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말이 없는 것들.

 

6 : 아, 입이 없는 것들 + 섬

 

 

 

 

 

결핍은 욕망을 낳기에 절식은 포식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야기한다. 내가 연애에 실패했을 때, 이별 후에 오는 것은 슬픔, 상실, 후회 따위가 아니라 공교롭게도 코카콜라'였다. 하루 평균 뚜껑 달린 코카콜라를 일곱 개나 마셨다. 심지어는 1.5리터 대용량 코카콜라를 3병이나 마신 적도 있었다. 코카콜라 탄산 알갱이는 입 속으로 들어오면 느닷없이 피라냐로 변해서 혓바닥을 가차없이 물어뜯었다. 이 알싸한 고통은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 " 처럼 따가웠다. 이 고통은 독한 말을 쏟아냈던 입,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했던 입, 바람이 전했던 흉흉한 소문을 덧대어서 다른 이에게 즐겁게 속삭이던 입'에 대한 자기 징벌에 가까웠다(고 설레발을 쳐본다). 나는 구순기 고착형 인간'이었다.

 

그때부터 말수가 적어지기 시작했다. 개봉 영화'를 보는 횟수가 적어지는 대신 고전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말이 많은 우디 알렌 토키 영화보다는 말이 전혀 없는 찰리 채플린 무성 영화'를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점점 조용한 영화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조용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 거울 > 이라는 영화는 인간이 말이 없어지면 몸짓이 얼마나 우아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아, 말이 없는 것들 !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전문

 

 

" 저 꽃들은 " 초라하다. "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 " 작은 꽃은 금세 어두워진다. 이성복은 꽃을 "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엔 < 꽃 > 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슬픈 존재'다.  자유로운 잿빛 새와는 달리 꽃은 박힌 못'처럼 갇혀 있다. 꽃을 가두는 존재는 바로 " 꽃나무 " 이고, 그 꽃나무를 가두는 존재는 뿌리'다. 뿌리는 꽃나무를 가두고, 꽃나무는 가지를 가두고, 가지는 끝에 꽃을 피운다. 비유를 들자면 꽃은 물 위에 뜬 배이고, 뿌리는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물 밑바닥으로 내린 닻이다. 하지만 이 징역은 운명과 같아서 꽃은 뿌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말라 죽는다. 입이라는 기관이 없는 꽃은 뿌리가 입이다. 그러므로 낙화는 자유를 얻는 동시에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허무한 자유 의지'라 할 수 있다. 

 

입이 있는 것들은 위에서 먹이를 섭취해서 밑바닥으로 쏟아내지만 입이 없는 것들은 아래에서 섭취해서 위로 쏟아낸다.  역설적이게도 입이 있는 것'이 아래로 쏟아내는 것은 더러운 똥이지만 입이 없는 것이 위로 쏟아내는 것은 아름다운 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 꽃 > 은 꽃나무가 먹고 남은 것을 쏟아낸 결과'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 섬 > 은 입은 있으나 말이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기덕은 이 영화로 페미니즘 진영쪽 영화평론가들에게 살인에 가까운 독설을 들어야 했고 < 나쁜 남자 > 에서 정점'을 찍었다. 김기덕을 향한 비판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조롱과 경멸에 가까웠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력과 강간 장면을 여성에 대한 조롱과 경멸로 읽었고 똑같은 방식으로 감독에게 되돌려 주었다. 

 

김기덕을 비판하던 평론가들은 이 가학성'을 " 김기덕의 정신병적 취향 정도 " 로 이해했고, 가족 중에 가족력(정신과 치료를 받은)이 있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기상천외한 평론을 남발하는 이도 있었지만, 김기덕(영화)보다 더 폭력적인 이는 김기덕을 공격한 페미니즘 진영쪽 영화평론가들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문학과 미학적인 면에서 두루 성공한 작품이다. 낚시터 주인은  말수가 적은 여자가 아니라 말이 없는 여자'다. 有口無言인 여자는 인간이기보다는 人魚에 가깝다. 그녀는 물을 지배한다.  영화 < 섬 > 은 이성복이 시 < 아, 입이 없는 것들 >에서 다루는 세계와 유사하다.  닻에 고정된 부표(집)는 뿌리에 의해 고정된 꽃이다. 부표는 꽃이고 닻은 뿌리'이다. 꽃이라고 하기에 어두운 영화라면 물풀'이라고 하자.  

