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클볼 : 강타자일수록 느리게 던져라.
나는 또래 아이들처럼 < 무협만화 > 나 < 학원 폭력 만화 > 를 즐겨 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년이 < 순정 만화 > 에 빠져서, 비로소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제2의 빌리 엘리어트 성장 스토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내가 주로 본 만화는 < 스포츠 만화 > 였다. 그 중에서도 야구 만화'가 대부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가 야구'였기에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는 넘쳤고, 만화방에 가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이 바로 야구 만화'였다. < 백마 > 보다는 < 당나귀 > 를 좋아하는 특유의 b급 정서를 가진 나는 이현세의 " 까치 " 보다는 이상무의 " 독고 탁 " 을 좋아했다.
차 氏 성'이 < 축구 > 와 가장 잘 어울리는 성'이라면, < 야구 > 라는 스포츠와 궁합이 잘 맞는 성은 < 독고 > 요, 이름은 < 탁 > 이다. 이현세 만화에서 까칠한 나쁜 남자를 전담한 마동탁'도 어찌 보면 독고탁에 대한 오마쥬일 것이다. 차범근 선수가 독고 성으로 태어났다면 어찌 되었을까 ? 독고 범근'이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또한 차 탁'은 어떤가 ? 몽골 흉노족'이었던 < 독고 > 성은 대한민국 야구 주인공으로 빛을 발한다. 독고 성'을 가진 사람을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내 조상 또한 그 유명항 오랑캐였으니 말이다. < ○ 다구' >라는 이름을 가진 내 선조'는 고려 땅에서 별별 별짓을 다한 모양이더라. 이 자리를 빌어 달달한 사과의 씨를 전한다.
당시 이상무,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등 쟁쟁한 만화가들이 야구 만화'를 쏟아냈지만 내용은 대부분 대동소이'했다. 야구 변방에 있던 주인공들은 절치부심하여 재기에 성공한다는 스토리'다. 그것은 마치 무림고수의 지도 아래 10년 무술을 연마하고 하산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 오늘, 부로...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구나. 하산하거라 ! " 이 악물고 버틴 10년. 바늘 침대에서 잠을 자고, 곰 쓸개를 씹어 먹고, 섹스 없이 보낸 10년 ! 누더기 옷을 입었으나 눈빛은 보석처럼 빛나리라. 바로 그들이 던지는 공이 바로 < 마구 > 다. 지그재그 공이다.
사실 모든 공은 궤도'에 따라 움직인다. 내가 즐겨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 이다. < 직구' > 는 곡선보다는 직선에 가까운 라인으로 날아오고, < 커브 > 는 직구 궤도인 직선으로 날아오다가 타자 앞에서 아래로 뚝 떨어진다. 반면 < 슬라이더 > 는 커브와 성격이 거의 비슷하지만 상하 곡선'보다는 좌우 곡선에 방점을 찍는다. 모든 공은 스타일은 다르지만 일정한 궤도를 갖는다. 평균 구속이 150이라고 했을 때 공이 투수 글러브에서 포수 글러브에 박히는 시간은 대략 0.44초'이다. 1초가 되지 않는다. 1/2초에도 못 미친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찰나'다. 그렇다면 여기서 끝이냐 ? 아니다 !
공이 0.37초'가 지났을 때 방망이를 휘두르면 공은 이미 포수 글러브에 박혔는데 뒤늦게 방망이'를 휘두르는 꼴이 된다. 날아오는 공을 방망이에 맞히려면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대략 0.2초 지났을 때 미리 휘둘러야 한다. 타격'이란 결국 예측'이다. 문제는 타자가 방망이를 휘둘러야 하는 0.2초의 궤도'가 모두 직구 궤도와 똑같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타자는 직구처럼 보이지만 커브이거나 슬라이더인 공을 골라야 한다. 그렇다고 직구만 노리고 칠 수는 없다. 좋은 타자는 직구도 치고, 커브도 받아치고, 슬라이더인 공도 때린다. 이처럼 타자는 투수가 던지는 경우의 수를 예측해야 한다. 머리가 똑똑해야 한다는 소리'이다. 팔씨름 장사는 아이큐'보다는 힘'이지만, 훌륭한 타자는 반드시 머리가 똑똑해야 한다. 힘보다는 머리'다. 야구란 결국 심리전'이다. 상대방 수를 잘 읽는 놈이 이긴다.
지금까지는 야구 원론에 대한 간단한 소개였다면 이제부터는 전설의 마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무시무시한 마구 말이다. 나는 마구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공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마구'가 < 너클볼 > 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보스톤 레드삭스의 팀 웨이크필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가 던진 공은 만화 속에서만 보았던 마구'였다. 운이 좋을 때는 공이 일정한 궤도를 무시한 채 지그재그로 들어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태어나서 이토록 후진 투구 폼은 처음 보았다. 바지에 똥 싼 폼이라고나 할까 ? 더군다나 공 스피드는 80마일은커녕 70마일'도 나오지 않았다. 동전 넣으면 기계가 공을 뿌려대는 그 속도보다 느렸다.
