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와 반 마리
코러스 : 그 아버지에 그 딸이시군요 ! 성격이 아버지처럼 그렇게 막무가내인가요. 적 앞에서 도무지 굽힐 줄 모르시는군요 !
- 안티고네 中

발단은 " 반 마리 " 때문이었다. 이태임과 예원 사이에 오고간 말풍선'을 언어유희의 대왕인 셰익스피어가 소포클레스 풍으로 각색한다면 다음과 같다. " 오, 말 ! 말 ! 말 ! 예원이여, 애원해도 소용없나니, 네 말'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지어다. 세 말' 하면 입 아프고, 두말하면 잔소리니, 일말의 주저없이 한 말 또 하련다. 어디서 반말'이니 ? " 오고가는말풍선'에 반말이 끼어든 것. 쌍둥이 형제'에도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나라에서 반말은 예민한 문제'다. < 반말 > 에서 반이 半 : 반 반' 이라는 한자이기에 반말의 반댓말은 한말'이다. 나이 서열에 따라 한 마리와 반 마리'는 정해진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오랜 세월 쌓은 암묵적 합의와 사회적 결의'다. 하지만 예외는 존재하는 법. 나이 서열을 무너트리는 것이 바로 족보'다.
희끗희끗, 흰 머리 난 어른이 새파랗게 어린 사람에게 삼촌이라며 어른 대접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뿐인가 ? 돈과 권력이야말로 반말의 좋은 친구'다. < 완장 > 을 찬 사람은 나이 서열'에 관계없이 한 마리'를 1/2 등분 잘라먹는다. 하지만 권력 피라미드'에서 상층부를 차지할수록 말은 점점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2/3 등분, 3/4등분, 4/5등분, 5/6등분, 7/8등분, 9/10등분....... < 욕 > 은 반말보다 더 짧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 육시랄 戮屍 - " 은 < 이미 죽은 시체를 다시 한 번 찌르다 > 는 말이고, " 젠장 " 은 젠장칠의 준말로 < 곤장으로 볼기를 친다 > 는 의미이며, " 오라질 " 은 < 오라(포승줄)로 묶여 갈 > 이란 뜻이다. 이처럼 < 반말 > 이 짧은 말이라면 < 욕 > 은 반말보다 더 짧은 말에 속한다. 그러니까 말이 짧다며 욕을 하는 사람은 더 짧은 말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처럼 길이가 점점 짧아지다가 결국에는 말을 아예 하지 않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반말'은 아니지만 반말'보다 무서운 공말(空-)이다. 여기서 공말은 빈말'보다는 不言에 가까운 말이다. 영화 < 대부 > 에서 말론 브란도'는 말을 하는 대신 눈짓과 손짓으로 대화를 나눈다. 무릎 꿇은 사람은 말론 브란도의 눈짓과 손짓에 따라 목숨이 왔다갔다한다. 수많은 조폭 영화'를 보라 ! 오야붕은 말이 없다. 오야붕 밑에 있는 놈이 말을 오야붕을 대신해 험악한 말을 많을 뿐이다. 오야붕 밑에 있는 넘버2는 관상가이고, 넘버2 밑에 있는 넘버3는 중국어 통역관이며, 넘버3 밑에 있는 넘버4는 집행관이다. 그들은 오야붕의 몸짓 언어'를 이해하고 실행에 옮긴다. 관상가와 통역관은 오야붕의 용안 龍顔 을 살핀 후, 이마에 석 삼(三)이 있는지 미간에 내 천(川)이 있는지에 따라 행동한다.
통역관은 오야붕의 용안에 새겨진 < 三 > 를 " 아따, 시부럴 새끼 ! 확 눈깔을 뽑아부러 ? " 로 해석해서 아랫것들에게 통역하고, < 川 > 은 " 아야, 으째스까나. 배를 확 째서 창자로 줄넘기를 해부러야것다 ! " 로 해석해서 통역한다. 결국 권력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오야붕은 말 한마디 없이도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알아서 척척, 일을 진행하는 관상가와 통역관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대통령은 거짓말은 해도 반말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성이 곧기 때문이 아니라 반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각하 아래 관상가와 통역관은, 지천으로 널렸다. 뜬금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 오이디푸스 > 는 슬하에 자식이 네 명'이었다. 딸이 둘이요, 아들이 둘이었으니 부부금실이 좋았던 모양이다.
