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과 무속 :
- 무당과 고양이'에 대한 단상
여배우'라는 낱말은 있지만 남배우'라는 낱말은 없다. 라캉을 거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무의식은 언어로써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개같은 남성 꼰대가 지배한 대한민국.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전을 뒤져보다가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 남배우 > 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것이다 ! 요즘 잘나가는 류근 시인의 취한 입말'을 빌리자면 " 시바, 조낸...... " 당황스럽다. 나는 지금까지 남자 배우'라는 조합을 본 적은 있으나 " 남배우 " 라는 낱말을 본 적은 없다. 아니나 다르랴 ! 사전은 대부분 그 단어에 대한 활용 예문이 있기 마련인데 < 남배우 > 라는 단어를 사용한 예문은 아예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단어를 사용한 작가는 대한민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관료적 우격다짐'이 읽힌다. 그런 식이라면
여의사'란 단어가 있으니 남의사'란 낱말도 있어야 하고, 여형사가 있으니 남형사도 있어야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그렇다고 <남행 열차> 라는 말도 있으니 <여행 열차> 라는 조합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사전에는 여의사나 여형사라는 단어는 있으나 남의사나 남형사'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 남배우 > 라는 단어는 예외 조항을 두었을까 ? (언어학자 마리나 야겔로는 < 언어와 여성 > 에서 " 여성의 조건에 대한 사회 언어학적 접근 " 을 시도한다. 생각보다 재미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일단 오해는 하지 말자. 한글이 남성 중심 사고 체계를 갖춘 문자'라기보다는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독립을 확립하고 밖으로는 민주 번영에 이바지해야 할 후손들이 한국어'라는 언어를 잘못 사용한 예'라 할 수 있다.
만약에 당신이 " < 여의사 > 라는 단어는 있는데 왜 사전에 < 남의사 > 라는 단어는 없나요. 남성을 무시하나요 ?" 라고 당당하게 묻는다면 나는 답답하다. 중요한 것은 남배우, 남의사, 남형사'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록되어야 남녀 차별 없는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배우, 여의사, 여형사'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록된 것이 남근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여성 차별을 생산하는 단어'가 사전에 등록된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한다. 굳이 사용해야 한다면 여자 배우, 여자 의사, 여자 형사따위로 단어를 나열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 남자 새끼'가 < 남의사 > 따위를 가지고 화딱지를 내고 그러냐, 웬 오지랖이냐 ? "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병헌처럼 중후한 미(mi)음으로 이렇게 말하겠다. " 남.이.사 ! "
반면 < 무당 > 이라는 단어는 배우, 의사, 형사'라는 낱말과는 성격이 정반대'이다. 보통 남자 의사'를 성별 구분 없이 보통 의사'라고 지시하듯이 여자 무당 또한 성별 구별 없이 무당'이라고 지시한다. 만약에 당신이 무당을 여자 무당'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무속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무당(巫堂) 에서 무(巫)는 이미 여자 무당'을 의미한다. 그러니깐 " 여자 무당 " 이라는 말은 불필요한 중복이라는 말이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이라는 고사성어'가 말해주듯이 구름 운(雲)과 비 우(雨) 가 주로 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쓰이는 것처럼, 무산지우 巫山之雨 나 무산지운 巫山之雲 이라는 고사성어도 모두 남녀 간 성적인 교합을 의미한다. 여기서 < 巫 > 는 여성을 의미하고 < 山 > 은 남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남자 무당'은 무엇이라고 부를까 ? 박수무당'이다. 남자 무당을 무당'이라 하지 않고 굳이 박수무당이라고 지시하는 것은 결국 쪽수의 문제'이다. " 팔 할 대 이 할 " 의 구조가 차이와 차별을 만드는 것이다. 이 할'에 소속된다는 것은 곧 단어 앞에 잰더를 등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라는 직업군에서 여성의 비율이 이 할'에 소속되기에 여의사'라는 단어가 탄생되는 것이고, 무속에서 남성의 비율이 이 할'에 소속되니 박수무당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무속은 남근 중심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여성 중심적 판타지아'를 구축한 세계'이다. 우리는 흔히 무당이나 무속을 불가촉 세계라 하여 두려워하지만 사실 굿은 신명 나는 구경거리'이다. 희노애락이 담긴 한풀이'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속의 풍경'은 곱고 예쁘고, 슬프다. 굿은 good'이다.
