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을 해석할 수 없다

 

 

 

 

 

이 글은 실화'다. 가끔 " 입말의 쾌락 " 을 위해 사소한 일을 과장해서 부풀리는 경우도 있었으나, 지금 내가 당신에게 전할 말은 그러한 수식을 배제한 채 " 사실 " 만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하기로 한다. 서울역 건너편에 대성학원이라는 입시학원이 있었다. 인기 있는 과목을 신청할 경우는 새벽부터 줄을 서야 수강할 수 있을 정도로 학원은 번성했다. 주변은 온통 학생을 상대로 한 식당과 고시원 그리고 위락 시설이 즐비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주로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공부했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새벽에는 신문보급소에서 신문을 돌렸고, 아침에는 학원으로 출근했다. 숙식은 신문보습소에서 해결했다. 용돈도 벌 수 있고 숙식도 해결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였다.

 

그런데 새벽에 신문을 돌린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신문보급소에서 마련한 집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신문을 3,400부 정도 돌려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 7시까지 일을 한다. 그만큼 잠잘 시간이 부족하고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다. 그래서 그랬을까 ?  신문보급단 청년들은 장수생이 많았다. 3수는 기본이고 4,5,6수 하다가 결국에는 공무원 시험으로 빠지기 일쑤였다.  어떤 이는 신문 배달을 아예 직업으로 삼는 이도 있었다. 당시 나는 비디오 대여점과 영화감상실을 동시에 운영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내가 일했던 곳이 주로 고시원과 학원이 밀집해 있어서 " 공부 스트레스 " 를 풀기 위해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신문보급단 청년들은 비디오방 단골이었다. 주로 액션 영화나 만두 부인 속 터졌네 따위의 에로 영화를 보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일이 끝나면 각자 추렴하여 공원 팔각정에 앉아서 삼겹살을 구워먹고는 했다. 대부분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술이 일 배, 이 배, 삼 배 돌다가 누군가가 삼 년 전에 보급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사건 속 주인공은 작년에 신학대에 입학한 늦깎이 형이었다. 피식 ! 그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이 안 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못 믿겠다고 하자 신문보급소 청년단은 그 사건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 아니라 그때 그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였다. 풍문이 아니었다. 나는 충격에 빠졌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s의 고향은 충청도 당진이었다(당진이었나?!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상경해서 서울에 있는 공장에 다니다가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삶의 목표를 정했다. 그는 공장을 그만 두고 (서울역 신문보급소에서 신문을 돌리면서) 신학 대학을 목표로 입시 공부를 했다. 목표가 뚜렷했던 만큼 남들보다 몇 배 열심해 공부를 했다. " 무섭게 공부했어라 ! " 전라도에서 올라온 청년이 말했다. 이 말에 신문보급소 청년단이 모두 고개를 끄덕인 것을 보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인정을 하지 않아도 결과가 말해주고 있었다. s는 명문 신학대에 다녔으니깐 말이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 어느 날 아침 " 이었다.

 

신문보급소 직원이 숙소 방에서 칼에 찔려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바닥에는 선홍색 피가 흥건했다. 사망 시간은 대충 새벽 4,5시로 추정되었다. 현장을 조사하던 형사가 주목한 곳은 거실 식탁이었다. 형사는 누군가가 거실 식탁에서 밥을 먹은 흔적을 발견했다. 식탁에는 반찬통이 놓여 있었고 싱크대에는 씻지 않은 밥그릇과 숟가락이 있었다. 신문보급소 청년단이 그날 경찰에 진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그날 새벽에 식탁과 싱크대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결국 사망 시간 이후, 누군가가 이곳에서 밥을 먹었다는 말이 된다. 방문은 열려 있었다. 핏자국은 방뿐만 아니라 거실 여기저기 족적을 남겼다. 피해자는 보급소를 관리하는 직원이었기에 신문을 돌리지 않았고 신문을 돌리고 온 학생들 아침밥을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가 새벽에 밥을 챙겨 먹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결론은 하나로 좁혀졌다. 누군가가 살인 현장을 목격했지만 그 자리에서 신고를 하지 않고 아침밥만 먹고 사라진 것이다.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정황상 범인일 가능성은 충분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 아침을 먹고 사라진 사람의 정체는 금방 드러났다. s였다. s는 경찰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 신문을 돌리고 왔습니다. 서둘러야 했어요. 직장인을 위한 새벽반 강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습니다. 밥을 차리다가 문득 거실 바닥이 피로 얼룩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방문이 열려 있길래 보았더니 사람이 죽었더군요. 순간 고민했습니다. 경찰에 알려야 할까 ? 경찰에 알리면 이리저리 다니며 조서를 꾸며야 하고, 그러면 내가 공부할 시간을 빼앗길 것 아닌가 ?

