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착한 복수

 

 

 

 

쨍한 사랑 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

 

- 황동규, 시집 [ 우주에 기댈 때도 있었다 ] 중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 속에 그 여자 이름을 썼다 지웠다. "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 " 과 "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 싶은 마음이 썰물과 밀물이 되어 서로 뒤엉켰다.  한때 내 전화만 기다렸던 여자는 어느새 내 전화만 받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미워할수록 보다 간절한 마음이 자랐고,  간절할수록 지독한 미움'이 자랐다. 잊어야 한다는 다짐과 잊을 수 없다는 고집이 싸웠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뿌리를 뽑진 못하고 애꿎은 이파리만 잘랐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었다.  천국이라 해도 사랑을 잃으면 지옥이 되니까. 말하자면 사랑은 지옥에서도 천국을 경험하게 만들고, 말하자면 이별은 천국에서도 지옥을 경험하게 만드니까. 쨍쨍 해 뜬 날에도 우레 우는 날이 되고, 봄바람 불어도 칼바람 되어 추운 날이 된다. 내가 유독 그 여자와의 이별 앞에서 힘들었던 이유는 착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착한 여자가 아니었다면 냉정한 얼굴로 돌아서는 떠돌이 개처럼 미련 없이 그녀를 잊었을 것이다. 낡았지만 오래 입어서 편안한, 몸에 맞는 외투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지지난해 봄날. 종로 3가 옛 피카디리 극장 터 거리에서 그녀와 우연히 마주쳤다.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녀 옆에는 새로 사귄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영화를 보려던 마음이 사라졌다. 좋지 않은 진찰 결과를 통보받고 식욕을 잃은 위암 환자처럼 말이다. 계획을 접고 둘둘치킨에서 술을 마셨다.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던 동료가 나를 위로하자, 겨우내 얼었던 수도가 이른 봄볕에 녹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녹물을 쏟아내듯, 눈물이 터졌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겨우내 꽁꽁 얼었던 수도였고 여자는 빨래감을 들고 수돗가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이내 떠났다는 사실을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젖은 빨래가 쥐새끼보다 빨리 마르던 가을 초입의 늦은 여름 오후, 등골을 타고 또르르 굴러 엉덩이 골에 땀이 고이던 날을 기억한다. 여자가 말했다. " 어쩌면 내가 지금 당신에게 보내는 헌신은 훗날 당신을 향한 복수일지도 몰라 ! "  착한 여자가 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 속에 칼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착한 여자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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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terotopia 2014-09-21 2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소라의 노래 중에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게 언제였더라. 한 이 년 전쯤이었을까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네요. 나에 대해 별로 자신이라는 게 없었는데, 사랑에 서투른 사람이란 게 으레 그렇듯이 누군가의 친절이 그렇게 좋을 수밖에 없었던 때가 그런 때였는데...

맥주를 주고 받으며 대화를 몇 마디 나눴던 게 전부였던 게 첫 만남이었고, 바람처럼 쓸데없이 휘발될 것 같은 풋내기 사랑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이건 안 되는 사랑이다, 싶어서, 좋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사람들이 거의 없는 길 한복판에서 멍하니 서 있던 적이 있었네요. 외로움이란 게 짐승이 달려드는 것보다 더 무섭도 괴롭구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혼자 서 있던 날 우연히 술자리가 있어서 거기서 눈치없게 소주에 푹 취했던 적 기억이 있네요.

지금도 가끔씩 얼굴을 마주치곤 하지만 남자 대 여자로서가 아니라 학생과 학생으로서... 사심이 없는 척.

그 무렵에 듣게 된 데 이소라의 그 곡인데... 들으면 들을수록 우울해지더군요 :)...

말하자면 사랑 같은 것은... 처음 듣는 이소라의 노래인데 무척 좋네요. 페루애님이 문득 부럽기도 하구요. 짧은 문단 그 사이사이에 많은 흔적들이 보여서.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1 20:46   좋아요 1 | URL
사랑 때문에 술에 취하면 대책이 없죠. 사실 이 노래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라디오 이 노래 나오는데... 아, 시발... 뭔가 콕 찌르더군요. 이소라 노래 가사말이 좋잖아요. 노래 듣다 보니 쨍한사랑노래 라는 시가 생각나더군요. 마음속 설물과 밀물이 온 길가 갈 길이 되어 서도 부딪다보면 격랑이 일기 마련이죠.

저는 일종의 고백 공포증이라고나 할까요. 먼저 사랑 고백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거절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나 먼저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주길 바랐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댕에게.. 이 노래도 참 좋죠. 제가 좋아하는 곡입니다. 고백이란 늘 힘들죠. 용기를 한번 내보시기 바랍니다. 단 한번도 사랑 고백을 먼저 하지 않았던 사람의 후회이니 말입니다.

heterotopia 2014-09-22 00:2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사랑 때문에 술에 취하면 대책이 없는데... 역시나 고백하지 않는 것은 후회만 남는 일이죠. 알면서도, 역시나 거절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는 건 사실이네요. 아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2 15:23   좋아요 1 | URL
고백하지 않아도 아마 그분도 알고 계실 겁니다. 괜히 토리 님 댓글에 울컥해서 모르는 새`란 글을 쓰게 되었네요. 고백하지 못함... 말하지 못함.... 이거 참... 힘들죠. 짝사랑은 정말 힘든 겁니다. 힘내십사, 주문을 외우겠습니다.

heterotopia 2014-09-22 20:5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새로 쓴 그 글 역시 일독했습니다.

풀무 2014-09-2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아침에 이런 글을... 곰발님의 독한 가을감성-!

그러고 보면 이소라가 오히려 요즘 여류시인들보다 낫다는 생각을 종종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1 23:15   좋아요 1 | URL
가을 하면 시를 읽는 계절 아니겠습니까.
이소라 노래는 확실히 시적이에요. 가사말이 좋습니다.
바람이 분다 같은 경우는 시보다 더 시 같고 말이죠.....

엄동 2014-09-22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곰발님 블로그는
앞으로도 쭈욱.
가을이었으면 좋겠어요
시도, 글도, 음악과 가사마저도 참 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2 15:21   좋아요 1 | URL
글은 모르겠으나 시도 음악도 참 좋죠. 제가 황동규 시를 좋아하는데
특히 이 시 1연 2연 은 딱 그 마음이더군요.
이 모순된 집착과 떨침...

가을 되니 시가 읽힙니다.
역시 가을에는 시를 읽어야 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