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글 모음

 

 

 

 

■ 봄날은 간다. 2012/05/01.

 

봄날이다. ,  숭숭하다. 벚꽃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봄볕 때문이리라.  말랑말랑한 날것의 향에 취한 까닭이다. 문득 오래 전 풍경이 하나 떠올랐다. 그날도 봄날이었다. 광명 시장 근처 식당이었다. 맛은 있지만 복작거리는 식당보다 맛은 없지만 한가한 식당을 선호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허름한 삽겹살 식당으로 자리를 잡았다이때 한 남자가 들어왔다.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는 시각장애인용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더듬거리는 모양새로 보아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 같았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삼겹살 2인분을 시켰다. 식당에서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식사를 하는 시각장애인을 본 적은 있으나 이렇게 혼자 식당을 찾는 사람은 처음 본지라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함께 한 동행자가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자서 식당을 찾은 것이다. 불판이 올려지고, 상추 그릇이 나오고, 양념장과 마늘, 고추, 겉저리 등 밑반찬들이 차례로 상 위에 차려졌다. 도대체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쌈을 싸 먹을 수 있을까 ? 고기를 집다가 손을 데이면 어떡하지 ? 내 신경은 온통 그 사람에게 쏠렸다. 불판 위에 고기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남자는 고기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코를 벌름거리면서 말이다. 이때 식당 주인이 와서 손님의 손을 잡고는 테이블에 놓인 그릇의 위치를 일일이 가르쳐주었다. 여긴 상추 그릇, 상추 그릇 다음엔 파무침, 파무침 그릇 다음엔 양념장, 양념장 아래엔 겉절이, 겉절이 옆 그릇은 마늘, 마늘 옆에 싱싱한 고추, 고추 옆엔 공기밥이지만 공기는 없어요. 호호호. 그리고 그 옆엔 김치와 된장 찌개가 있답니다. 이제 곧 고기가 다 익어가니 드셔도 좋아요 ! ( 고기는 여주인이 잘랐다. ) 남자는 조심스럽게 손을 더듬거리며

 

1. 상추 그릇을 찾았다. 그는 상추 한 잎을 손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2.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집어 달구워진불판 모퉁이에 나란히 놓인 고기를 올렸다.

3. 젓가락을 놓더니 숟가락을 집었다.

4. 밥도 조금 올렸다. 다시

4-1. 숟가락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집었다. 손은 다시 테이블을 더듬거리며

5. 마늘과 양념장을 찾았다. 쌈을 싸는 데에만 5분은 족히 걸린 것 같았다.

 

보는 내내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일을 혼자 해냈다.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가 드디어 쌈을 입에 넣었다. ,  있군요 ! 그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아마도 식당 주인에게 하는 말 같았다. 여자는 방긋 웃었다. 그렇게 그는 혼자서 오랫동안 쌈을 싸 먹었다. 나는 행여 그릇을 엎어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하는 남자의 겸손함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그렇게 혼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는 쌈을 싸서 먹을 때마다 웃었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는 그릇에 담긴 모든 음식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며 정산 테이블로 가 계산을 치르고는 여 주인에게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오늘... 고기 맛이 일품이군요. 겉절이도 짜지도 않고 달지도 않고 맛있습니다. 공기밥엔 공기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그럭저럭 좋았습니다. 된장 찌개도 맛있어요. 모시조개를 넣으셨나요 ? 모시조개와 청양고추가 들어가니 시원하고 칼칼한 맛이 좋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사내가 나가자,  나는 급히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주인은 말했다.  " 같은 건물 4층에서 일하는 안마사’예요. "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이곳에 들려서 혼자 고기를 드시고는 합니다. 네에 ? , 가족 없이 혼자 사시나 봐요. 단골이세요. 호호. 남의 시선을 가장 많이 의식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 바로 장님이에요. 앞을 못 보는 사람은 늘 단정하게 옷을 입지요. 제 주위에도 그런 분이 계시는데 사는 집이 무척 깨끗하더군요. “ 곰곰 생각하니 주인이 하는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내가 본 것은 어떤 숭고한 < 몰입 > 이었다. 그는 오직 맛을 느끼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감각을 쏟은 것이다. 고기가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소리를 감지하고, 그 중 가장 맛있게 익는 소리를 찾고, 젓가락으로 온 힘을 다해 마늘 한 조각과 고추 한 조각을 집으려는 그 숭고한 몰입. 오직 그 생각 하나 !

