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신조 ㅣ 하늘에서 비가 내리니, 신이 그를 돕다.
8. 두보 시선 +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春夜喜雨(춘야희우)
杜甫(두보)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반가운 비는 시절을 알아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봄이 되니 내리네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시네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들길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둡고江船火燭明(강선화촉명) 강 위에 뜬 배는 불빛만 비치네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새벽에 붉은 빛으로 젖은 곳을 보니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금관성이 꽃으로 겹겹이 덮여 있네
好雨(호우)는 때맞춰 내리는 단비'를 뜻한다. 비'는 계절에 따라 이름이 각각 다르다. < 목비 > 는 봄철 모내기 할 무렵에 한목 오는 비이고, < 잠비 > 는 여름철에 내리는 비를 뜻한다. 옛날에는 농경 사회'였으니 여름에 굵직하게 거세게 퍼붓는 " 자드락비 " 가 내리면 일을 못하니 방에서 낮잠을 잔다고 해서 ' 잠비 ' 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속담 가운데 " 가을비는 떡비 " 라는 말도 있다. 잠비와 같이 비가 오면 일하러 나가지 못하게 되니 " 집 안에서 넉넉한 곡식으로 떡이나 해 먹고 지낸(네이버 국어사전) " 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밖에도 가랑비, 달구비, 먼지잼, 보슬비, 부슬비, 이슬비, 비꽃, 여우비, 웃비, 소나기, 자드락비, 채찍비, 단비 등이 있다. 어느 시인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했던가 ?
비는 계절에 따라 그 이름이 각각 다르고, 비 오는 양이나 형태에 따라서도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도 다르다. 단비'는 계절, 강우량, 형태에 영향을 받는다기보다는 간절히 원할 때 내리는 비'에 부여된 이름이다. 봄 가뭄에 내리는 비도 단비요, 무더울 때 내리는 비도 단비'다. 개인적으로 퇴근 무렵 내리는 겨울비'가 내게는 단비'다. 술 한 잔 하기 좋은 비다. 비와 관련된 낱말이 많다는 사실은 농경사회에서 비'가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엇보다도 때맞춰 내리는 단비는 반가운 손님과 같았으리라. 그래서 한국인은 " 비가 내린다 " 라고도 표현하지만 " 비가 온다 " 라고도 표현한다. 특히 단비일 경우는 단배가 내린다는 표현보다는 단비가 온다고 표현한다. 그렇다, 단비는 내리는 게 아니다 오는 것이다 !
두보의 < 춘야희우 > 는 " 단비 " 에 대한 시'다. " 好雨 " 은 " 時節 " 을 안다. 마치 덕이 있는 사람이 仁을 알아보듯이 말이다. 그래서 " 當春乃發生 / 봄이 되니 내 " 린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번역이 못마땅하다. " 봄이 되니 내리네 " 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 봄이 되니 찾아왔네 " 라고 해야 더 운치가 있지 않을까 ? " 隨風潛入夜 /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 에서 < 入 > 은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방향성이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 판단'이다. 됐고 ! 두보는 봄밤에 봄비가 오는 풍경을 본다. 봄이 오니 봄비가 찾아오고, 봄비가 오니 물비린내를 맡은 꽃이 활짝 피기 시작한다. 겹겹이 덮여 있다. 허진호 감독이 만든 < 호우시절 > 이라는 영화 제목은 바로 " 好雨知時節 " 에서 빌려왔으나 아쉽게도 영화는 시적이기는커녕 가장 지루한 영화'였다.
반짝이는 데뷔작 이후, 그는 계속 밋밋한 작품들만 쏟아내서 이제는 그가 만든 영화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영화 < 봄날은 간다 > 에서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 라고 달달하게 물었을 때, 나는 속으로 " 바보야, 문제는 사랑이 변한다는 거야 ! " 라고 외쳤다. 허진호는 몰라서 순진한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까부는 것일까 ? 모를 일이다. 이재용이 감독하고 배용준, 전도연, 이미숙이 연기한 <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 라는 영화를 보면 하늘에서 비가 내려 천하의 소문난 오입쟁이 선비'를 돕는 장면이 나온다. 내용은 다들 아시리라. 배용준은 1%다. 잘생긴 얼굴에 명문가의 후손. 더군다나 그림에 능하고 언변에 능했으니 흠잡을 데 하나 없는 귀족'이다. 비주얼도 되는데 실력도 갖추었으니 그 아무리 견고한 의자라 해도 그 앞에서는 모두 다 자빠진다. 그에게 섹스는 게임'이다.
사람 심리'란 준다고 하는 놈은 싫고, 싫다고 하는 놈에게는 끌리는 법 아닌가 ? 그는 명문가 과부인 숙부인 정씨(전도연)을 자빠뜨릴 계획을 꾸미지만 전도연 역시 호락호락 넘어갈 여자가 아니다. 숙부인 정씨는 26년 동안 단 한번도 자빠진 적이 없다. 하지만 포기할 그가 아니다. 그는 비 오는 궂은 날씨에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새 비는 그쳤으나 옷은 홀딱 젖었으니 초라하기 그지없다. 물론 여자는 거절한다. 남자가 하늘을 보며 나즈막히 말한다. " 부인의 마음을 알았소. 이만 돌아가리다. 그런데 하늘을 보니 다시 비가 올 것 같구려...... " 그때 때마침 비가 온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그리 야박하게 내쫒는 건 예의가 아닌지라 여자는 그에게 " 사랑채 " 를 내주었으나 그만 " 사랑 " 을 나누게 된다. 天佑神助(천우신조)란 말을 살짝 뒤집어서 天雨神助라 할 만하다. 하늘에서 때마침 비가 오니 신이 오입쟁이를 돕는지라......
이로써 27년 간 단 한번도 쓰러진 적이 없었던 튼튼한 의자는 다 자빠져서서 후대에 " 품행이 심히 방탕하고 난잡하며 정조 관념 또한 너덜하여 실제로 존재했을까 싶은 의자 " 가 되었다. 천하의 오입쟁이 남자가 전한 말에 의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 오, 가슴 ! " 에 도달했다고 한다. 남자에게 있어서 그날 내린 비는 " 호우 " 요, 단비'다. 비록 그 단비'로 인하여 비극적 결말을 맞았지만 말이다. 옛말에 " 가라고 가랑비 오고, 있으라고 이슬비 온다 " 는 말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눈치없는 객이 집에 가지 않고 밤새 술이나 마실 요량이니 주인이 꾀를 내어 밖을 보며 " 가라고 가랑비 온다 " 고 말한다. 그러자 엉덩이가 무거운 손님이 " 예끼, 이 사람아 ! 이게 어디 가랑비오. 있으라고 이슬비 오는구만...... " 고 농을 친다는 우스개.
아마도 바람둥이 선비가 숙부인 정씨 집을 찾아갔을 때 내린 비는 이슬비'였던 모양이다. 그날, 그는 숙부인 정씨 집에서 열흘을 머물렀으니 말이다. 나도 열심히 마음 수양을 하여 남들에게 가랑비가 아닌 이슬비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오늘의 일기는 여기서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