굿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황홀경이다. 나는 점쟁이가 하는 말을 신뢰하지 않지만 무당이 하는 말은 신뢰한다. 무 巫 ( 무당 ) 과 복卜 ( 점쟁이 ) 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巫 란 과거와 현재를 화해시켜서 병을 < 치유 > 하는 것에 방점을 찍는 행위이고, 卜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 확률 > 에 방점을 찍는 행위'이다. 전자는 힐링'이고 후자는 예보'다. 그렇기 때문에 巫 라는 한자는 여자 무당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의사' 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샤먼'이 주술과 의술을 겸했던 것과 같다. 내가 무당의 존재를 믿기 시작한 이유는 개인적 체험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 놀라운 티븨, 서프라이즈 > 따위에서 선보이는 언빌리버블한 허구'가 아니다. 실제 경험'이다. 군산에 있을 때 바(BAR)에서 일하는 여성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처음 본 나를 보자마자 생일 파티를 같이 하자고 했다. 내 생일과 자기 생일이 같다는 주장이었다. 나와 함께 동행한 무리들은 모두 낄낄거리며 웃었다. 타관에서 서로 생일이 똑같은 사람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 더군다나 낯선 이의 생일을 맞출 확률은 ? 우리가 낄낄거리며 웃자 바텐더는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내게 보여줬다. 나와 같은 달, 같은 날이었다. 그 인연으로 알게 된 사이'였다. 그녀는 내게 같은 끈으로 연결되었다는 말을 자주 하고는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지만 가슴 한편에는 어떤 불안감이 존재했다. 특이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서는 제사 때 피우는 향 냄새'가 진하게 나서 내 머리가 다 아플 정도였다. 나는 젊고 매력적인 아가씨에게 차마 향촉 냄새가 나서 머리가 아프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 늘 이상하게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 이 자리에서 사적인 얘기를 구구절절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기에 간략하게 결말을 말한다면 그녀는 신내림을 받았다.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감쪽같이 사라진 지 8개월이 지난 후였다. 군산을 떠나던 날, 간신히 연락이 되어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병색이 완연했다. 곱고 매력적이던 여자는 여전히 곱고 매력적이었으나, 뭔가 더 어둡고 깊었다. 우리는 술집에서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신내림을 받은 그녀는 그동안 벌어진 일에 대하여 내게 말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고백은 눈물이 반이었고 희망도 반이었다. 그녀의 슬픈 가족사에 나는 몸이 떨렸다. 늦가을이 오면 가끔 그녀 생각이 난다. 말장난 같지만 < 무속 > 의 반대말은 < 소속 > 이다. 소속은 한자로 곳 소(所) 에, 무리 속(屬)'으로 이루어졌으니 뜻은 일정한 단체나 기관과 같은 무리 속'을 뜻한다.
내가 무속을 소속이라는 단어의 반대 개념으로 보는 이유는 무당'은 생래적으로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다. 콜린 윌슨이 내린 아웃사이더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그들은 " 너무 깊게 너무 넓게, 그리고 너무 멀리 본다. " 소속이 울타리 < 안의 거처 > 라면 무속은 울타리 < 밖에 존재하는 > 영역이다. 위에서 말한 무당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무속은 가부장 중심 집단에서 벗어난 경계 밖 소수자의 처소'이다. 그것은 남성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은 독립적 세계이다. 종종 길고양이'를 보게 되면 신내림을 받은, 깊고 어두웠던 낯빛을 한, 군산 여자가 생각난다. 경계 밖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한 무당처럼 사람의 손길에 길들여지지 않은 길고양이들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산다. 인-사이드'에서 아웃-사이드'처럼 살아가는 길고양이의 생은 소속이 아닌 무속의 삶이다. 점점 그들이 좋아진다. 무당과 길고양이는 닮은 구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