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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웃지 않으면 비극이 된다.
니체는 이런 소리를 했다. " 세상에서 인간보다 가장 큰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웃음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다. " 이 말은 곧 웃음'은 불행과 연관이 깊다는 소리'이다. 자주 웃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일 경우가 높다.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은 웃지 않는다. 왜냐하면 웃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월리엄 맥두걸의 말이다. 사실 < 웃음 > 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메커니즘'을 살짝 뒤집는다. 기대에 충족시킬 때는 < 감탄 > 이 되고, 기대 이상일 때에는 < 경탄 > 이 되지만, 기대에 못 미칠 때 < 웃음 > 이 나온다. 그러므로 웃음이란 기본적으로 실패의 결과이다. 오늘따라 이 말들이 나를 위로한다.
- 말하기의 다른 방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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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 > 이라는 속성'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예민한 구석이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양반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위해서 농담을 던졌을 때, 비록 그 농담이 철 지난 장소팔-고춘자 만담'처럼 느껴지더라도 일부러 웃는 척을 하는 행위는 기만이라기보다는 예(禮)에 속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대를 울려 웃음을 만든다고 해서 딱히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오히려 농담이 재미없다고 해서 정색을 하며 무표정하게 상대를 바라보는 행위야말로 솔직한 태도라기보다는 무례(無禮 )에 가깝다. 그런데 예의를 차린답시고 너무 크게 웃어버리면 실례 ( 失禮 ) 가 된다. < 후후후 > 와 < 아햏햏 > 은 한 끗 차이'이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의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 웃음 > 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지위, 웃음의 강약, 발화의 장소에 따라 복잡하게 변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재미없는 농담에 대한 무표정은 " 솔직한 태도 " 에 가깝지만 역설적이게도 < 무례 > 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재미없는 농담에 대한 적당한 웃음'은 " 거짓 " 이라는 형태를 취하지만 반대로 타자를 배려하려는 < 예 > 가 될 수도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웃음이 지나치면 < 실례 > 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예(禮)를 놓쳐버린 꼴(失) 이다. 좋게 말하면 < 웃음 > 이라는 녀석은 성격이 예민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변덕이 죽 끓듯 해서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지 모르는 놈이다.
밀란 쿤데라의 < 농담 > 은 " ...... " 이라고 해야 하는 사회에서 " 아햏햏 " 이라고 웃어서 인생 좆된 케이스'이다. 루드빅은 평소 관심이 있던 마르게타에게 추파를 던진다. "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 " 평소 무뚝뚝한 성격인 마르게타'에게 농담 한 마디 한 것뿐인데 그는 이 농담 때문에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중년이 되어서야 풀려나온다. 내가 만약에 소설 속 주인공인 루드빅'이었다면 " 낙관주의는 인류의.... " 따위의 문장을 작성하기보다는 차라리 " 내 마음을 몰라주는 마르게타 때문에 내 마음도 마르겠다 ! 아햏햏. " 이라고 써서 엽서를 보냈을 것이다. 루드빅은, 유머감각이 부족한 것이다 !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머 감각이 쩔다와 구리다의 차이'가 아니다.
농담에 대해 웃지 않는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농담에 대해서 정색하는 사회'는 병색이 완연한 사회이다. 루드빅이 "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 "이라고 실없이 말했다면, < 장미의 이름 > 에 나오는 호르헤 수도사는 " 웃음은 인류의 아편 " 이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 희극론 >에 독을 묻혀서 그 책에 읽는 이'를 독살한 것이다. 종교'란 기본적으로 신과 율법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강할수록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호르헤 수도사'는 웃음이 종교적 힘'을 약화시키는, 근엄에 똥침을 날리는 손가락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호르헤 수도사'는 너무 웃지 않아서 미친 것이다.
< 농담 > 의 배경이 되는 경직된 사회와 < 장미의 이름 > 에 등장하는 호르헤 수도사'는 웃음을 부정적 기운으로 간주했지만 아시다시피 웃음'이란 生의 활력소'다. 그렇다고 해서 웃음을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웃음'이란 부족해도 문제가 되지만 넘쳐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웃음이 지나치면 쾌락주의'에 빠지기 쉽다. 가장 좋은 웃음은 < ...... > 와 < 아햏햏햏 > 사이에 놓인 웃음일 것이다. 웃음이 가지고 있는 기능 가운데 중요한 것은 바로 공감'이다. 좀더 유식하게 말하자면 저자와 독자 간의 상호 교류'이다. 독자가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의사 표시이며 지지'이다.
웃음도 마찬가지다. 웃음은 농담을 하는 사람에 대한 작은 동의이며 손해 볼 것 없는 지지'이다. 그러므로 책에 밑줄 긋는 연필과 조용한 웃음은 동의어'다. 오래전, 호르헤 수도사'처럼 웃지 않는 친구를 둔 적이 있었다. 시립 도서관에서 오고가다 만난 사이였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주머니에 칼을 숨기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사람들이 주머니에 칼을 숨기고서는 호시탐탐 자신을 찌를 궁리만 한다고 생각했다. 불안한 마음과 초조한 눈빛은 항상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그는 날마다 마르는 고사목 같았다. 내가 웃음이 없던 그를 끌고 간 곳은 수요일이면 영화를 상영해주던 도서관 시청각실'이었다. 상영 영화는 < 라임라이트 > 였다.
채플린 영화가 그를 웃게 만들 거란 막연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 상영 내내 웃지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웃지 않았다. 웃기는커녕 펑펑 울었다. 분장을 지운 광대의 얼굴만큼 슬픈 얼굴'이 또 있을까 ? 찰리 채플린'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분장을 지울 때,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 절뚝거리며 마임을 선보일 때, 무성영화 배우가 토키 영화'에 나와 말을 걸 때, 노인이 된 버스터 키튼의 둥근 어깨를 보았을 때, 그럴 때마다...... 슬펐다. 채플린은 독백처럼 말한다. " 웃지 않으면 비극이 되지...... " 이 대사가 왜 그렇게 내 심장을 찔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광대'에게 있어서 " 비극 " 이란 관객이 웃지 않을 때이니,
저 대사'는 잊혀져간 늙은 광대의 고해성사 같아서 슬펐다.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이 칼을 주머니에 숨기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내게 물었다. " 코미디 영화인데 왜 울어요 ? " 곰곰 생각했으나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어서 그 친구에게 되물었다. " 코미디 영화인데 너는 왜 웃지 않니 ? " 그친구도 곰곰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 영화는 재미있었어요 ! 다만 웃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웃은 지 꽤 오래되어서 그 느낌 자체를 잃어버렸어요. " 웃음을 잃어버리면 쉽게 절망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슬픔을 버리면 쉽게 웃을 수 있지만 웃음은 한 번 잃어버린 웃음을 다시 찾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떤 사람은 웃음이 없는 세월을 버티지만 누군가는 버티지 못하고 낙엽처럼 떨어진다.
채플린이 말한 극중 대사'처럼 인생이란 웃지 않으면 비극이 된다. < 농담 > 을 읽다가 문득 웃지 않아서 웃음을 잃어버렸다던 친구가 생각났다. 그는 다시 웃음을 찾았을까 ? 아니면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까 ? 소식이 끊긴 지 꽤 오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