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드랑이 털과 제모 !
오쿠다 히데오의 << 공중그네 >> 를 읽다가 뾰족한 것을 보면 공포(선단공포증)을 느끼는 야쿠자'에게 격하게 공감한 적이 있다. 내게는 선단공포증은 아니지만 " 가위 " 에 대한 공포증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 가위 소리 " 공포증이다. 발단은 미용실에서 시작되었다. 그날따라 가위 소리'가 호박 나이트 클럽 JBL 스피커에서 쏟아내는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싹둑, 싹둑, 싹둑...... 미용사가 실수로 내 귀를 자르면 어떻게 하지 ? 조그마한 걱정이 태산이 되었다. 과호흡 증상이 시작되었고, 땀을 비오듯 쏟아냈다. 눈을 뜨니, 나는 미용실 쇼파에 누워 있었다. 미용실 아가씨'가 걱정되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119 부를 뻔했어요, 괜찮으세요 ? " 호흡 곤란으로 죽기 전에 먼저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자리를 털고 나오는 대신 얼굴에 묻은 털을 털고 나왔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걸어둔다.
http://blog.aladin.co.kr/749915104/6734753 ( 왕가위와 가위 )
정신과 의사 이라부 선생을 알음알음 물어서 찾아갔다. 그가 말했다. " 곰곰발 씨 ! 당신은 소리 공포증을 앓고 있습니다. 특정 소리에 공포를 느끼는 증세죠. 흔한 증상입니다. 가장 흔한 예로는 천둥 번개 소리에 공포를 느끼는 것도 소리 공포증입니다. 곰곰발 씨는 가위 소리'에 공포를 느낍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아들 머리를 손수 깎다가 귓볼을 자른 적 있다고 했죠 ? 그 트라우마가 성인이 된 지금 발현된 것으로 보입니다. 환청은 아니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아하는 음식이 ? 아, 소곱창에 소주 ! 캬 ~ 좋죠. 좋습니다. 닝기미, 없어서 못 먹죠. " 이라부 선생은 처방전을 쓴 후 내게 내밀었다. 처방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소곱창 1인분 + 소주 1병. 나는 그날 소곱창에 소주를 마셨다. 공포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의사 말대로 일상에서 가위 소리 때문에 불안 증세를 보인 적은 없지만 그때 일에 대한 불안과 불쾌감은 계속 남았다. 그래서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일을 꺼리게 되었고 미용실 방문은 1년에 한 번 꼴로 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 털 " 을 기르게 되었다. 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1년에 한 번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면 머리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번은 목욕탕에 갔는데 목욕탕 카운터 아줌마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 그리루 가면 안 됩니다. 저쪽으로 가야디요 ! " 나는 화들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는 건너편 남탕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 목욕탕 탈의실에는 아저씨 대신 아줌마들이 있었다. 그것은 라면 봉투를 뜯었더니 싱싱한 고등어 한 마리가 들어 있는 꼴이었다.
어떤 아줌마는 다리를 쫘악 벌려 발톱을 다듬고 있었다. 울창하고 검은 숲이 눈에 들어왔다. 벌거숭이 민둥산이 아니었다. 아마존 밀림에 가까운 숲이었다. 아, 저 무수한 침엽수림. 나는 속으로 속삭였다. 시바, 좆됐구나 ! 황급히 문을 닫고 확인하니 여탕이었다. 왜 카운터 직원은 내게 여탕으로 가라고 손짓했을까 ? 카운터 직원에게 따져 물었더니 머리가 길어서 여자인 줄 알았단다. 그날 이후, 나는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털을 키우다 보니 애정이 생겼다. 털은 성격도 털털해서 고양이처럼 까탈스럽지도 않았다. 무럭무럭 자라라, 내 털들 ! 털을 기르다 보니 수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 좋은 수염은 드물었다. 특히 동양인은 내시 수염이 팔 할'이었다. 촘촘하게 박혀야 되는데 듬성듬성 박히다 보니 동네 양아치 삘이 대부분이었다. ( 물론 나도 양아치 삘이 나는 수염이다 )
개그맨 김준호를 보면 짜증이 났다. 털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수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털이 나는 영역이 좋은 수염을 만든다. 내가 메이저리그'를 열심히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수염 난 선수들 때문이었다. 보스턴 레드삭스 팀은 털보 왕국'이었다. 한편, 웅이네 가족은......
