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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어디에 있나 1
김신용 지음 / 천년의시작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내 친구는 아리랑치기범'이었다. 저녁에는 술을 마셨고, 밤에는 벽돌을 들었다. 주변엔 온통 앵벌이들뿐이었다. 러미날 먹고 환각 상태에서 지하철을 탔다.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며 바닥을 기어다니면 벌이가 쏠쏠했다. 누가 더 문어 연기를 잘하느냐에 따라서 그날 벌이'가 정해졌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문어 새끼'이라고 조롱하고는 했다. 러미날은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했다. 뼈가 녹았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경찰이 아니라 적십자 구호 단체'였다. 잡히면 그들은 다리를 자르거나 팔을 자르거나 했으니깐 말이다. 그래서 앵벌이들은 경찰보다 적십자를 무서워했다. 내가 아는 앵벌이'는 종종 말하고는 했다. " 형, 우리 행불되진 말자 ! " 그들은 거리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것을 행불이라고 했다. 행불이란 " 행방(행적)불분명 "의 약자였다. 거리에서 죽은 노숙자들은 대부분 행불 처리' 되었다. 경찰은 사건 기록지에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 대신 < 행불 > 이라고 적었다. 행불되지 말자고 말했던 그 친구는 동료 칼에 찔려 죽었고 그의 단짝 떠벌이 친구는 적십자에 끌려가서 다리가 잘렸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났다.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 다리 하나 없으니 장사가 더 잘 돼 !!! "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늙고 병든 창녀들이 모이고, 그 창녀의 아이들이 자라고, 러미널을 먹고 쓰러지고....... 김신용의 시'는 그런 양동의 풍경을 시로 썼다. 그것은 나만이 알 수 있는 사인'이었다. 우리는 남대문 지게꾼을 소금장수'라고 부르거나 밀가루 부대'라고 놀렸다. 한여름 땀을 흘리고 나면 등짝에는 땀이 마르고 난 허연 백태 같은 소금기'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소태를 보며 깨달았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 통증이다. 저기... 소금장수 지나간다.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409094 저기 소금 장수 지나간다 中
김신용 : 매혈은 해도 매문'은 하지 않겠다 !
내가 머문 곳은 후암동과 양동 사이'였다. 일종의 공동경비구역이요, 화개장터'였다. 한쪽은 시장이 있어 서민들이 바글바글거렸지만 바로 건너편은 창녀촌과 앵벌이와 돼지엄마들이 살았다. 당시 나는 " 퍼펙트 월드 " 라는 비디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다 쓰러져가는 4층짜리 건물을 소유한 여주인의 아들이 비디오방을 꾸려나갔다. 장사는 잘됐다. 비디오방 객실만 40개가 넘었으니 주위에서는 꽤 큰 규모였다. 주로 근처 학원에 다니는 재수생들과 고시생들이 단골이었다. 그리고 또 한 집단, 앵벌이'들이 일을 나가기 전에 찾는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들은 영화를 보면서 러미널이라는 감기약을 10~20 정도 삼켰다. 들어갈 때는 멀쩡했지만 나올 때는 문어처럼 흐느적흐느적거리기 일쑤였다. 러미널이라는 감기약을 다량 복용하면 환각 증세가 나타난다. 침을 흘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지를 못한다.
그들은 바로 그 상태에서 일터로 향한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가까스로 서울역 계단을 내려가거나 기어서 스며들어간다. 그러니깐 당신들이 손가락질하며 " 앉은뱅이 흉내 " 를 낸다는 지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제로 앵벌이들은 약 기운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니 말이다. 알약을 많이 삼킬수록 돈벌이는 좋았다. 사람들은 보다 더 끔찍한 빈곤에 동정을 보내니깐 말이다. 학처럼 고고하게 구걸을 하는 놈보다는 지렁이가 되어서 당신이 뱉은 바닥을 길 때 돈벌이가 좋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맨정신으로는 쪽팔리니깐 일하기 전에 알약을 먹는 것이다. ( 추측이 아니다. 왜 알약을 삼키냐는 내 질문에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우리들도 이런 짓 하는 거 쪽팔리다고, 그래서 약을 먹는다고..... ) 적어도 앉은뱅이 시늉을 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하지만 이 러미널은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과대 복용할 경우, 뼈가 녹아서 절단을 해야 만했다. 아이들이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경찰이 아니라 적십자'였다.
