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이라는 이름의 허울
중립中立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처신한다는 뜻을 가진 명사'다. " 중립을 지키다 " 라는 말은 " 左와 右 사이의 中에 서(立) " 있으라는 충고'다. 중도'도 같은 의미'다. 대한민국이 진영 논리'에 빠지다 보니 한국 사회는 중립'이라는 자세를 으뜸 미덕으로 삼는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가 자신을 좌파(진보)도 아니고 우파(보수)도 아닌 실용 중도'라고 커밍아웃했을 때, 나는 그가 사이비'라고 판단했다.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 포지션 " 은 철새 정치인이 되기 십상이다. 비단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도 마찬가지'다. 말머리를 " 나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지만.... " 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편견 없고 편애 없는 현명한 사람으로 포장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런 사람은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
인간은 반드시 " 선택 " 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루에 2000번 정도 " 선택 "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신호등을 건널까, 아니면 신호등을 지나 직진하다고 다음 골목에서 우회전 할까 등도 선택 과정'이다. 이 선택은 의도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은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뇌가 독단적으로 진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선택은 반복된다. 이 정도면 인간을 " 선택하는 인간 " 이라고 정의 내려도 이상할 것 없다. < 선택 > 이란 " 둘 중 하나 " 를 고르는 행위'다. 왼쪽으로 갈 것인가,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빨간색 나이키 로고가 박힌 신발을 살 것인가, 파란색 나이키 로고가 박힌 신발을 살 것인가.
삶이란 선택의 연속인 셈이다. 이 무수한 선택이 모인 결과가 취향과 정치적 성향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左도 아니고 右도 아닌 中에 서 있다는 자세는 선택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기울어져야 한다. 다만 시소가 기울어지는 각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사회 구성원들 ( 종교인, 공무원, 유권자 : 선거 기간에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의사를 내비치면 안 된다는 명령 ) 에게 " 중립 의무 " 를 강요하는 이유는 중립이 보수의 강령'이기에 그렇다. 만약에 기독교 목사'가 강자와 약자 가운데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면 그 자세는 종교인이 갖추어야 덕목일까 ? 예수가 그 모습을 지켜봤다면 달려가서 그 목사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 예수는 " 중립을 지키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 " 이다.
그는 무조건 약자 편을 들었다. 예수는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지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 이들 중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 ! " 예수 그리스도가 간음한 여자'를 두둔한 이유는 그녀가 약자'이기에 그렇다. 그 선택에는 정치적 판단과 균형 감각, 도덕적 잣대와 철학적 사유 따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니다. 단순히 약자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일 뿐이다. 내가 예수를 위대한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약자에 대한 조건 없는 지지에 있다. 강자와 강자 대결에서는 중립을 지킬 필요가 있지만 대결 구도가 강자와 약자인 경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약자를 지지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강골 좌파 청년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한국 기독교 신도가 대부분 우파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이처럼 기득권 우파'가 < 중립 > 을 강박적으로 호명하는 이유는 대중을 < 구경꾼 > 보다는 < 방관자 > 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 구경꾼 " 이란 캐릭터'는 싸움에서 지는 약자'를 도울 의무(혹은 싸움을 말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 만약에 구경꾼(들)이 피를 흘리는 피해자'를 돕지 않고 가해자'를 도운다면 그 사람은 구경꾼이 아니라 가해자와 함께 사건 가담자'가 된다. 힘있는 기득권 입장에서 보면 구경꾼의 개입'은 이래저래 달갑지 않다. 구경꾼이 개입하지 않으면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 그래서 기득권은 항상 중립을 요구한다. 세월호 사건에서 나타는 " 가만히 있으라 ! " 라는 명령은 잘못된 오류라는 점이 명백하게 밝혀진 상징적 정언'이었다. " 가만히 있으라 " 와 " 중립을 지켜라 " 라는 말은 소극적 방관자'가 되라는 소리와 같다.
우리는 흔히 중립적 태도를 냉철한 이성과 공평한 자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립적 태도'는 반드시 공평한 자세'라고 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이 싸울 때 공평하게 주먹으로 서로 한 대씩 얼굴을 때리기로 합의했다고 치자. 공평한 결정일까 ? 만약에 서로 주먹을 한 대씩 나누기로 결정한 대상이 마이크 타이슨 대 일반인'이라면 ? 다른 예를 들어보자. 잘생긴 사람에게 못생겼다고 놀리는 것(A씨의 경우) 과 못생긴 사람에게 못생겼다고 놀리는 것(B씨의 경우)은 하늘과 땅 차이'다. A는 대부분 농지거리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B 같은 경우는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힌다. 잘생긴 사람에게 외모'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지만 못생긴 사람에게 외모'는 극복해야 할 열등감'이기 때문이다.
잘생긴 사람이 못생겼다는 지적에 대해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웃어넘겼다고 해서 그 사람 됨됨이'가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가진 자의 여유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태도일 뿐이다. 외눈박이 나라에 표류한 걸리버'가 외눈박이 나라 백성에게 눈알이 하나라고 놀린다고 해서 모욕감을 느낄 외눈박이'는 없다. 그 나라에서는 외눈이 정상이고 두 눈이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못난이'라는 지적에 못생긴 사람이 벌컥 화를 냈다고 해서 A의 넓고 넓은 대갈머리를 찬양하며 B를 쩨쩨한 소갈머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밟으면 꿈틀거리는 서정은 지렁이나 인간이나 동일하지 않을까 ? 만약에 이 농지거리에 대해 A와 B 둘 다 우럭처럼 버럭 화를 낸다면 두 사람 가운데 성질머리'가 더 고약한 쪽은 소갈머리가 아니라 대갈머리'다.
<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 을 < 강자(甲)와 약자(乙) > 로 치환해도 답은 얼추 비슷하게 나온다. 동일한 욕'이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체감 온도는 상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가짜 보수는 A와 B의 " 차이 " 를 인정하지 않는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양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획일성 사회'를 의미한다. 파시즘'이 지향하는 사회가 바로 획일성'이다. 역설적이지만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해지는 순간은 성서러운 신성神聖이 아니라 소박한 인성人性에 있었다. 손바닥에 뚫린 못자국보다 더 위대한 장면은 십자가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자주 기울어지는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한쪽으로 기울어져야 한다. 그래야 인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