 

모른 척하자. 다음에 오는 친구가 신고를 할 거야 ! " 경찰은 당연히 그 진술을 믿지 않았다. 경찰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범으로 몰렸다. 이 황당한 변명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깐 말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공부할 시간을 빼앗길까 봐 신고를 안 했다 ?! 하지만 곧 진범이 잡혔다. 피해자와 아는 사람이었다. 범인이 자백을 했기에 s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무혐의로 풀려났으므로 그가 그날 진술한 변명은 진실이 되었다.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는 피가 흥건히 고인, 살해 현장에서 국에 밥을 말아 먹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그리고는 학원으로 달려가 영어 수업을 들은 것이다. 나는 이 사실 앞에서 매우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는 s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고, 친절했으며, 신앙심이 깊었다. 가끔 그와 술을 마시면 그때 일을 꼭 물어보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했다. 그 사건은 그에게도 숨기고 싶은 사건이니깐 말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인간은 인간을 해석할 수 없다. 나는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면담하면서 느꼈을 " 당혹감 " 을 이해한다. 그녀는 악이 평범하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만나기 전에 그에 대해 수없이 상상하고는 했다. 얼마나 잔인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 얼마나 독한 말이 쏟아질까 ? 얼마나 뻔뻔한 자기 변명을 할까 ? 그녀는 그를 상상할 때마다 전율했다. 하지만 그녀가 만난 아이히만은 조용하고 성실하며 약간 수줍은 사람이었다.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s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방향을 돌려 조그마한 영어 학원을 차렸다. 성실했기에 그럭저럭 장사가 되었던 모양이다. 가끔 그와 술을 마셨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언제나 목구멍에 걸려서 말하지 못했다. 그는 왜 외면했을까 ? 그가 느낀 허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하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나 또한 그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이 슬펐다. 나는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철탑 위 노동자를 외면했고, 밀양과 제주 구럼비 마을의 비극을 외면했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끌려갔지만 나는 꾸역꾸역 밥숟가락을 들었다.  만약 내가 s를 다시 만난다면 그때 이웃의 비극에 대해 왜 그토록 잔인했냐고 묻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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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7-0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능력이 없어 감정이 제외된 상태의 합리적 선택이죠. 신고를 조금 빨리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는 공부해야 할 이유와 시간이 필요했고.

제가 이전에 언급했던 실제 사건 ; 자신이 교통사고를 낸 죽어가는 여성을 강간한 후, 강간의 이유를 묻자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낭비잖아요라고 말한 청년이 생각나는군요.

마립간 2014-07-04 15:12   좋아요 0 | URL
그 분 지금은 잘 생활한다고 하시니, 공감능력이 없었던 것이 그 당시에 일시적이었을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7-04 15:22   좋아요 0 | URL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신학대 학생이었으니깐 말이죠. 십일조를 냈습니다.
기도를 하며 울었습니다. 이 눈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이
신학을 공부할 수 있을까요 ? 온통 궁금한 것투성이'입니다.


마립간 2014-07-04 16:31   좋아요 0 | URL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도 감정이 있으니 기도하며 울 수 있지요. (저도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지만,^^ 가끔 눈물을 흘립니다.) 공감능력이 강한 여자가 눈물을 흘릴 때, 같은 상황에서 무감각한 남자들을 흔히 볼 수 있지요. 그런 남자들은 감정적이라며 여성을 우습게 여기도 하고요.

공감능력이 떨어져도 이성은 멀쩡하니, 대체로 사회 생활에는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데, 공감능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죠. (위 경우와 같이)

공감능력이 필요한 대인관계에서는 일정부분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학원 경영에서 직원 관리라든가... 가족 내의 관계라든가. 그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독교 신앙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연민일 수 있습니다.

저의 궁금증은 ; 공감능력 상실이 그 당시 일시적이어서 지금은 공감능력을 회복하고 잘 생활하고 계신지, 아니면 여전히 공감능력이 없어 문제가 있는데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인지?

곰곰생각하는발 2014-07-05 11:42   좋아요 0 | URL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좀 답답하고 고지식한 면은 있어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폭력을 싫어하고, 욕을 하는 걸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이기적인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이웃을 자주 도운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돈을 벌면서는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 2명에게 매달 10만원 씩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계속 그게 머릿속에 남습니다.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2014-07-04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5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르푸르 2014-07-05 15:51   좋아요 0 | URL
꼬옥 오셔야 합니다 안그러면 욕을 먹어요 ㅡ,ㅡ

말리 2014-07-0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보면서 내린 결론은 사유의 부재라고 기억합니다. 아이히만은 충실하게 자신의 의무를 이행했지요. 그 의무 자체에 대해 사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화 '더 리더'가 비슷한 것을 다루었지요. 거기서 사유의 부재는 문맹으로 표현됩니다. S는 목사가 되지 않아 다행입니다. 공감이든 사유든 단지 영어 자체만 가르치는 것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수도 있을테니까요....적어도 목사보다는. 어이없는 목사가 많기도 하지만 적어도 상식적으로는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7-05 11:44   좋아요 0 | URL

영화 < 리더 > 는 보았습니다. 맞아요, 영화에서는 그것을 문맹으로 다루더군요.
매우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납니다.
s는 사실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거리에서 만나면 굉장히 좋아하고 즐거워 하고는 했죠.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진실을 잘 모르겠습니다.

마립간 2014-07-07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in.co.kr/maripkahn/7063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