아, 아아아... 니미럴,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마구의 정체였던가 ! 최소한 90마일(140km)는 던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 메이저리그'에서 100이 가까스로 넘는 느린 볼이라니 ! 하지만 메이져리그 강타자들은 이 느린 공에 속수무책으로 헛 스윙을 남발했다. 시속 160짜리 공도 잘도 때리던 인간들이 100짜리 공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이었다. 비결은 공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점이다. 타자도 모르고 투수도 모른다. 심지어 포수도 어느 쪽으로 공이 날아올지를 몰라서 공을 놓친다. 무회전으로 들어오는 공은 타자 앞에서 아무 방향으로 틀어진다. 윗쪽, 아래쪽, 오른쪽, 왼쪽....
너클볼은 투수가 던지고 나면 나머지는 운명에 맡겨야 한다. 다른 투수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공을 넣을 수 있지만 너클볼러'는 투수의 손을 떠나면 나머지는 신의 몫'이다. 그날의 바람과 그날의 기류'가 그날의 경기를 좌우한다. 이토록 느리고 촌스러운 공이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팀 웨이크필드를 응원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보스톤 레드삭스 팀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스티븐 킹과 함께 말이다. 웨이크필드'는 원래 타자였다. 실력이 형편 없는 타자였다. 마이너리그에서도 별 볼 일 없는 타자였다. 대륙을 전전하면서 얻은 것이라고는 늙은 나이'가 전부였다. 그에게 희망은 없었다. 하지만 기회가 찾아왔다. 너클볼'이었다.
하지만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 세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것이 바로 너클볼러'이다. ( 젊은 투수들은 너클볼을 배우지 않는다. 느린 공을 던진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 투구 폼도 엉성하니 성에 차지 않을 뿐더라, 원하는 대로 공을 넣을 수 없다는 면에서 선수들은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를 조롱하고는 했다. ) 신은 팀 웨이크필드'를 선택했다. 너클볼은 어깨에 손목에 무리한 힘을 주지 않기에 나이가 들었거나 신체적으로 불리한 투수가 사용하기에 좋은 구질이었다. 체력 소모가 적다보니 끈질기게 살아남을 놈은 바퀴벌레와 팀 웨이크필드'라는 우스개가 떠돌기도 했다. 그는 마흔이 넘는 나이로 통산 200승을 올렸다. ( 맙소사 ! 마흔이 넘은 투수라니... )
지금은 디키'라는 선수가 이 구질을 전수받았다. 그는 2012년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그 또한 마이너리그로 대륙을 전전하다가 선수치고는 늙은 나이에 너클볼을 던졌다. 젊은 놈들이 160짜리 광속구를 던질 때 너클볼러들은 우스꽝스러운 폼으로 느린 공을 던진다. 너무 느려서 공이 포수 글러브에 박힐 동안 방망이를 세 번은 휘두르고도 남을 만큼 느린 공이다. 이처럼 < 너클볼 > 은 신이 승자독식 사회에서 패자'가 되어버린 퇴물에게 다시 한 번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선물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너클볼을 사용하는 투수는 없다. 간혹 10 : 0으로 경기를 이기고 있을 때 투수가 호기심으로 하나 던지는 게 고작이다. 싹쓸이 사회인 대한민국이 정작 필요로 하는 공이 바로 너클볼'인데 말이다.
300승을 거든 너클볼러 필 니크로와 찰리 허프'는 퇴물이 되어버린, 절망에 빠진 후배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노하우를 전수했다. 너클볼은 승자가 승자에게 전수하는 비술이 아니라 패자가 패자에게 전수하는 비법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돈 거래는 없다. 말 그대로 전수'다. 구단이 선수를 사고 팔아서 남은 몸값으로 재산을 불리고, 선수 또한 팀보다는 오로지 돈을 많이 주는 구단으로 옮기는 세태를 감안하면 너클볼러들의 비법전수는 감동적이다. 조건 없는 가르침이다. 팀 웨이크필드'가 은퇴를 선언했을 때,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지만 실망도 잠시 ! 선배 너클볼러'들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디키는 그해 2012년 사이영 상을 수상했다. 투수로써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다.
내가 너클볼러였다면 수능에 실패한 청소년, 연애를 단 한 번도 못한 청년, 전립선 기능 저하로 고생하는 중년, 쪽방에서 달방으로 전전하는 하층민을 모아놓고 너클볼을 가르치겠다. 빠른 공은 아무나 던질 수 없다. 하지만 느린 공은 아무나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배울 수 없다. 성공한 너클볼러가 극히 드문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너클볼의 매력이다. 회전 없이 날아온 공은 기류에 따라 흔들리며 방향이 결정된다. 당신은 열심히 공을 던져라. 공의 포지션은 신이 선택한다. 그 선택에 대해서 일말의 후회는 하지 말자. 그것이 볼이 되었든 스트라이크가 되었든 말이다. 볼이 많으면 경기에서 지고 스트라이크가 많으면 경기에서 이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실패와 성공은 투수의 손을 떠난 공과 같다. 포지션'을 선택하는 것은 신의 몫이다. 그것이 실패이든 성공이든, 어쩔 수 없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기류를 잘못 만난 탓이다.
야구에 대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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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blog.aladin.co.kr/749915104/6387416 : 쇼생크 탈출 / 쇼생크와 야구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250473 : 야구란 무엇인가 / 멜로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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