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의외의 목록.
진돗개 암캐는 새끼를 낳는 순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덤빌 수 있는 " 영토권 " 이 생긴다. 다른 짐승이 일정한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암캐는 그 순간 진돗개 발령 1호'를 내리고는 경계 태세'를 강화한다.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사정없이 컹, 짖으며 물어버린다. 비록 그 침입자가 서열 1위인 우두머리 수캐'라고 해도 이 하극상 앞에서는 별다른 딴지를 걸지는 않는다. 서열은 낮지만 그 모성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 쫌 " 멋있는 사회'다. 이 경계 거리가 바로 동물의 < 영토권 > 이다. 개뿐만이 아니라 사슴이나 들소에게도 도주거리'라는 영토권이 있다. 사슴이나 들소는 초원에서 사자를 보았다고 해서 무조건 도망을 가지는 않는다. 사슴이나 들소는 어느 정도까지는 사자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다가 반경 ○○m 안으로 접근하면 그때 냅다 도망친다.
이 마지노선'을 도주거리'라고 한다. 이것도 일종의 영토권'이다. 그렇다면 개가 아닌 인간에게도 보이지 않는 영토권이 존재하는 것일까 ? 당연히 존재한다. 두 사람이 나누는 일상적 대화를 자세히 관찰하면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대화 도중 한쪽이 지나치게 접근한다 싶으면 다른 한쪽은 한발짝 물러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해서 < 공간 > 을 확보하려고 한다. 그러니깐 < 영토권 > 이란 최소한의 보호벽'인 셈이다. 그런데 이 사적 영역이 타인에 의해 침범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폭행이나 성추행 따위가 좋은 예이다. 성추행은 타인의 허락 없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토를 침범하는 행위'이다. 윤창중이 허락없이 인턴 여직원 엉덩이를 만지려고 한 행위는 그 인턴 여직원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공간인 영토권을 허락없이 무단으로 침입했기에 범죄가 된다.
폭행도 타인의 영토권을 침범해서 폭력을 가하는 행위'다. 만약에 허락없이 타인의 영토를 침범할 경우 법은 그에 따른 벌을 가하게 된다. 하지만 법률을 공부한 사람도 법이 보이지 않는 영토권'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도둑이 남의 집 담을 넘으면 주거 침입죄가 성립된다는 사실은 모두 다 알고 있지만 타인의 영토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에 대해 항의를 하면 " 프랜들리적 스킨십 " 이라는 변명을 하고는 한다. 문제는 친하게 지낼 생각이 전혀 없는 놈이 친한 척을 한다는 데 있다. 어, 이가 없지만 그게 현실이다. " 친하니깐 팔짱도 끼고, 손도 잡고, 어깨동무도 하는 거 아니것어, 이 친구야 ? " 이처럼 타인의 영토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심각성을 잘 모를 뿐더러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에 충실할 뿐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에티켓이 부족하다. 에드워드 홀의 문화인류학4부작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 숨겨진 차원 > 은 이 영토권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다. 네 권의 책은 쓰여진 연도가 제각각 다르지만 사실 한 권의 책이나 다름없다. < 침묵의 언어 > 는 자신이 앞으로 전개해 나갈 내용을 갈무리한 개론이다. 본격적인 내용 전개는 < 숨겨진 차원 > 과 < 생명의 춤 > 에서 다룬다.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비언어 의사 소통'으로 작용하는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꽤 흥미진진한 분석이 많다.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아닌가 싶다. 참고로 책값을 아끼고 싶다면 < 침묵의 언어 > 를 굳이 살 필요는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발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책이 생각보다 비싸니 참고하길 바란다.
이 시리즈를 읽다 보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품목 중에 '영토권'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영토권 매입은 말 그대로 땅을 사고 집을 사는 행위'이다. < 집 > 이야말로 눈에 보이는 주거 영토권'이다. " 컬러 오브 머니 " 에 따라 반경 너비가 결정된다. 원이 클수록 영토권 매입가는 비싸다. 부자는 강남에 모여 살지만 재벌은 성북동에 모여 산다. 그들은 넓은 정원과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집에 산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쪽방에서 산다. < 쪽방 > 이란 방을 쪼갠 주거 형태를 말하는 것이니 1/2 방'이다. 태어나면서 생래적으로 주어지는 권리인 영토권의 너비와 주거 영토권인 쪽방 크기'가 비슷하다는 것은 권력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권력자는 자신의 영토권을 확장하는 자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안전한 영토권을 갖기 위해 돈을 주고 공간'을 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은 사실 커피를 구매한 비용과 함께 한두 시간 공간을 빌린 대가에 대한 대여비'도 포함된다. 어쩌면 배보다 배꼽이 커서 공간 대여료가 메인이고 커피는 스끼다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공간을 파는 사람도 있을까 ? 공간을 사는 사람도 있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간을 파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 당연하다. 유훙업소나 성매매 종사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몸을 파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토권'을 손님에게 잠시 양도한다. 성매매 종사자들은 그 대가로 화대를 받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영토권 대여비'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매매 종사자는 노동자로써 권리를 가진다. 에드워드 홀이라면 매춘賣春'이라는 표현보다는 [ 傍 : 곁 방 ] 이라는 한자를 써서 賣傍'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
그런데 타인의 영토권을 취득하기 위한 영역을 확장하면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공간을 사기 위한 투자'는 꽤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연애의 본질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영토권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팔짱을 끼고, 허리를 감싸고, 나아가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 충족이야말로 연애의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데이트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영화 관람, 근사한 카페, 명풍 가방, 목걸이 선물, 여행 비용 따위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토권을 갖기 위한 투자'인 셈이다. 이러한 상품들은 일종의 영토권 상품'이다. 그 투자가 결실을 맺는 게 바로 결혼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합의 하에 서로의 영토권을 구매하는 행위'다. 어느 유명한 학자는 결혼이란 합법적 매춘'이라고 말했지만, 배운 만큼 배운 양반이 천박하게 합법적 매춘'이란 표현이 뭔가 !
좀 고상하게 결혼이란 합법적으로 곁을 획득하는 거래'라고 하면 안되나 ? 인간은 영토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 생래적으로 발생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토권과 눈에 보이는 영토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한다. 그리고 넓은 의미로 보자면 전쟁 또한 영토권 확장을 위한 야망이었다. 김신용 소설 < 달은 어디에 있나 > 는 春, 傍 차원을 떠나서 몸속 피'를 파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매혈기'이다. 성매매 종사자들이 팔게 없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토권인 < 곁 > 을 팔아 생활하는 존재라면 소설 속 앵벌이들은 팔 수 있는 영토권조차 없어서 < 피 > 를 판다. 강신주는 노숙자가 수치심이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은 틀렸다. 노숙자는 수치심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영토권이 없는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