 

 

봄날이다. ,    숭숭하다. 연애 한 번 못하고 봄날이 지나가는 것 같다. 오늘 밤 자주 그 남자가 생각난다. 그 남자의 손 끝, 몰입. 행복하게 웃던 모습.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독한 고독을 날마다 씹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그 남자의 숭고한 절망.

 

 

 

 

만물지 ( 37 ~ 38 ) 2011/06.

 

37.  경기도 부평 여자, 텃밭에 뿌린 아스피린.

 

주말이 되면 여자'는 텃밭에 가서 묵묵히 일을 한다. 여자는  그곳에  콩, 도라지, 고추, 옥수수, 토마토'를 심었다. 한해 농사'라지만  수확량은 6살 아이들 소꿉놀이처럼 초라했다.  " 자식들은 다 커서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났으니 너희들이 내 새끼려니 한단다. " 그녀는 가끔 욕실 수납장을 열어서 유통기간이 지나버린 종합영향제나 아스피린 같은 가정 상비약'을 챙겨 텃밭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잘 빻아서 물에 섞어서 뿌려준다고 한다. 잘, 자라라. 자라는 너희들은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 같구나. 아프지 말고 잘 자라라. 그녀의 이 믿음이 어떤 근거에서 비롯되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38.  사회면 기사  :  한강,  19살 소녀.

 

19살 꿈 많은 소녀'가 한강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한강 다리 위에 놓여진 것은 핸드폰이 들어있는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고 한다. 유서도 없었고, 마지막 친구와의 통화도 없었다.  소녀는 한강 다리 위에서 깊고 어두운 강을 바라보았다.  경찰은 힘든 생활고'가 자살의 원인이 아닌가 추측했다. 부모 없이 자란 소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상경하여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월 80만 원의 급여를 받고 30만 원짜리  고시원' 생활을 했다고 한다. 1.5평의 온기 없는 삶. 돌 돌 돌,  누에처럼 몸을 말아 이 긴 밤을 보내야 하는 고된 삶.  이 빈곤이, 희망 없음이, 외로움이 소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 파리와 사귄 적 있다. 2013/02/28

 

이런 고백이 우습게 들리겠지만 나는 파리'와 사귄 적이 있다. 파리지앵과 사귀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파리'와의 교감을 나눈 적이 있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니다. 한계령 너머 강원도 첩첩산중 모텔에서 1년'을 혼자 산 적이 있다. 내 인생 가장 어두운 날들이었다. 잠시 죽을까도 고민했다. 별별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내가 죽고 난 다음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짐 크레이지의 < 그리고 죽음 > 을 읽은 탓이다. 내가 죽고 나면 몰려들 파리와 구더기'를 생각하니 몸서리가 났다. 시발... 파리들 ! 죽을 때까지도 눈엣가시'로구나.  탁상용 시계를 샀다. 내가 죽은 지 3시간 후면 울리도록 설정을 했다. 자,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나자. 안녕, 지구 !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중국산이면 엉터리 시계는 아닐까 ? 혹시... 울리지 않는 것은 아닐까 ? 알람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3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사이 나는 잠이 들었다. 모든 감정에는 임계점이라는 것이 있다. 임계점이 지나면 다시 평온이 찾아오는 법이다. 아마도, 그때 잠들지 못했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

 

늦가을이었다. 파리 한 마리'가 천장에 죽은 듯이 붙어 있었다. 겨울에 가까운 가을이었으니 파리'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모텔 방이 따스해서 아직도 늦여름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당시 나는 사무치도록 외로웠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서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파리는 방 안에 있었다. 늙은 파리였다. 내가 가까이 가도 파리는 경계 반응 속도가 느렸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마트에서 횟감을 사다가 한 덩어리'를 파리에게 던져주었다. 파리는 얌얌...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였다. 기운을 차렸는지 이리저리 몸을 비비며 움직였다.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되었다. 파리는 그렇게 다시 며칠을 더 버텼다.  

 

며칠 서울에 내려가야 했다. 사소한 문제로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법원에 출두를 해야 했다. 서울 내려간 김에 친구도 만나고, 올라오는 길에 강릉에 들려서 후배'도 만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달방으로 돌아왔다. 그때 잊고 있었던 생각이 났다. 파리, 그래 파리 ! 모텔 객실이라는 것이 그렇다. 창문 닫고 객실 문 닫으면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곳이다. 며칠 굶었을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파리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파리를 불러보기도 했다. " 데이빗 ! 데이빗 ! " 내가 파리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침대 옆을 살펴보기도 하고, 에어콘 위를 살펴보기도 했으며 티븨 뒤도 샅샅이 뒤졌으나 파리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울컥해졌다. 다시 나 혼자라는 느낌이 몰려왔다. 이젠 완벽하게 나 혼자구나. 그날 밤 꿈을 꿨다. 몽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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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1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1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히 2013-08-21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울까 말까 -이종택

사과 껍질 벗기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피는 조금 나지만
겁은 더 난다.
울까 말까 피가 괸다.
울까 말까 울까
새발간 핏 발울
그런데 그런데......
울려도 집에는 아무도 없다.

