에 악용할 목적으로 편지를 흉내 낸다고 가정했을 때 문체를 모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글씨체'를 흉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이스미스의 << 재능 있는 리플리 씨 >> 에서 톰 리플리'가 모방하는 것은 서명이지 글씨체'가 아니다.
그는 서명을 흉내 내는 데에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기에 글씨체는 지문과 같이 그 사람 고유의 특징'이다. 반면 메일에는 글씨체가 없기에 문체만 흉내 내면 감쪽같이 수신자를 속일 수 있다. 이처럼 문장을 흉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에둘러 가지 말고 서둘러 정리하자면 : 문체와 글씨체 라임을 맞추기 위해서 글씨체를 서체'라고 하겠다 는 다르다는 점이다. 보다 깊이 들어가면 < 문체 > 는 글쓴이의 성격을 드러내지만 < 서체 > 는 글쓴이의 성질을 나타낸다. << 성격 >> 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고, << 성질 >> 은 복수가 아니라 고유명사'다. A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무수히 많지만 A와 같은 성질은 A가 유일하다. 생각해 보면 불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많다. 하지만 불이라는 물질(성질)이 물이 되는 경우는 없다.
그렇기에 < 편지 > 는 타인이 흉내 낼 수 있는 성격과 함께 타인이 흉내 낼 수 없는 성질이 혼용된 독특한 기표다. 편지는 대부분 정해진 기간 안에 수신자에게 무사히 도착되지만, 유통 과정에서 분실되거나 틀린 주소 따위로 수취인불명으로 되돌아오거나 엉뚱한 사람이 편지를 가로채거나 기이한 방식으로 너무 늦게 도착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수신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처벌을 받는다. 영화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 에서 은행원 해원(지성원 분)이 겪는 고통은 복남(서영희 분)이 보낸 편지를 읽지 않은 것에 대한 징벌이다. 섬에서의 악몽 같은 날들을 겪고 집으로 돌아온 해원인 비로소 복남이 섬에서 보낸, 개봉하지 않은 편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정해진 기간 안에 수신인에게 도착한 편지이지만,
해원이 뜯지 않은 편지이기에 그녀가 편지봉투를 뜯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복남이 보낸 편지를 해원이 읽는 시점은 복남이가 죽은 이후'이기에 죽은 자가 보낸 편지'가 되었다. 영화 << 파이란 >> 도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에 속한다. 그는 편지를 읽고 나서 마음의 변화가 생겨 보스와 맺은 계약을 번복한다. 이 변심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 / 막스 오필스, 1948 >> 에서 바랑둥이 주인공은 남의 여자를 건드린 죄로 3시간 후에 결투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남자는 결투를 피하고자 비엔나를 떠나기로 마음 먹고 짐을 꾸리기 위해 집에 들렸으나 이름과 주소가 적히지 않은 편지를 읽게 된다.
여자가 죽고 난 후 도착한 편지'였다. 그는 도피 계획을 잠시 지연한 채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남자의 얼굴에는 짙은 회한이 배어 있다. 그는 애초의 계획을 변경하고 결투장으로 향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관객은 결투 결과를 알 수 없으나 결투장으로 향하는 그 남자의 행위가 < 자기 징벌 > 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편지들은 모두 수신자에게 죄의식'을 상기시킨다. 반면 포우의 << 도둑 맞은 편지 >> 와 이언 맥큐언의 << 속죄 >> 는 수신인이 바뀌거나 편지지가 바뀌는 바람에 불행이 찾아온다. << 도둑 맞은 편지 >> 에서는 여왕이 정부(情夫)에게 보내는 편지를 장관이 가로채고, << 속죄 >> 에서는 cunt라는 비속어를 남발한 저속한 편지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게 엉뚱하게 편지봉투에 담겨 수신자에게 도착한다.
이 배달 사고'는 letter를 litter(잡동사니)로 만든다. << 도둑 맞은 편지 >> 에서 장관은 중요한 편지letter 를 책상 위에 어질러놓는다(litter : 쓰레기, 어질러진 물건). 여왕이 보낸 수색대가 장관의 집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찾는 것은 허섭스레기(litter)가 아니라 편지(letter)였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 속죄 >> 에서는 쓰레기통(litterbin)에 들어가야 할 구겨진 편지지(litter)가 그만 실수로 letterbox 에 들어간다(정확히 말하자면 인편人便으로 배달된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밀란 쿤데라의 << 농담 >> 에서도 반복된다. 주인공 루드빅은 엽서에 악의 없는 농담을 썼다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변방의 탄광에서 석탄 캐는 일로 청춘을 보낸다. 그에게 남은 것은 복수와 증오뿐이다.
이들 작품과는 결이 다르지만 신경숙의 << 풍금이 있던 자리 >> 도 일종의 " 잘못된 편지 " 에 속한다. 서간체로 쓰여진 이 소설은 사랑의 망명을 하자는 가정 있는 남자에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편지인데 결국에는 이 편지를 그에게 보내지 못한다. 형식은 가정 있는 남자에게 띄우는 것이나 사실은 독자를 향한 독백'에 가깝다. 수신인은 가정 있는 남자이지만 정작 그 편지가 도착한 곳은 독자'다. 그런 의미에서 << 풍금이 있던 자리 >> 는 잘못된 편지'다. 소설 속 " 나 " 는 이렇게 고백한다. " 이 글은 당신께 제 마음을 전해 드리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저는 아무래도 이 글을 못 끝낼 것만 같습니다. " 그녀는 약속 장소에 가지 않는다. 사랑의 도피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편지 또한 완성되지 못한 채 도착하지 못했다.
편지의 실제 수신자 입장에서 보면 발신자인 " 나 " 의 편지는 주소지를 잃고 보류 중이거나 허공에 부류 중이다. 그렇기에 계획은 실패한다. 이처럼 정해진 기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수취인불명이거나, 뒤바뀌거나, 혹은 너무 늦게 읽은 편지는 영화와 문학 속에서 처벌의 기능을 작동한다. 편지가 부류하는 순간 그것은 유령이 띄우는 말이 되어 억압된 것의 회귀'가 된다. 혹여, 어디선가 당신의 불행을 알리는 전화벨이 울린다면 제일 먼저 우편함으로 달려가라. 뒤늦게 도착한 편지는 없는지, 뜯지 않고 방치한 편지는 없는지, 혹은 차마 못다 쓴 편지는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