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는 참 외롭다
■ 프롤로그 : 冊 을 읽다가 따분해지면 책을 덮고 국어 사전이나 한자 사전 따위를 펼친다. 손 닿는 대로 펼쳐서 나온 페이지'를 몇 장 읽는다. 사전 읽는 맛이 의외로 쏠쏠하다. 내가 펼친 부분은 << 찰카당 >> 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페이지'였다. 찰카당, 찰칵, 찰통, 찰흙.......... 내 관심을 끈 단어는 < 참 - > 이라는 접두사'였다. 명사 앞에 붙어서 " ① 진짜, 진실하고 올바른 ② 품질이 우수한 ③ 먹을 수 있는 " 이라는 뜻을 더한다. 그러니까 < 똘배 > 보다는 < 참배 > 가 맛이 좋고, 빛 좋은 < 개살구 > 보다는 < 참살구 > 가 맛이 좋다는 소리'다. 이처럼 동식물과 관련이 있는 명사 앞에 < 참- > 이 붙으면 식용이 가능할 뿐더라 맛도 더 좋다는 뜻이니
동식물 이름만 제대로 알면 산 속에서 길을 잃어도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킬리만자로의 아범은 알아두라고. 그리고 갈참나무, 굴참나무, 물참나무, 졸참나무 따위를 통틀어서 참나무'라고 하는데 나무 앞에 < 참- > 이 붙은 데에는 이 나무들이 도토리 열매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 참외 >> 에서 < 외 > 가 오이의 준말이니 맛이 좋은 으뜸 오이'라는 뜻일까 ? 오이를 뜻하는 한자 瓜 : 오이 과 가 참외'를 뜻하기도 하니 오이와 참외'는 한배'에서 태어났으나 아비가 다른 형제들이다( 수박, 오이, 참외는 모두 박목-박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달달한 오이가 참외요, 밍밍한 참외가 오이'인 셈이다. 사전을 찾아 보니 참외와 첨과 甛瓜 : 달 첨, 오이 과 ' 는 같은 말이다.
< 첨과 > 가 세월이 흘러 < 참외 > 가 된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오이, 참외, 수박 따위는 모두 박색한 박 씨의 뱃속에서 나온 한통속'이다. 모양새도 그렇고, 색깔도 그렇고, 맛도 서로 사뭇 달라서 오이와 참외가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나는 허탈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참외 씨'가 우연히 부잣집 오이 여자를 만나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지지만 알고 보니 오누이 사이. 하지만 연을 끊기에는 사랑은 깊어가고 ! 참외 남자는 이 사실을 숨긴 채 오이 여자'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그녀 곁을 떠난다. 하지만 교통 사고로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진 남자. 그가 병실에서 눈을 뜨자 그의 곁에는 오이 아가씨가 병간호를 하고 있다.
오이 아가씨가 병상에 누운 참외 씨'에게 다정하게 묻는다. " 참외 씨....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 " 참외 씨는 오이 아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한다. " 누구떼여 ? " 절규하는 여자. 누,누누누누누누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 남자는 교통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여자 떠나면 그렁그렁 맺힌 남자의 눈물 C.U 참외 의 참회의 눈물. THE END라는 타이틀이 떠오르면 F.O 참외와 오이의 러브스토리에 관심이 생겨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김서령 산문 << 참외는 참 외롭다 >> 라는 책을 발견했다. " 참외는 참... 외롭다라.... " 읽지 않은 책이라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다행히 그녀가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내용이 있어서 옮겨본다. 분량이 길지만 꽤 흥미롭다.
참외는 참 외롭다
참외의 ‘외’는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외아들·외딴집 할 때의 그 ‘외’다. 영어로도 참외는 ‘me-lone’이다. “Are you lonesome tonight?” 할 때의 그 ‘lone’이니 역시 ‘혼자’라는 뜻이다. 한자의 외로울 고(孤)자에도 참외 하나(瓜)가 들어앉아 이쪽을 말갛게 건너다본다. 우리말과 영어, 한자를 만든 이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한 것도 아니련만 ‘혼자’라는 의미에 똑같이 ‘외’라는 과일을 사용한 건 희한한 일이다. ‘슬기’가 ‘슬기-롭다’가 되고 ‘지혜’가 ‘지혜-롭다’가 되는 우리말 구조를 따져보면 ‘외-롭다’는 ‘외’로부터 나온 게 확실하다. 그들은 왜 ‘외로움’이란 의미를 밭에 돋아 홀로 열매가 굵어가는 저 보잘것없는 초본식물로부터 만들어 냈을까.