동네한바퀴 운동하러 나갔다가 발을 헛뒤뎌 무릎에 생채기가 났는데
꼬꾸라진 채로 엉엉 소리내어 울기도 하였네요.
가끔씩은 속으로 끙끙대다가 괜한것에 트집을 잡고
울분을 토해내고 싶답니다.

찌릿하니 좋으네요.
슬픔이 차라리 힐링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8-21 14:03   좋아요 0 | URL
피는 조금 나지만
겁은 더 난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정말 기막힌 한 수네요. 겁은 더 난다, 라...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Forgettable. 2013-08-21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깔끔한 단편소설 몇편을 본 기분이네요. 수요일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하루가 길어요. 좋은 하루! ^^

곰곰생각하는발 2013-08-21 14:05   좋아요 0 | URL
엽편이라는 형식도 있더군요.
초단편을 엽편 소설이락 하는데 이 분야에서는 성석제'가 꽤 웃깁니다.

iforte 2013-08-21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라고 하길래 프랑스 파리를 생각했지 설마 그 파리일줄은... 전 귀신과 동거해봤는데. 실제 귀신이 아니라 제가 만들어낸 귀신이었지요. 혼자 사는데 밤에 하도 무서워서 그냥 생각했어요. 이 귀신은 참 예쁜 처녀귀신일꺼라. 그랬더니 정말 너무 이쁜 소녀귀신이 보이는듯 '생각이 드는'거예요. 그렇게 자꾸 생각했더니 얘가 겁이 없어져가지고 나중에는 침대 발치에 앉아서 절 쳐다보기도하고,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나를 어깨너머로 가만 바라보기도하고.. 뭐, 실제 보이는게 아니라 맘속에서 보이는거라고요. 어쨌든, 실체를 부여해주고나니 귀신에대한 공포는 없어지더이다. 그렇게 한달 살다가 완전히 공포가 없어지고 시시해질무렵 다시는 소환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우리의 동거는 끝나고...

학기 시작하자마자 첫날부터 넘 힘들었는지 감기몸살에 걸렸네요. 넘 아파서 화가나는 중이라는....

iforte 2013-08-21 22:41   좋아요 0 | URL
아, 왜 처녀귀신이었냐하면... 총각귀신은 미디어에서 본적이 없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도저히... 상상력 빈곤이라 봐야겠죠. 아님 주변에서 실제로 상상의 모범이 될 잘생긴 총각 모델을 볼수없었다거나...

2013-08-22 0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2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2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2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벽 2013-08-2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봄날은 간다, 얘기가 참.. 좋네요. 저도 읽으면서 존귀한 몰입을 체험했습니다.

패밀리 레스토랑도 한 달 급여가 80만이군요. 그 비싼 음식값에 종사자들에게 박대라니.
예전에 타워팰리스인가 하는 곳 근처에서 몇 달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 바로 옆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거의 망하기 직전이더라구요.
저급하다고 주민들이 찾질 않는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 팀 같은 사람들이나 종종 회식 겸 가고..
참 여러 가지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파리 수명은 두 달 정도라고 들었는데.. 그래도 데이빗은 어디선가 편히 갔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8-22 20:21   좋아요 0 | URL
저거 2년 전 뉴스에서 듣던 거옜어요. 80만 원 받고 30만원 고시원비 내요, 핸드폰비 내면 희망이 없잖아요.
참.. 아프더라고요. 원래 자살히기 전엔 사람들에게 문자를 남긴다고들 하는데 저 소녀는
그런 자살자의 전형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전화를 걸 친구도 없었다고 말입니다. 정말 마음 아프더라고요..

새벽 2013-08-23 00:5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참.. 정말이지 막막했나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8-23 01:04   좋아요 0 | URL
네, 정말 막막했나 봐요. 제가 알기론 부모도 없었어요. 할머니가 키웠다고 하네요. 남동생 하나 있었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첫 일을 한 게 패밀리레스토랑이었나 봐요. 돈이 없으니 고시원 생활을 했고요...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