적십자에 끌려가면 뼈를 절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으니깐 말이다. 약을 과다 복용해서 위험한 순간이 오거든 적십자를 부르지 말고 그냥 경찰을 불러달라고, 그런 말을 한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양동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창녀의 아이들이었다. 벽돌로 취객의 머리를 내리쳐서 돈을 훔치는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그 행위를 " 아리랑치기 " 라고 했다. 지금은 잊었지만 양동의 아이들과 앵벌이들이 쓰는 말은 대부분이 은어'였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은어 중 하나는 " 행불 " 이었다. 아이들은 자주 우리 행불되지 말자, 행불되지 말자 를 말하고는 했다. 그것은 일종의 다짐이었다. 내가 웃으면서 행복과 불행을 줄여서 < 행불 > 이냐고 물었을 때 키 크고 눈 선한 녀석은 우스면서 " 행방불명 " 을 줄여서 행불'이라고 가르쳐주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죽으면 사망 처리가 되지만 앵벌이들은 죽으면 행불 처리'가 된다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던, 그 쓸쓸한 목소리를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 친구의 말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키 크고 눈 선했던 녀석은 동료 앵벌이와 싸우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 그 사실을 키 작고 명랑한 " 나불이 " 란 별명을 가진 친구가 알려주었다. 나불이가 말했다. " 그 새끼, 행불되었어.... " 내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무릎 아래 절단된 상태였다. 내가 그를 끌고 국밥집에 가서 설렁탕을 사주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묻자 나불이'는 신이 나서 나불대기 시작했다. 나는 잘려나간 나불이의 무릎 아래'를 보고 왜 그들이 적십자를 두려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적십자의 잘못이 아니다. 자르지 않으면 다리 전체를 잘라야 할 판이니 말이다. 김신용의 < 달은 어디에 있는가 > 를 읽다가 " 행불 " 이란 단어와 만났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고백록이란 생각이 들었다. ( 장정일과의 대화에서 김신용은 실제와 허구의 비율이 90 대 10'이라고 말한다. )
불현듯, 지난 일들이 생각났다. 소설가가 앵벌이처럼 바닥을 기어다니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은어였다. 소설 속에는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 은어들이 쏟아졌다. 그러니깐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김신용이 쓴 자전적 일기'였다. 서울역 양동 바닥에서 뒹굴던 창녀의 자식들과 앵벌이들이 사용하던 잊혀진 언어'를 다시 듣는 것은 끔찍했다. 장정일의 지적처럼 이 소설은 " 전무후무한 소설 " 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 장 쥬네 같은 작가'는 김신용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나는 김연수나 편혜영 같은 문장에 질려버렸다. 그들은 빈곤한 리얼리티를 감추기 위해서 화려한 수사로 문장을 써내려갔다. 그것은 붕어의 비린내를 감추기 위해서 독한 양념을 과다하게 넣은 붕어찜 요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연수의 글은 감성은 넘치는데 고통은 전무했고, 편혜영의 글은 기괴함은 넘치지만 정작 공포는 없었다.
편혜영이 쏟아내는 상징은 지나치게 문학적이어서 뻔뻔했다. < 재와 빨강 > 에서 보여준 그로테스크한 세상은 이미 모더니즘 소설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우려먹은 소재가 아니었던가 ? 그리고 공지영은 정의를 말하기 위해서 신파를 끌어들였고, 신경숙은 엄마를 이야기하면서 엄마라는 존재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빌어먹을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엄마가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엄마의 케어'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케어'다. 그것은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세상 탓하지 말고 내 탓을 하라는 혜민의 뻔뻔한 지적질과 다르지 않았다. 한국 현대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아버지 때문에 고통스럽고 불안하다며 징징거리는 서사'는 그 어떤 리얼리티'도 획득하지 못한 공염불처럼 보여서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헛헛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한다기보다는 그저 평론가의 입맛에 맞는 문장을 선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 달은 어디에 있는가 > 은 소비에트 문학의 주류였던 " 일인칭 수기 양식 " 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문학보다는 르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읽다 보면 도스토예프시키의 영향이 보인다. 또한 밑바닥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장 주네'가 읽힌다. 소설은 16살 소년이 쪼록 ( 매혈 ) 으로 시작해서 지게꾼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 소년원, 재활원, 갱생원, 교도소를 거치는 과정이 생생하다. 그는 자신이 체득한 고름으로 별다른 수사 없이 담담하게 고백한다. 기술보다는 기록에 충실한 문장이다. 메타 픽션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너무 고리타분한 리얼리즘 타령인가 ?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드는 의문은 이토록 훌륭한 소설이 왜 문단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었는가, 라는 생각이었다. 편혜영이나 천운영이 말하는 현대인의 불안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 문단'은 왜 정작 이 뛰어난 작품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가 말이다.
문단과 거리를 두면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경고일까 ? 문단 돌아가는 꼴을 보면 헛구역질이 나온다. 평론가의 주례사 비평이 홍수가 된 지는 이미 오래'이다. 특정 작품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하는 평론가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평론가가 멍석을 깔고 마음껏 놀 수 있는 지면은 몇몇 문예지가 전부인데 이 문예지를 끼고 도는 것이 대부분 대형 출판사들이니 자신이 팔고 있는 책이나 소설가에 대해 스크래치를 가하는 놈은 괘씸죄'가 적용되어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결국은 무쇠도 베던 날카롭던 칼은 무디어져서 종이 하나라도 벨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때 비로소 멍석은 열린다. 문예지에 돈줄을 대는 대형출판사가 밥줄로 평론가를 길들이는 방식이다. 그때부터 카랑카랑하던 평론가는 주례사 비평을 남발하기 시작한다. 형편없는 작품에 대해서 놀라서 다시 본다, 라는 쪽팔린 100자 평만 쏟아내면서 말이다.
평론가는 대형 출판사 꼬리를 물어야 떡고물이 생긴다. 그리고 뜨고 싶은 소설가나 시인'은 문예지 편집위원 꼬리를 물기 위해 달달한 문장을 선보인다. 소설 < 달은 어디에 있는가 > 는 철저하게 문단으로부터 소외된 작품이지만 이 작품을 잊으면 안 된다. 어쩌면 김신용이라는 작가는 후대에 가장 뛰어났던 작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플롯이 정교하지 못한가 ? 주제가 지나치게 반복적이어서 지루한가 ? 커다란 서사와 문장의 서술이 서로 엇박자를 내서 불협화음을 냈는가 ? 그따위 평론가 흉내는 집어쳐라. 김신용은 매혈을 해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배고픈 삶을 살았지만 적어도 매문을 해서 등 따스웁고 배부른 삶을 선택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