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새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꽃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 햇빛 속에서 겁도 없이.
ㅡ 황동규, [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 전문
첫 끝발이 개 끝발이라는 말이 있다. 천재적 재능을 너무 젊은 나이 때 발산하게 되면 끝에 가서 재능이 고갈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되는데 한때 천재 시인으로 불렸던 오쉬프만젤쉬탐'도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오쉬프만젤쉬탐은 러시아 국민 시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춘기 시절 시를 쓰기 시작해서 스무살이 되기 전에 시집을 출간했던 시인. 고도리에, 똥 흔들고, 따따블에, 쓰리고를 외치고 피박 뒤집어씌워 첫 판을 휩쓸어 노름판 노름꾼을 가재미 눈깔로 만든 오쉬프만젤쉬탐 ! 하지만 나중에는 요 밑에 꼬불쳐 둔 비상금마저 탈수기처럼 탈탈 털리는 신세가 되었다. 순수했던 어린 시인은 어른이 되어 타락했다. 그나 나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지 못했으나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넉살이 좋아서 친화력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이 친화력이 과한 듯하면서 동시에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의 치근덕은 인간적이어서 좋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는 천상 시인이었다. 나와는 정반대'였다. 나는 거절 공포증이 있어서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기지 않으면 여럿이 모이는 자리를 약속한 적은 있어도 단 둘이 만나는 자리를 먼저 제안한 적은 없다. 자칫 잘못하면 치근덕거리는 남자로 오해받는 게 싫어서다. 사랑 고백도 받기만 했을 뿐, 먼저 고백한 적이 없다. 반면 오쉬프만젤쉬탐은 " 거절 공포증 0 % " 환자였다. 약속을 거절해도 서운해하거나 토라지지 않았다. 문득 오래 전에 보았던 자연 다큐'가 생각났다. 수컷 새는 반짝거리는 예쁜 돌을 주워 평소 좋아하던 암컷 앞에 다가가 돌을 내려놓았다.
구애 행위'였다. 암컷이 보는 둥 마는 둥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수컷은 보다 더 예쁘고 반짝거리는 돌을 주워 다시 암컷 앞에 내놓았다. 내가 만약에 그 새였다면 첫 번째 거절에 낙담하여 꽁지 빠지게 도망쳤을 것이다. 거절에 대한 불안 공포를 가지고 있는 나로써는 부럽고, 부럽고, 부러운 근성이었다.내가 가끔 떼거지로 사람들을 긁어모아 술을 마시는 이유에는 거절에 대한 데미지'를 최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까 ? 그러니까 이 작전은 스팸 메일과 같은 형태'였다. 다수에게 메시지를 뿌리면 응답하는 이는 소수지만 이 소수 정예'가 마치 다수 의견처럼 느껴져서 거절당했다는 불안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가지도 아니면서 가지가지한다고 놀려도 좋다. 고래도 아니면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당신이나 오리도 아니면서 오리무중인 당신이나 나나 피차 매한가지'다. 그게 내가 가진 꾀죄죄한 한계'다. 나는 인간이 품은 품성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월남 쌀처럼 푸석푸석한 술자리를 좋아했다. 끈끈한 관계는 질색이었다. 음식은 영양가 있는 게 좋지만 인간 관계는 영양가 없는 게 좋았다. 별 볼 일 있는 사람보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았다. 대화는 즐겁게 관계는 냉정하게 ! 그래서 나는 남자끼리 몰려다니며 " 브라더후드 " 를 강조하는 우정이 못마땅했다. 그것은 " 브라더후드 " 라기보다는 " 불알- 후드 "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내새끼들은 테스토스테론이 과다 분비되어서 쓸데없이 우정과 의리'를 들먹인다.
나는 한국 남자들에 왜 그토록 브라더후드 지랄같은 남성 혈맹 를 강조하며 끈끈하게 붙어먹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끈끈한 관계는 사랑하는 애인 한 명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 황동규 시집 제목이기도 한 시 [ 버클리풍 사랑 노래 ] 는 읽기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버클리라........ 버클리는 도대체 어느 촌구석에 있는 마을일까 ? 양촌리는 들어봤어도 버클리'는 금시초문이어서 버클리풍 사랑 노래'를 내가 과연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한국인은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앵두 같은 입술을 괄약근처럼 오므리며 샐러드를 오물거려도 집에 들어가면 본능적으로 젓갈 냄새나는 묵은지 한 조각 먹고 싶은 DNA가 몸속에 저장되어 있으니
<< 버클리풍 사랑 노래 >> 라고 해도 사실은 << 양촌리풍 사랑 노래 >> 와 비슷하지 않을까 ? 시적 화자인 < 나 > 는 여성성이 두드러진 남성이다. " 오빠만 믿어 봐 ! " 라고 호탕하게 허세를 부릴 만도 하지만 나는 묵묵히 사랑하는 그대가 해야 할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한다. < 나 > 는 사랑하는 "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 꽃꽃이도 /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 그냥 설거지일 뿐. " 이라고 고백한다. 힘과 의리를 외치는 수컷들이 못마땅해 할 짓'이다.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이만큼 준비했다는 생색을 내기 위해서는 티가 나는 이벤트를 벌려야 그대가 감동할 터인데 시적 화자는 단순히 " 그대 모르는 새 해치우는 " 설겆이로 마음을 표현할 뿐이다.
누군가는 해야 될, 사소한 일이기에 모르는 새 해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에둘러 설겆이로 표현하는 시적 화자를 보고 있으니 반짝거리는 예쁜 돌을 물어 암컷 새 앞에 떨어뜨리고는 이내 사라지는 수컷 새의 구애가 생각났다. 시적 화자는 예쁜 돌을 주워 사랑하는 암컷 앞에 놓고 가는 대신 설겆이를 선택한다. "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 " 으면 반짝거리는 예쁜 돌이 되리라. 시인이 < 물비누 > 란 시어 대신 < 비눗물 > 이라고 했으면 이 시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란 작은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아름다운 존재는 항상 " 우리 모르는 새 " 찾아온다. " 우리 모르는 새 / 언덕 새파래지고 / 우리 모르는 새 / 저 샛노란 유채꽃 " 이 피고 우리 모르는 새 사랑은 싹 트고......
시를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 태어나서 멋진 프로포즈 한 번 못했다. 설겆이만 한 인생이다. 만약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예쁜 조약돌을 주워 여자 앞에 툭, 던져놓으리라. 그대가 거들떠도 안 본다 해도 그 옛날처럼 꽁지 빠지게 도망치지는 않으리. 돌을 주워 만리장성을 쌓으리. 밤새 끈적끈적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 타액과 정액으로 범벅이 된 얼룩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다음날 "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 서 "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 " 으면 되니까. 더러워진 몸, 내가 깨끗이 씻기리라. 유리 접시'를 조심스럽게 닦듯이 ! 가을이 되니 시만 읽게 된다. 가을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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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내가 아는 유일한 새 이름은 은하철 씨'다. 나머지는 모르는 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