경상도 안동 말을 쓰던 엄마는 오이를 ‘물외’라고 부르고 참외는 그냥 ‘외’라고 불렀다. 오이는 영어로 ‘cucumber’이고 한자로 황과(黃瓜)며, 수박은 ‘water-melon’이고 수과(水瓜)다. 오이와 수박도 외롭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박목-박과에 속한 식물들이지만 다른 성질들이 우세해서 세 언어 공히 같은 이름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참외만은 ‘참’이라고 진짜임을 강조하는 모자까지 척 쓰고 ‘외로움’의 절대강자가 되어 수천 년을(아마도!) 버텨오고 있다. 참외가 단순히 단물 가득한 과일이 아니고 ‘외로움’을 표상하게 된 비밀을 나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제자인 박영호 선생에게 처음 들었다.
외는 마디 하나에 꽃이 하나씩만 핀다. 다른 식물은 대개 쌍으로 꽃이 피어 열매도 쌍으로 달리는데 박과 식물만은 홀로 꽃피니 열매도 하나뿐이다. 사과도 배도 대추도 감도 곁의 놈에게 의지하건만 외만은 아니다. 홀로 피어야 열매가 둥글게 자랄 수 있다.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몸이 굵어질 수 있다. 몸 안에 단맛을 충분히 저장할 수 있다. 외가 홀로 비와 어둠과 바람과 땡볕을 견디고 또 누리는 것은 그 길만이 안에서 익어가는 성숙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외’의 진정한 의미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턴가 일상 언어생활에서 이 오래되고 의연한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됐다. 뱉어놓고 보면 외롭다는 말에는 뭔지 얄팍하고 덜덜하고 끈적대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 결핍감과 의존성이 번번이 민망했다.
말이란 동시대인의 철학과 정서가 고스란히 담기는 그릇이다. 원래 홀로 꽃피어 열매 맺는 ‘외’를 보고 ‘외-롭다’란 말을 만들었을 시대의 ‘외로움’이란 당당하게 홀로섬을 선택한다는 의미가 강했을 것이다. ‘~롭다’란 말 앞에 대개 긍정적인 추상명사가 붙는 걸로 유추해도 그렇고 참외가 익어가는 양을 오랜 세월 관찰해서 언어를 만들어 냈을 고대인의 심리를 짐작해 봐도 그렇다. 현대의 외로움엔 원래의 의미 대신 상당량의 ‘당분’과 ‘센티멘털’이 가미돼 버렸다. 시장과 매스미디어는 외로움을 와인이나 초콜릿, 커피 같은 기호식품에 끼워 팔고 드라마와 가요는 외로움을 달달하게 과잉포장해서 흔하고 값싸게 유통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우린 진정한 외로움을 잃어버렸다.
외꽃이 하나인 건 원래 둘이었던 것의 결핍이 아니라 홀로됨을 기꺼이 선택해 성숙에 이르기 위함이다. 주변 젊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다석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자신이 죽는 날을 미리 잡아놓고 하루를 일생처럼 사는 일일일생주의(一日一生主義)를 견결하게 실천했던 다석 같은 선각을 잃어버렸으니 참 외로움도 사라질 수밖에! 다석은 사모하던 남강 이승훈 선생만큼만 살기로 작정해 자신의 수명을 66세로 정했었다. 존경과 사모와 사숙이 희귀해진 세상에도 여전히 참외는 익는다. 자라는 아이의 함량을 키우려면, 남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고요하게 종심소욕(從心所欲)하려면 홀로 견디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전철역 입구에 세운 트럭 안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참외의 참 외로움을 본받아야 한다. 온 세상에 땡볕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이건 내게 단물을 들이기 위한 시간일 뿐!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 중앙일보 2012-08-02 전문
김서령은 참외'에서 < 외 > 를 lonely 로 접근한다. 그러니까 " 외롭다 " 는 " 외(참외)답다 " 와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무릎 탁, 치고 아, 했다. 참외는 참 외로운 존재로구나. 누군가는 안도현의 << 스며 드는 것 >> 이란 시'를 읽고 나서 더 이상 간장 게장 요리'를 먹을 수 없다 했는데, 또 누군가는 달달한 참외 한 조각을 입에 물며 쓸쓸해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일이다. 사람은 외롭다며 더 많은 관계망 속으로 빠져들지만 그럴 수록 사람은 더욱 소외된다. 어쩌면 인간이란 외꽃으로 태어나 비와 어둠과 바람과 땡볕을 견뎌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외롭다는 것,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 에필로그 : 병상에서 눈물을 흘렸던 참외 씨'는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그는 평생 오이 아가씨'를 그리워했으나 단 한번도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는 동안, 참외는 참 외로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