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양말은 쉽게 마르지 않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참석하지도 못한 채 되돌아와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 집회는 없었다. 날짜를 착각한 것이다( 집회는 5월 4일이 아니라 5월 3일이었다 ). 구보 씨'처럼 할 일 없이 도시를 배회하다가 종로 3가 서울시네마로 향했다. 서울 극장'은 옛 명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골든 타임은 한때'다. 썰렁한 극장 로비를 보니 몰락한 패장을 보고 있는 듯했다. < 한공주 > 를 보기로 하고 상영시간표를 확인하니 2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극장 근처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 또한 텅 비어 있어서 창가 쪽 자리를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커피를 마셨다. 책을 읽다가 까마귀처럼 잠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멜랑꼴리한 기분이 들어서 직원에게 커피 리필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직원은 상냥하게 가능하다며 커피를 잔에 가득 부었다.
카페 앞 은행나무 가로수에서 뻗은 튼튼한 가지를 꽤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오월이 가기 전에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 생각났다. 목을 매 자살하려던 사람이 죽음 직전에 속옷을 더렵힐까 봐 항문에다가 당근을 박아넣었다는 내용이었다. 아, 그래 ! 소설 제목이 생각났다. " 만연원년의 풋볼 " 나 같으면 항문에다 당근을 박느니 차라리 관장을 했을 것이다.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떤 사람이 마당에 있는 빨랫줄을 끊어 방으로 가져와 목을 매려다가 시계 알람 소리에 깜짝 놀라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는 잠자는 가족이 깰까 봐 잽싸게 알람 버튼을 누른 후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고. 그리고는 마당으로 나와 떨어진 빨랫감을 주워 왔다고 한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욕실로 가 씻고 출근 준비를 했다.
빨래 더미에서 전날 잘 마른 뽀송뽀상한 양말을 골라 신자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 양말을 신었을 때, 그때 느꼈던 순간만을 기억하자고. 그 생각만 하면 세상을 못 살 것도 없지 않는냐고. 그래서 그 사내는 슬프거나 자살 충동이 일어나면 볕에 잘 마른 양말을 신었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가 내게 그 말을 한 것만큼은 어렴풋이 기억한다. 내가 아는 여자는 손에 지문이 없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엄마를 칼로 위협했다고 했다. 여자가 취직한 곳은 화학 약품을 다루는 공장이었다. 장갑을 낀다고 해도 늘 화학 약품이 손에 묻어서 날마다 살갗이 벗겨지다 보니 나중에는 지문이 사라졌다고 했다.
" 그럴 리가.... "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여자는 내 손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노동 운동 때문에 자주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렸다. 신분 조회를 하기 위해 지문을 확인할 때마다 사라진 지문 때문에 판독 불능 판정을 받고는 했다. 여자는 그 사실이 슬퍼서 울었다고 했다. 게이'였던 내 친구가 나중에 소식을 전해주었다. 여자는 자살했다. 소문은 흉흉했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노동자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시간이 되어 극장으로 향했다. 그때 거리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 고릴라'다 !!!! " 사색이 되어 소리친 사람이 가리킨 곳을 보니 덩치가 큰 고릴라'가 종로 거리를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사정없이 들이받은 후 내팽개쳤다. 그렇게 나가떨어진 사람은 서른은 넘어 보였다.
종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이 풍경이 시적이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고릴라, 봄비 그리고 난동이라...... 그때였다. 고릴라 눈과 내 눈이 서로 마주쳤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고릴라는 손으로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나를 향해 돌진하지는 않았다. 세월이 세월이니 만큼, 이 도심 속 난동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9시 메인 저녁 뉴스가 아닌 마감 뉴스 시간에 짧게 언급되거나 아예 기사를 내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 하긴 누가 믿으랴. 지리산도 아닌 종로 3가에 고릴라가 나타나 서울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릴라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서 나는 서둘러 극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 한공주 > 는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였다. 앞에 앉은 사람의 머리가 커 화면을 가리다 보니 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보느라 목을 빼야 했다.
하지만 목이 아프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음이 더 아팠으니깐. 피해자이면서 지역 사회로부터 쫒겨나 피해다녀야 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도 희망은 존재할까 ?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엔딩 자막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상영관 안에 불이 들어왔다. 그런데 내 앞에 앉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고릴라'였다. 이 고릴라가 아까 그 고릴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덩치는 비슷했다. 고릴라가 흘끗 나를 쳐다봤다. 내가 뒷걸음질치며 주변을 돌아보니 고릴라는 관객들 사이에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상영관을 나오면서 벽에 반사된 내 모습을 흘깃 쳐다보았다. 나 또한 고릴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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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뽀상한 양말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사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자살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날은 비가 내렸고, 뽀송뽀송한 양말은 없었다. 빨랫줄에 목매단 그는 젖은 양말을 신은 발을 축 내려트렸다고 한다. 젖은 돈은 말리면 되지만 절망은 쥐새끼처럼 가차없이 희망을 갉아먹어서 젖은 양말을 말리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최초 목격자는 그가 자살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바닥에는 젖은 양말에서 떨어진 물'이 고여 있었는데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