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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호 - [초특가판]
구스 반 산트 감독, 키아누 리브스 외 출연 / 서울콤 / 2003년 8월
평점 :
끝
물 위에 씌어진 3
최승자
꿈인지 생시인지
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
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
꿈인지 생시인지
나도 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내 이름은 짦은 흐느낌에 지나지 않았다
오 명목이여 명목이여
물 위에 씌어진 흐린 꿈이여)
(죽음은 작은 터널 같은 것
가는 길은 나중에야 환해진다)
새해가 밝았다. 모두 다 새로운 다짐을 경쟁적으로 내놓는다. 흡연가는 금연을 시작하고, 애주가는 금주를 선언한다. 새것은 새 자루에 담아야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새해에 < 시작 > 대신 < 끝 > 에 대해 말하련다. 시작보다 중요한 것은 끝이니까. 시작은 " 끝의 티끌 " 일 뿐이다. 어릴 때부터 " 끝 " 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살았다. 예술적 아우라는 대부분 끝이 주는 정서에서 나온다. 내가 교보문고 건너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쉬이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읽은, 이른 봄 늦가을 같던 계절에 읽은 최승자 시집 속에서 " 가는 길은 나중에야 환해진다 " 라는 싯구를 읽었을 때 울컥했던 마음은 < 나중 > 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한 시간의 폐허'를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 나중 " 이라는 말은 시간의 맨 끝 혹은 끝나고 난 뒤'를 의미하기에 그것은 더 이상 갈 곳 없음이거나 뒤늦은 회상을 담고 있다. 끝이란 늘 시작하는 과정에 대한 연민과 위로를 품는다. 로드 무비'에서 주인공은 배우가 아니라 길'이다. < 길 > 은 항상 처량하고 삭막하며, 동정 없으며 매섭고 오라지게 춥다. 길은 타자를 품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품는 순간 그것은 길이 아니라 관광엽서에 박힌 풍광 좋은 풍경일 뿐이다. 아, 그러나...... 길은 아름답다. 길이 아름다운 이유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로드 무비는 반드시 길 위에서 끝난다. 여정 旅程'은 멈춘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연출한 영화 << 길 >> 에서 짐파노는 젤소미나가 즐겨 부르던 노랫소리에 발걸음을 멈춘다. 젤소미나는 부재하고 목소리만 길 끝 막다른 골목에 남아 있다.
먼지를 쓸고 가던 칼바람이 막다른 골목 벽을 만나 품었던 먼지를 분수처럼 쏟아내듯이, 짐파노는 참고 참았던 눈물을 끝이 보이는 막다른 길에 쏟아낸다. 영화 << 파이란 >> 도 마찬가지다. 3류 건달 이강재'가 방파제에 앉아 어미를 잃은 짐승새끼처럼 목놓아 우는 장면이 주는 파토스는 이강재 때문이 아니라 " 길의 끝 " 때문이다. 이처럼 로드 무비는 " 길의 끝 " 을 보여주는 장르'다. " 길의 끝 " 에 다다르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산악 등반가 말로리가 왜 산을 오르느냐는 질문에 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로드 무비는 끝이 있기 때문에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학 작품 또한 끝이 주는 아우라'를 다룬다. 갈 때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서사보다는 되돌아올 수 없는 몰락을 다룬 작품이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끝이 있기에 가능했다.
<< 폭풍의 언덕 >> 은 길의 끝이 벼랑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끝까지 간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끝이 반드시 절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끝은 쓸쓸한 절망과 함께 쓸쓸한 희망을 전하기도 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이 마침내 끝이 보일 때 희망이 생기듯이, 흐지부진한 연애도 끝이 보일 때 차리라 속 시원한 쾌감을 얻기도 한다. < 마지막 > 이라는 낱말보다 < 끝 > 이라는 낱말이 주는 음율'이 좋다. 1음절이 주는 단호함 속에는 신파에 대한 배제'를 담고 있다. 1인칭 소설은 감정 표현을 최소화해야 좋은 문장이 될 수 있다고 배웠다. 1인칭 소설에서 1인칭 화자가 자기 감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촌스러운 문장은 없다.
어젯밤, 꿈을 꾸었다. 왼손 손목을 자르는 꿈이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면서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황한 나는 오른손으로 땅바닥에 떨어진 왼손을 집었다. 차가운 손끝이었다. 꿈에서 깨어났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 아이다호 >> 를 보다가 다시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