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븨에서 < 전국 시 낭송 대회 > 를 중계한 적이 있다. 채점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비장한 시에는 비장하게, 슬픈 시는 슬픈 목소리로 낭송을 해야 좋은 점수를 받는 듯했다. 명랑한 시를 방긋 웃으면서 낭송하다가는 심사위원으로부터 자세가 맹랑하다고 찍힐 수도 있는 노릇, 참가자 대부분은 비장하거나 슬프거나 격정적인 시를 들고 나왔다. 시 낭송 대회'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치 모놀로그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찌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지 시를 읽을 때는 항상 목욕재계하고 정갈한 마음 자세로 시를 읽어야 할 것만 같았다. " 방바닥에 뒹굴면서, 웃으면서, 코 파면서, 그러면서 시를 읽다가는 천벌을 받을 것이야............ " 그런데 정작 시인들은 자신이 쓴 시처럼 정갈한 마음 자세로 살아갈까 ? 나는 몇몇 시인과의 불화'를 겪으면서 평소 가지고 있던 시인에 대한 환상은 지나가는 민들레 홀씨'에게 줬다.
간사한 놈도 있고, 치사한 놈도 있고, 좋은 놈도 있고, 나쁜 놈도 있다. 하지만 나쁜 시'는 없다. 시 같지도 않은 시시한 시'가 있을 뿐이다. 한때 나는 전국 시 낭송 대회에 참가한 시 낭송가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시를 접해서 화장실에서는 시집을 읽지 않았다. 이유는 똥 싸면서 시를 읽는 것은 새벽에 잠 깨어 시를 쓰는 시인의 정갈한 마음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소설가나 시인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1%도 없다. 문학인이 부리는 주사'는 재미있는 일화'로 미화되고는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꼴불견이다. 술 먹고 주접떨 때마다 대접받는 업종이 문학판이다. 문단 돌아가는 꼴을 보면 세상 돌아가는 꼴이 다 거기서 거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문단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문학평론가는 인맥과 학맥으로 연결된 사회'다.
스승과 선배 말에 토 다는 순간 낙장불입'이다. 그것은 배신, 배반, 배반형, TO부정사'다. 내,내내내내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야, 라는 정신이 문단 사회에도 퍼져 있다. 요즘 잘 나가는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인들도 대부분 아부와 줄 대기의 결과이다. 문학평론가가 비평은 하지 않고 출판사 광고 카피 문구를 잘 뽑을수록 승승장구하고, 소설가는 독자에게는 관심 없고 오로지 평론가들이 좋아할 문장들만 선보인다. 어차피 책 팔아서 먹고 살 가능성은 없으니 평론가들 입맛에 맞는 떡밥을 줘서 명예나 얻자는 심산이다. 어쩌면 한국 소설가 중에 가장 위대한 작가였을지도 모르는 손창섭이 문단과 거리를 둔 채 일본으로 떠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백민석이 절필을 선언한 이유도 알 것 같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일이지만
젊은 평론가 이명원이 김윤식 평론가의 표절을 지적했다가 받게 된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코미디'에 가깝다. 제자들이 스승을 스승이 아닌 우상으로 섬기며 과잉 충성을 할 때 벌어지는 비극이 바로 그 유명한 < 이명원 사태 > 다. 그 논란의 중심'에 섰던 논문이 포함된 평론집 < 타는 혀 > 가 다시 새롭게 나왔다. 반갑다. 그동안 이명원의 글은 틈틈이 읽었는데 막상 논란에 되었던 글은 읽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 타는 혀 > 가 다시 출간되었다. 한국 사회'가 개떡이 된 이유는 " 아버지 숭배 "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 아버지 > 란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남근(팔루스)'이 되겠고,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자면 낡은 것'이 되겠다. 그리고 서울대 공화국인 코리아 식으로 말하자면 <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 와 <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가는 요상한 스승'> 으로 번역할 수도 있겠다.
아버지 숭배란 남근 선망과 꼰대의 권력에 기대는 것이다. 그리고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하는 행위이거나 스승의 은혜가 하늘 같아서 " 아아, 아아아 고마워라 ! " 라는 장탄식을 하는 풍경이리라. 스승도 노동자이니 이미 노동절에서 감사의 뜻을 전하는 마당에 굳이 스승만 떼어 내는 속내는 무엇일까 ? 스승의 은혜가 하늘이라면 신과 동격이라는 소리인데 그 정도 신격화면 스승이 아니라 요승'이다. 나는 당최 한국인이 왜 스승과 언니께 그리 쩔쩔매며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장유유서'에 기댄 권위에의 자발적 복종'은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공익을 위한 내부 고발을 한 공익제보자는 이상한 방식으로 배신자라는 감투를 쓰고 처형된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인물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해서 질질 짰던 한심한 홍길동이 아니다.
브라더후드'로 강하게 연결된 파파 보이'는 꺼져도 좋다. 홍길동은 왜 그토록 아버지와 형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똥줄이 탔을까 ? 한국 사회가 개판이 된 이유는 아버지 세대와의 단절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력에 대한 너그러운 용서가 결국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새로운 것은 낡은 것 때문에 고통받는다. 젊은 평론가 이명원이 아버지 김윤식의 표절을 지적했을 때 문단 사회가 이명원에게 가했던 폭력은 이승만 친일파 세력을 보호하려고 했던 아들 박정희 세력을 닮았다. 헤밍웨이는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버지 세대를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역모가 아니라 창조를 위한 시작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도그마 95 선언'에서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사망 선고를 내린 후 새로운 황금기를 구축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누군가는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이성복 시, ‘그해 가을’ 부분 ) 라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 이명원의 지적에 대해 서울대 제자들이 어린 새끼가 건방지게 까분다며 윽박지르는 태도 자체가 건방진 태도'다. 하여튼, 나는 요즘 화장실에서도 시집을 잘 읽는다. 문단에서 호들갑스럽게 좋다고 하는 시집은 대부분 건성건성 읽는다. 읽을 게 별로 없다. 오히려 문단에서 언급을 해주지 않는 시집이 훨씬 좋다. 좋은 소설과 좋은 시를 모독하는 것은 나 같은 무지렁이 독자가 아니라 문단 카르텔이다. 문단의 짜고 치는 고스톱에, 아... 질렸다. < 타는 혀 > 반갑다, 하여튼,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