털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카잔차키스 소설 << 그리스인 조르바 >> 에는 베갯속으로 여자 거웃을 모아서 베개를 만들었다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굉장한 계획이군. 오, 오오. 수많은 털들 ! < 털 > 에 대해 관심이 있다 보니 여성 제모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아는 사람(남성)은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 다리털과 겨드랑이 털을 뽑는 체험을 했는데 생각보다 고통스럽고 불편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여성은 매끈한 팔, 다리, 겨드랑이'를 위해서 기꺼이 고통을 감수했던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죄없는 털들아 ! 미안하다아아아아. 그렇다면 여성은 왜 털을 제거할까 ? 단순히 남자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한 욕망 때문일까 ? 여성 제모는 미용에 대한 여성의 욕망'보다는 겨드랑이에 털 난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의 시선이 작용한 탓이 크다.
남성 입장에서는 내 털을 뽑는 것도 아니니 고통을 알 리 없다. 여성 몸은 남성이 요구하는 대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가슴은 풍만해야 되고, 허리는 잘록해야 한다. 엉덩이는 커야 한다. 그리고 털은 머리털과 거웃만 남기고 모두 뽑아야 한다. 남성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몸을 만들기 위해서 여성은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A, D, H, I 형 몸매는 S라인이 되기 위해 죽을 똥을 쌌다. 문제는 주류 남성 사회의 요구를 거부하고 싶어도 강제로 들이대는 사회적 요구를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대한민국 주류 남성 사회는 " 중국산 오리털 " 은 용서해도 " 겨털 " 은 용서하지 못한다. 당신이 겨드랑이 털을 잔뜩 기른 후 버스 손잡이를 잡을 때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한다. 꼴불견이네 ! 다음은 한겨레 신문에 난 기사 내용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겨드랑이를 매끈하게 관리해온 걸까. <털-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에서 저자 다니엘라 마우어와 클라우스 마이어는 기원전 500년께부터 ‘체모 면도’가 행해졌다고 쓴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저서 <사랑의 기교>에 종아리 털을 깎는 것은 필수이며 제모를 위한 보조용품으로 농도가 치명적인 다양한 크림이 사용됐다는 내용이 있다. 근대 초기까지의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몸에 털은 한 오라기도 없다. 20세기 초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가 털의 물꼬를 텄지만 털 없는 여체에 대한 강박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자본의 영역으로 옮아가 더욱 공고해졌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여성해방 물결과 함께 여성의 몸을 죄었던 길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대신 짧고 간편한 옷들이 등장하자 여성지 칼럼니스트들은 겨드랑이와 팔뚝의 털을 면도해야 한다고 권하기 시작했다. 이어 당시 미국의 화장품 산업은 ‘여성과 위생’을 내세우는 광고를 통해 겨드랑이 털을 박테리아의 온상으로 낙인찍는다. 질레트는 1915년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머리 위로 팔을 들어올려 털을 제거한 매끈한 겨드랑이를 보여주는 모습의 광고를 통해 ‘털 없는 겨드랑이’에 대한 미적 선호를 만들었고, 여성지 <하퍼스 바자>에서 4년 동안 끈질기게 겨드랑이 털 제모를 유도하는 광고를 해서 ‘털 없는 몸이 아름답다’는 절대 기준을 만들었다.
- 한겨레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는 것이 문화적 기본 소양과 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짓'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왜 그 기준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지는 의문이다. 겨드랑이 털이 박테리아의 온상이라면 공평하게 남자도 깎자 ! 털은 죄 없다. 매끈한 몸매가 보기 좋다고 해서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다. 선택하라 ! 질레트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독립적 인간이 될 것인가. 나는 세상의 모든 털을 지지한다. 신은 말했다. 네 털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지어다. 털은 언제나 온유하며, 털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한다. 그리고 털은, 오. 오오오오 섹시하다. 울창한 침엽수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