오이디푸스 자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안티고네'다. 눈먼 아버지를 보살피고 왕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죽은 형제를 매장한 이도 안티고네'였다. 그녀는 형제의 시체를 땅에 묻었다가 결국에는 생매장 당하는 여성이었다. 소포클레스의 < 안티고네 > 에서는 자매 간 서열과 남자 형제 간 서열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잠시 오이디푸스네 가족 나이 서열에 집착한 적이 있었다. ( 한국에서는 편의상 안티고네가 이스메데의 언니'로 설정되었으나 작품에서는 서열을 제시하지 않는다. 남자 형제도 마찬가지'다. )

" 폴리네이케스가 형이야, 에네오클레스가 형이야 ? 안티고네가 언니야, 이스메데가 언니야 ? "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궁금증은 나이 서열을 중시하는 한국인이기에 가능했던 궁금증이 아닌가 싶다. 영어에서 불알더(brother)는 형이자 오빠이기도 하며 또한 남동생'을 의미하지 않은가. 시스터도 마찬가지다. 언니이자 누나이자 여동생을 통틀어 sister'라고 한다. 그러니까 서양에서는 나이 서열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는 왜 나이 서열이 중요한 것일까 ? 한국어가 높임말과 반말을 구분하기에 그렇다. 상대방보다 한 살 많으면 " 반 마리 ㅡ 카드 " 를 꺼낼 수 있다. 처음 보는 자리에서도 대뜸 " 몇 살이세요 ? " 라고 묻는 데에는 반말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높임말을 써야 하는지 물어보기 위한 사전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 마, 실례를 무릅시고 마... 묻것습니다만, 나이가.... "
따위로 예의를 갖추는 척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실례'다. 무릎이 시리면 무릎 담요을 덮으세요 ! < 한 살 더 산 게 > 훈장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결국에는 꼰대'가 된다. 술자리에서 멱살 잡고 싸울 때 " 너 몇 살이야 ? " 라고 묻는 사람이 꼰대'다. 꼰대는 대부분 자신이 쌓은 세월에 대한 자부심과 경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 왕년에 ~ > 라는 말머리로 시작하는 회고담은 화려하다. 듣다 보면 난닝구와 삼각 빤스만 입고 명동 거리를 돌아다녀도 " 스똬일 " 이 완성될 거 같다. 하지만 회고담은 "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 일 뿐이다. 나쁜 것은 지우거나 고치고 좋은 것은 과장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 내가 해봐서 아는데... " 다. 이명박이야말로 꼰대의 전형이다.
한국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언어 체계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높임말만 쓰든 반말만 쓰든 말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지 보다 평등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될 가능성은 ? 없다. 누군가는 위아래 구분도 없이 반말로 통일한 영어를 빗대 높임말이 있는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이도 있던데, 이 진한 국뽕 앞에서 할 말을 잊게 만든다. 태양이 떠오르면 그늘이 생기는 법. 반말이 있기에 존댓말도 있는 것 아닐까. 가끔은 복거일'의 황당한 영어공용어 주장'이 이해가 간다. 내가 보기엔 복거일은 적어도 꼰대'는 아니다. 그는 리버럴리스트'다. 봄비 오는 새벽에 깨어, 깊은 밤에 반 마리'를 생각하다가 안티고네를 생각하다가 복거일로 끝맺음한다. 이 밤에 닭 한 마리 뜯고 싶다, 시바.
덧대기
오이디푸스는 테베'에서 태어났으나 이웃 나라'인 토린토스에서 성장했다. 출생지와 성장지'가 다른 경우'다. 오이디푸스는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자신을 토린토스 사람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이방인이면서 그 나라의 왕이 된 경우는 히틀러가 있다. 그는 독일 사람이 아니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가 테베로 떠난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어머니와 동침할 운명이라는 아폴론의 신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그는 신탁을 실현하기 위해 테베'로 향한 꼴이 되었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에서 adrian finn 은 영국 런던으로 전학 온 학생으로 소개된다. 그에게 영국 런던은 연고지'가 아니다. 여기서 finn 은 핀란드 사람 혹은 북서 러시아 부근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에이드리언 핀'은 오이디푸스처럼 영국 런던으로 흘러들어온 이방인'이었던 셈이다. 그는 신탁의 저주( 토니'가 보낸 편지 ) 를 피하기 위해 베로니카를 떠나 베로니카의 어머니 곁에 머문다.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에이드리언은 신탁을 실현하기 위해 (베로니카 어머니가 거주하는) 켄트'로 향한 꼴이 된다. 그렇다면 kent라는 장소성이 말하고자 하는 상징은 무엇일까 ? kent는 고대 왕국이라는 뜻과 함께 투르크어로 도시'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두 텍스트 간 유사성에 방점을 찍자면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는 에이드리언의 상징적 어머니'다(그는 홀아비 슬하에서 자랐다는 점을 주목하자). 이 셈법이 맞다면 베로니카'는 안티고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