 

사람을 죽여서 경찰을 피해다니는 것으로 추측되는 남자는 저수지 위에 외따로이 떠 있는 노란색 부표(집)로 숨어들지만 사실 그 행위는 자기 징벌에 가깝다. 닻에 고정된 부표로 숨어든다는 사실은 " 살아가는 징역 " 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좌대는 완벽한 1인용 감옥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스스로 징역살이를 자처하는 꼴이다. 그는 몸속에 내재된 동물성을 거세하기 위해 입 속에 낚시바늘을 삼켜 스스로 " 입이 없는 것(식물성) " 이 된다. 이 행위는 일종의 성전환'이다.  어쩌면 여자 또한 그 옛날에 낚시 바늘을 삼켜서 입이 없는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상처 입은 < 입 > 은 무엇인가를 삼킬 때마다 "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 " 처럼 "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 그는 말을 잃어 풀이 된다. 

 

영화는 물 속에 내렸던 닻을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뿌리에서 떨어져나간 부표는 흘러간다.  자유에 대한 열망일까 ? 아니면 죽음에 대한 욕망일까 ? 뿌리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측면에서 그 행위는 자살에 가까운 상징적 몸짓이다. 페미니즘 평론가들은 낚시 바늘로 찌르고 칼로 도려내는 장면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이 상처가 아름답다. 말이 없는 여자가 떠나는 남자를 붙잡기 위해 자궁 속에 낚시 바늘을 넣어 줄을 당겨 외마디 비명을 질렀을 때, 나는 그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했다. 아파야지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이 불쾌한 소리는 사이렌이 감미롭게 부르는 노래는 아니지만 묘하게 나를 감동시켰다. 뼈아픈 통증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소리를 만들어서 떠나는 배를 붙잡는, 이 처연한 절규에 그 누가 돌을 던지랴.

 

이 세상 모든 꽃나무는 상처에서 꽃을 피운다. 꽃 진 자리'에서 다시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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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4-05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이런 표어를 봤습니다. '책은 문화의 뿌리이자 꽃이다.' 이 문장이 단기적 맥락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선호하는 장기적 맥락의 의미가 담긴 '책의 문화의 씨앗이자 열매이다.'로 바꿔 생각했습니다. 이로써 순환의 고리를 연결했죠.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5 14:33   좋아요 0 | URL
열매가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꽃 진 자리에 열매가 자라더군요.

곰곰손 2014-04-05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꽃진 자리에 열매가 자란다는 말 조타.
피운 꽃이 진다는건 정말 슬픈일일꺼야
근데 그자리에 열매가 맺인다면
또 그만한 구원이 없겠지..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6 08:31   좋아요 0 | URL
꽃 진 자리에 열매가 열리는 법이지.
상처에서 열매가 자라는 거 아니겠냐.

samadhi(眞我) 2014-04-07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낚싯줄 집어넣는 장면은 소름이 돋아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으..... 김기덕 영화는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이 제일 좋았어요. 그것도 사실은 무척 잔인하기도 했지만 정말 아름다웠죠. 영화가 끝나도 일어설 수 없었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02:51   좋아요 0 | URL
점 이 섬'이 제일 좋아요. 김기덕 영화는 후기작으로 갈쑤록 뭔가 좀 타협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쓸쓸하비다.
낚시줄 넣는 장면은 정말 끔찍하죠. 저도그 부분에서는 섬찟합니다.
이때 김기덕은 인간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순해진 거 같습다. 스티븐 킹 처럼 말이죠.
킹도 요즘 작품들은 말랑말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